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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퇴근 시간치고는 늦은 밤 11시이지만 정민희씨(28, 가명)의 목소리는 경쾌하다. 정민희씨는 동대문구 휘경동 J마트의 카운터에서 캐셔일을 한다. 식사 시간을 제하고 난 9시간을 꼬박 서서 손님들의 물건을 계산하는 그의 일은 꽤 고되다. 하지만 정씨는 몇 달 전 대형 K마트에서 캐셔로 일할 때보다 훨씬 더 밝은 표정으로 손님을 대하며 즐겁게 일한다.

그는 4개월 전 대기업 산하의 K마트에서 비정규직으로 1년 넘게 일했었다. 당시에 2개월이나 3개월에 한번 씩 계약 연장을 하며 일을 이어나가야 했다. 퇴직금을 받기 위해서 업체 쪽과 실랑이도 벌였다. 비정규직의 애환이었다.

 

2007년 7월 비정규직 보호법이 발효되었음에도 그는 2년 후 자신이 K마트의 정직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규직으로 사원을 채용하는 다른 업체로 다시 입사하는 편이 더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보장해줄 거라는 판단으로 3개월 전 지금의 J마트에 입사했다. 그는 회사를 옮겨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비정규직 보호법. 말 그대로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이 법 때문에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금 혼란스럽다. 정씨의 경우처럼,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 법이 그들에게 안정적 직장을 보장해 줄 것을 믿지 않는다. 되려 해고될 일을 걱정하기도 한다. 이 법을 두고 기존 법안을 시행할 지 유예할 지, 또 법 시행으로 인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늘어날지, 해고 대란이 올지를 놓고 정치권 안팎으로 그 해석과 해결 방안을 달리한다. 이러한 상황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3년 전 그들의 동상이몽

 

지금의 뜨거운 감자, 비정규직 보호법으로 인해 국회는 파행이 잇따르고 대립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혼란을 가져 온 비정규직 보호법을 통과시킨 주체 또한 현재 격렬히 대치하고 있는 야당과 여당이었다. 소수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진되었던 이 법은 당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민주당)의 보기 드문 화합의 결과물이었다. 그들의 3년 전 동상이몽으로 하여금 지금 국민들은 곤혹스럽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3년 전 자신들이 '동상'이었다는 것은 까맣게 잊고, 현재 '이몽'이니 책임 못 진다, 합의 못 한다 등의 말들만 되풀이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100만 해고설'을 내세우며 법 유예안에 합의하지 않고 있는 민주당을 '반 서민적'이라며 몰아세운다. 하지만 100만 명 해고라는 무시무시한 말로써, 자신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는 이 태도에서 한낱 염치를 찾을 수가 없다. 정말 100만 명이 해고될지 아닐지도 의견이 분분하거니와, 만약 그렇다 친다 해도, 그 상황을 예상한 한나라당은 3년 전 왜 이 법안을 나서서 추진했을까. 결국 3년 전엔 2년 후로,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1년 6개월 후로 다시 문제를 묻고 가고자 하는 한나라당의 행보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목표가 미루는 것 자체에 있지 않느냐는 의심이 들게끔 한다. 

 

실업자는 부담스럽고 정규직은 유연하지 못해서 싫어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실업자가 될 것을 우려한다는 정부와 여당이 내세우는 것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노동의 유연화'이다. 한나라당은 비정규직을 위한답시고 해고를 막자고 하면서도 정작 정규직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실업자는 부담스럽고 정규직은 유연하지 못해서 싫은 것인가. 결국 유연한 노동의 실체는 비정규직 그 자체이다. 이런 노동의 유연화를 추진하는 정부와 여당이 정책기조를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실업자 될래, 그냥 비정규직 할래?'라는 협박으로 정국은 1년 6개월 또는 1년 법 시행을 유예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힐 듯하다. 민주당은 이에 극렬히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비정규직 보호법이 그대로 시행된다 해도 난항이 예상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기업도 있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꺼리는 기업도 있다. 문제는 기업이 법망을 피해 갈 수 있는 구멍이 많다는 것이다. 또 정규직 전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부의 공적 자금은 묶여 있는 상태다.

민주당은 기업에게 2년이라는 시간을 주고 법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 외에, 더 확실한 보호 조처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모범 시행하는 기업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등의 보완적 제도를 마련해서 기업을 설득해야 한다.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조차 그 효과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 하는 상황이 지금의 비정규직 보호법이 근본적으로 미흡한 법이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실망시킬 법은 보호법이라고나 하지 말길 

 

비정규직으로 일할 때의 고충을 묻는 질문에 정씨는 이렇게 말한다.

 

"K마트에서 일할 때, 비정규직 사람들이 원한 건 그저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거였어요. 우리는 정치적인 건 잘 몰라요. 그냥 언제든 해고될 수 있다는 불안감 자체가 비정규직에겐 가장 힘든 일이에요."

 

정규직에 비해 적은 월급에, 4대 보험 등 복지혜택도 없는 비정규직이지만 해고될 걱정만 없어도 만족할 수 있다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소박함은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어 슬프다.

"괜히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줄 듯 기대감만 심어 놓고는 약속 안 지켜서 실망시킬 법은 보호법이라고 하지나 말았으면 좋겠어요. 회사가 법 지키지 않는다고 탓하기 전에 국회의원들이 회사가 법 지키도록 제재를 강하게 하거나, 아님 국가에서 지원해주거나 하면 되잖아요"라고 하는 그의 말에서 정치권에 대한 오랜 불신이 묻어난다.

 

기간보다 방향 설정 명확히 해야

 

이처럼 정부여당의 행보는 의심스럽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혼란스럽다. 기간이 2년인지 4년인지가 문제가 아니다. 정씨의 말처럼 지키지 않는 법은 무용지물이다. 법 시행 후 기업들이 비정규직을 해고할 가능성이 크냐 적냐의 결과를 살펴가면서 법을 바꾸는 것은 안일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비정규직 보호법 추진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먼저 확실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비정규직에게는 실업자의 존재로, 정규직에게는 비정규직의 존재로 말을 바꿔가며 정치권과 기업의 입맛대로 '노동의 유연화'를 고수하는 한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의 불안한 삶은 계속될 것이다. 비정규직 보호법의 목적은 '노동의 유연화'가 아니라 '고용 불안정 해소'가 되어야 한다. 여기저기에서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만의 사회적 합의는 있을 수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그들의 불안감을 해소시킬 수 있는 열린 합의가 필요하다.  


태그:#비정규직, #보호법, #유예, #실업자, #국회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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