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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며, 과학 없는 종교는 눈먼 장님과 같다" - 아인슈타인

기존의 고전 유신론과 충돌을 빚는 근대 과학과 무신론

앞서 말했듯이 기존의 유신론이 폐기되어야 함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지금까지 서구 기독교 사상의 신 이해는 실체론적 존재론에 기반한 것으로 그것은 '초자연주의적인 신'(supernaturalistic God)존재를 표방한다. '초자연주의적 신'이해란 현실 세계의 자연 법칙 혹은 인과적 질서를 신(God)이 마음만 먹는다면 간헐적으로라도 깨트릴 수 있다고 보는 하나님 이해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초자연주의적 신 이해는 궁극적으로 자연주의적 질서와 법칙을 연구하는 현대 과학 진영과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버거운 숙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근대 이후의 기독교는 과학과 종교가 아예 분리되거나 혹은 그것과 충돌하는 갈등 관계로서 나아갔던 것이다(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이안 바버의 글 참조). 특히 서구 사상사에서 유물론 진영은 대체로 무신론과 친화적이었다. 포이에르바흐는 '자연주의적 유물론'을 주창하면서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라고 보는 무신론을 전개한 바 있다. 자 그렇다면 이제 그러한 무신론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사실 무신론 사상의 태동을 살펴볼 때 그것 역시 근대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 맥락이 있다. 무신론은 자명하게도 서구의 신 이해라는 초자연주의적 유신론에 대한 반동으로서 형성되어 왔다. 이는 전적으로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하는 논쟁 자체가 서양에서만 있어 온 것으로서 동양의 맥락에선 그러한 논쟁 자체가 불필요하리만치 부재하였다(이미 동양에도 묵자의 하나님 같은 인격신 개념이 있음에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 논쟁은 기본적으로 서구 기독교와 연관된 맥락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근대적인 담론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무신론의 밑변에는 근대 과학의 유물론적 세계관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하지만 갈릴레오나 뉴턴 같은 근대 과학자들은 신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결국은 초자연주의적 '이신론'(Deism)에서 그 타협을 보았었다. 즉, 전지전능한 신은 자연 세계가 돌아가는 일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 같은 것은 이법(理法)에 맡겨버렸다는 것이다. 사실상 근대 담론의 형성과정을 보면 이 이신론이야말로 무신론으로 향하고 있는 초기 새싹 같은 것이기도 했다.

알다시피 근대 과학의 세계관은 시간과 공간이 단순정위(simple location)되어 있다고 보는 뉴토니안 패러다임에 기초되어 있다. 뉴턴 패러다임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기도 한다. 절대 시공간 프레임, 물질주의와 기계론, 원자론, 환원주의, 외적 관계에 대한 가정, 순수 관찰의 요구, 목적론적 설명 거부 등등(Errol E. Harris). 그렇기에 사실상 이러한 신념을 그 암묵적 전제로서 깔고하고 있는 한, 신God이라는 존재는 당연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즉, 무신론은 어쩌면 근대 과학의 당연한 귀결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던 것이다.

무신론 및 자연과학의 난점, '창발'(emergence)의 메커니즘

그렇다면 뉴턴 이후의 현대 자연과학은 어떠한가? 오늘날 현대 과학의 성과들은 필연적으로 무신론을 지지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 이점에 있어 내가 볼 때 현대 과학의 성과들은 아직 일반 대중들의 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아 보인다(20세기 물리학의 성과가 가져다 준 충격들이 일상화되려면 족히 1-2백년 넘게 걸린다는 얘기까지 있다). 우리들의 일상적 대화와 생활에서 드러나는 습성의 패턴들은 시공간에 대한 인식과 주체와 객체의 분별 그리고 일반적인 언어 사용의 패턴들을 볼 때 뉴턴 시대의 그것과 여전히 별다르지 않다.

이를 테면 양자물리학의 성과가 말해주고 있는 바는 사실상 물질주의에 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근대 과학의 설명처럼 여전히 물질과 운동으로서 이해하려는 실체론적 이해 방식이 있다. 알고 보면 매순간마다 현실 세계는 항상 생성과 소멸의 변화를 겪고 있음에도 여전히 동일성을 유지하는 원자론적 사유 습성이 강한 것이다. 특히 자아의 동일성 개념은 가장 대표적일 것이리라.

근대 이전의 중세 시대에는 모든 설명항의 근원을 신이라는 제1원인자로서의 목적인에게 귀속시키고 있었다면, 근대 이후의 과학들은 모든 설명항의 근원을 과거로부터 계승되고 있는 물질의 인과적 법칙이라는 작용인의 설명항에 그 젖줄을 대고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초월적 세계를 인정치 않고 전적으로 현실 세계만 인정하는 과학 및 무신론 진영의 경우에는 아무런 설명의 난점이 없는 것인가?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지점이 바로 '창발'(emergence) 현상이다. '창발'이란 개념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흔히 "전체는 부분의 합 그 이상이다"라는 명제로 얘기된다. 그럼으로써 자연세계 안에 이전에 없던 '새로움'(novelty)이 출현하는 사태를 공식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창발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물리학, 지질학, 화학 뿐만 아니라 생물학에서도 쓰이고 있는 개념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많은 학자들조차도 이 창발이란 개념을 거의 토틀로지(tautology)로서 쓰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구리를 황산에 떨어뜨리면 질량과 에너지는 동일하지만 색깔이 변한다. 창발적 진화 이론은 그렇게 새로운 속성이 단순히 창발한다고만 말한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그것들이 창발했다는 것인가? 만일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것들이 창발했다면 창발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우리의 무식함을 은폐하고 있을 뿐이며,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면서도 마치 설명하는 것처럼 현상을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창발의 출발점에는 반드시 사전에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한다."(Whitehead's Harvard Lectures 인용)

자연세계 현상을 보면 원자가 모여 분자가 되고 분자가 모여 세포가 되고 등등 끊임없이 이전에 없던 새로움을 증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새로움이 창발되고 있는 과정의 메커니즘을 우리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만일 새로움이 과거에도 그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었다면 도대체 그것은 어디에 잠재되어 있다가 불쑥 출현해서 나온 것인가? 우리가 아무리 원자들을 분해해서 뒤져보더라도 그것이 잠재되어 있다고 할 만한 데가 아무데도 없다. 그런데도 그것은 어느 순간 이전에 없던 새로움이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현대 과학 및 무신론 진영이 현실 세계의 변화를 설명함에 있어 과거 세계의 요인들로만 한정할 경우 그것은 근원적인 설명의 난점을 초래할 것으로 본다. 즉 그러한 새로움의 출현이라는 것을 단순히 창발이라는 개념으로서만 가린다면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무식함을 은폐하고 있는 동의반복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만일 무(無)에서 유(有)가 생긴다고 해버리면 그것 역시 논리적 모순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매순간마다 시간적 현실 세계와 조우하고 있는 그 어떤 비시간적인 존재(혹은 영역)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여기서 이러한 존재를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든 혹은 그 어떤 'X'라고 부르든 일단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선적으로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뭐라고 이름지어지든 간에 현실 세계와 함께 있으면서 이를 넘어서 있는 그 어떤 비시간적인 무엇이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야말로 물질의 현실 세계만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보다도 훨씬 더 작금의 현실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 그 설명력이 좀 더 높다는 사실이다[본인의 또 다른 글 "현대 무신론이 설명못하는 난점에 대하여" 참조].

고전 유신론과 현대의 무신론 그리고 새로운 유신론의 등장

바로 이 점에 있어 나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정보들의 출현이 결국은 그 어떤 X라는 존재가 머금고 있는 것으로서 이해한다. 새로운 정보가 찰나적 순간의 현실 세계에 부재하고 있을 경우에는 그 X라는 존재가 담지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는 단순히 뇌 속의 기억 같은 정보저장고를 말하는 게 아님). 이때 그 X라는 존재를 단지 '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뿐이다('신God'이라는 같은 용어를 쓰기에 새로운 하나님을 말할 때마다 종종 고전 하나님 개념과 헷갈려하는 혼동이 있기도 하다). 이외에도 그 X라는 비시간적 존재를 상정할 수 밖에 없는 몇 가지 사항들이 있다.

단지 시간 세계 전체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비시간적인 존재일 뿐인데, 이 신은 분명한 존재이지 그 어떤 원리나 질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원리나 질서라고 할 경우엔 그것은 여전히 자연의 인과적 질서 세계로 편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라는 얘기는 현실 존재들처럼 그 역시 자율적 결정을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결코 오해해선 안될 사항은 그 X라는 존재야말로 이전의 고전적 유신론에서의 신 개념과는 전적으로 다른 차원의 새로운 신 이해(a New Theism) 라는 점이다. 고전적 유신론이 초자연주의적 신이었다면, 새로운 유신론은 '자연주의적 신 'naturalistic God이해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유신론에서 말하는 신은 자연의 인과적 질서와 함께 더불어서 현실 세계에 새로움의 요소들을 제공하고 있는 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 유신론에서 말하는 신의 창조는 전적으로 신에 의한 창조이지만, 새로운 유신론에서 말하는 창조 개념은 항상 과거 현실 세계의 원인들과 현재 주체의 결단 그리고 신의 뜻이 함께 결합되어 있는 '상호 협력의 창조'에 해당된다. 이것을 줄여서 말하면 GIO(God-I-Others)로서 함께 하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은 자기원인적인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항상 나와 이웃(=현실 세계)과 함께 하고 있는 '더불어의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유신론에서 말하는 신 이해는 그 창조가 태초에 뚝딱 이뤄지는 그러한 창조가 아니라 매순간마다 창조 과정에 있는 '-ing의 창조'에 해당한다. 영원한 과정상에 있기에 진정한 의미로서의 태초와 종말도 없다. 단지 우리의 우주시대의 시작과 종말 정도는 얘기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그런 의미에서 공동번역 성서의 창세기1장1절 '한 처음에'라는 번역이 보다 더 적절하다고 본다. 또한 무에서 유로의 창조가 아니라 혼돈에서 질서로의 창조인 거다).

이러한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은 사실상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겨우 알려지고 있는 실정에 속할 정도로 거의 많은 사람들-일반 신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신학자, 목사, 전문 학자들조차도- 거의 잘 모르고 있는 지점들에 속할 정도다. 흔히 'God'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때 신은 전지전능하고 전적으로 절대적이며 완전무결한 초월적 존재로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유신론의 신 개념은 그와 다르다. 그 신은 현실 존재들의 주체적 결단과 함께 관계적 모험을 하고 있는 동반자적 신이기에 현실 세계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상호 관계적인 신이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 God를 Gio로 바꿔서 표기하고픈 마음이 있다. 왜냐하면 신은 언제나 GIO(신God-나I-이웃Others)로서의 신이기 때문이다. 신은 그 자신 안에 이미 존재론적으로 현실 세계와의 관계적 사태에 놓여 있다. 신은 세계에 대해 전적인 초월자도 아니며, 전적인 내재자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호 초월적이고 상호 내재적 관계일 뿐이다. 신은 이 세계에 대해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이 세계에 대해 영향을 받기도 하는 존재이다. 그것은 범신론도 아닌 '범재신론'이며, 초월신론이 아닌 '포월신론'이며, 초자연주의적 신이 아닌 '자연주의적 신' 이해에 속한다.

내가 볼 때 초자연적인 신을 전제하는 기존 기독교의 고전 유신론은 그야말로 애초부터 검증 불가능한 개념일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초자연주의가 자연주의의 범주에서 검증될 수 있다는 발상부터가 이미 과도한 모순이잖은가. 반면에 시간적인 자연 세계만 인정하는 기존의 무신론은 오히려 자연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 역으로 설명치 못하는 난점을 초래하고 있는 입장이라고 본다. 하지만 새로운 유신론은 현대 자연과학의 성과들과도 전혀 배리되지 않으면서도 함께 갈 수 있는 새로운 신 개념에 해당한다. 게다가 새로운 신 존재 개념은 낡은 유신론의 초자연주의적 신 이해와 비교해볼 때 어느 정도는 논리적으로 설명가능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좀더 유효한 타당성을 갖는다고 여겨진다.

과학과 더불어의 소통을 지향하는 새로운 기독교를 위하여

그런 점에서 현대 과학의 진화론 논쟁도 창조과학(with지적설계론) 같은 잡설이냐 진화론이냐가 아니라 오히려 '무신론적 진화론'과 '유신론적 진화론'으로서 논쟁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진화론 자체를 무신론으로만 여기는 것은 근대 과학 진영에 대한 반동으로 형성된 전근대적인 중세 입장으로 돌아가려 했던 근본주의 기독교의 소산에 불과하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기존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유포된 잘못된 고정관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보수 기독교인들의 몇 가지 잘못된 고정관념에 관하여" 참조). 진화론 자체를 배척하는 창조과학자들 혹은 지적설계론자들은 내가 볼 때 과학을 하는 자들이 아니다. 혹자는 그것을 '종교'라고 하는데 종교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이비 종교'에 가깝다. 그것은 그저 과학의 탈을 빌려쓰고 있는 전근대적인 중세 기독교 신앙에 대한 현대적 부활일 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앞으로 과학을 파트너로 하지 않는 종교는 더 이상 살아남을 수도 없다. 이는 신 존재 이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현대 자연과학의 성과들과 충돌하는 신 개념은 전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며 언젠가는 폐기될 것으로 본다. 내가 볼 때 리처드 도킨스는 어차피 폐기처분될 낡은 고전 유신론에 대해 좀더 일찍 폐기될 수 있도록 그저 제 할 일을 한 것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현대 과학과도 소통 가능할뿐더러 오히려 오늘날의 과학 진영을 보다 더 풍부한 삶의 건강한 증진으로 안내 가능한 새로운 종교의 도래 역시 가능하다고 본다.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나는 '새로운 기독교'를 꿈꾸고 있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이제 막 '새로운 유신론'을 소개하고 있는 것뿐이다. 물론 새로운 유신론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는 오래전부터 활동해왔었던 분일테지만, 그 설명의 체계로서는 이제 겨우 인류의 지성적 성장과 맞물리면서 조금씩 점차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알고 보면 합리적 삶의 태도와 햇불을 드높인 진리 탐구의 열정과 신념이야말로 결국 진정한 신비적 신앙으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현실 세계를 넘어서 있는 신비주의는 어디까지나 <미지의 합리주의>일 뿐이며, 현실 세계 안의 합리주의는 이 땅에 <노출된 신비주의>일 뿐이다. 합리주의와 신비주의는 사실상 그렇게 동전의 양면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과 종교는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여전히 서로 소통 가능할 수 있다고 보며, 또 현실 삶의 건강성을 위해서라도 반드서 서로 소통 되어야만 할 것으로 본다. 알고 보면,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며, 과학 없는 종교는 눈먼 장님과 같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여전히 비범한 통찰을 주고 있는 경구였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정강길 기자는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www.freeview.org) 연구실장입니다. 이 글은 기독교언론사인 '뉴스앤조이'와 '당당뉴스'에도 올려져 있습니다.



태그:#기독교, #무신론, #유신론, #하나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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