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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한국 문학의 두 축이었던 김수영과 신동엽은 혁명과 자유를 노래했다. 김수영은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의 자유를 말하며 이는 참 자유를 위해 힘껏 날아올라 봤던 사람만이 알 거라 했다.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지를. 혁명은 왜 고독한가를. 왜 고독해야만 하는가를. 오직 자유를 위해 피 흘려 본 사람만이 진정 알 것이라 했다.

김예슬양의 대자보를 보면서 자유를 향한 그녀의 날개 짓에 내 가슴은 버거웠고 또 아팠다. 뚜렷한 피의 흔적 때문이다.

선택당하는 삶이 아니라 선택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그녀는 필경 자주 길을 잃을 것이고, 새로운 도전 앞에 설 것이고, 상처를 받을 것이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그의 예측에 축복을 보낸다. 길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었는지 조차 모르고 마냥 질주하고 있지 않는가. 창조적 도전을 외면하는 젊음 또한 얼마나 많은가. 상처를 통해 새 살이 돋는 진리를 잊은 지 얼마나 오랜가. 이런 현실에 맞서겠다는 그의 결기를 보는 듯해서 축복을 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김예슬양에게, 아니 수많은 잠재적 김예슬양에게 큰 학교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청년 100일학교>다. 그들의 결단과 용기를 잘 살리는 곳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머슴을 키우는 대학 현실에 절망하되 선택지가 없어 더욱 막막한 젊음들에게 나는 이 학교를 권하다. 몸과 더불어 인격과 자존마저 연봉계약서에 끼워 기업에 팔아 넘겨야 하는 슬픈 세대들에게 <청년 100일학교>는 정녕 희망의 조타수가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절망과 분노의 열정으로 저항의 길에 나섰다가 넘어지고 상처 입을 수많은 제2, 제3의 김예슬양들이 사람의 참 본성을 회복하여 대자유인으로 거듭나 본래본성인 태양 같은 존재로 환원(還元)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다.

이 세상에는 해야만 하는 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란 없다. 오직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뿐이다. 누구나 결국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 그럼에도 자기가 해 놓고도 하고 싶어 한 게 아니라며 그 무언가를 탓한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의 자유는 그 무언가에게 속박된다. 내가 주장하는 '자유'의 신개념이다. 자유는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감히 손 댈 수 없다. 100일학교 에서는 바로 이것을 명확하게 보게 된다.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산다. 뜻 하는 바대로 세상을 만들어 간다. 즐겁게, 밝게, 보람 있게, 어떠한 경우에도 순수를 잃지 않고 당당하며 당당해서 자유롭다. 무슨 신비적 교의가 아니다. 본래 세상의 사람 모습이 그러함을 뒤늦게 발견하고 그렇게 사는 것을 시작하는 움직임이 이 <청년 100일학교>다.

김예슬양이 대학을 거부했다고 보는 것은 미온적인 시각이다. 대학을 탈출했다고 봐야 한다. 빠삐용의 스티브맥퀸 못지 않은 결단이자 용기이다. 어찌 대학뿐이라 하겠는가. 그녀가 평생을 갇혀 지내던 모든 억압과 관습, 남의 시선과 의례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것이라고 본다. 바야흐로 시작이다.

지금부터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면 대자유의 삶이 열릴 것이다. 그걸 이 <청년 100일학교>에서 배울 수 있다. 대자유로 사는 삶 자체가 이 학교다. 그러므로 보통명사로서의 '김예슬양'들이 앞으로 시민단체에서 일하건, 직장을 얻건, 대학의 진취적인 동아리에서 활동하건, 농부가 되건 그 조건과 환경에 관계없이 참 자유, 창공을 누비는 노고지리의 비상을 제대로 누릴 것이다.

3월 31일까지가 모집 기간인 <청년 100일학교>는 단 10여 명만 뽑는다. <사단법인 밝은마을>에서 세 번째로 여는 학교다. 제1기 100일학교는 작년 1월 24일자 한겨레신문 생태칼럼에 필자가 쓴 '어떤 졸업식'을 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2기 100일학교를 거쳐 3기가 되는 셈이다.

많은 사람들과 신문지면과 방송들이 김예슬양의 선언을 전하지만 정작 수많은 김예슬양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안내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청년 100일학교>를 제시한다.

김예슬양의 대자보앞에서 그의 용기를 칭송하고, 자본이 접수한 대학 현실을 개탄하며 심지어는 교수들은 이 순간 뭐 하냐고 질책을 하는데 바쁘고 그 누구도 이런 젊은이를 향해 다음 발걸음을 안내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삶을 보여 주지 못한다. 그래서 김예슬양이 안타깝다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100일 학교>다.

이 학교 교장인 황선진 선생은 청년 100일학교 취지문에서 우리가 사는 지구를 오염, 전쟁, 갈등을 넘어 밝고, 에너지 넘치는 빛의 땅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해 나가자고 권유한다. 그리고는 청년들을 향해 말한다.

"모든 사람과 생명이 간절히 바라는 무등(無等)의 대동 세상은 청년들의 땀을 필요로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각 개인이 하나의 소우주로서, 이 세상의 중심임을 확인하고, 나 이외의 생명 및 존재들과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우주다. 부처가 말씀하신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모든 개인이 둘도 없는 존귀한 우주 그 자체라는 혁명적 선언이다. 수운(水雲)의 시천주(侍天主) 사상 역시 같은 말이다. 손가락질, 칼질로 잘못을 들추어 내는 노력의 반의 반이면 된다. 밝은 에너지를 모아 밝은 세상 만들어 가는 디딤돌이 되는 100일 학교의 존재 이유다.

청년 100일학교는 이렇게 속삭인다.

"내가 하늘이 되고, 하늘의 이치를 체득하는 길로 가는 사다리는 태초 이래 면면히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청년 100일학교는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스스로 하늘이 되>려는 소박한 노력입니다."

1기와 2기 100일학교 교사로서 필자는 사람에게 참 공부가 무엇인지 비로소 확신을 갖게 되었다.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절망이 어떻게 깨어지는가를 목도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이 어떤 것인지 벅차게 자각하게 되는 게 100일학교이다.

모든 진보적 가치들도 결국은 사람문제로 갈등하고 대립하며 분열하지 않는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고 기회의 균등을 주장하면 진보인가?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생명과 평화를 주창하면 진보인가? 삼성을 비판하고 무상급식을 찬성하면 진보라고 하는 초보적인 단계를 넘어서자.

청년 100일학교를 통해 넘어 가 보자. 이런 것들은 기본이다.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새 세상은 한 발 두 발. 설레는 두려움 안고 나아가야 한다. 나 자신이 온전히 밝은 존재가 되는 그 지점까지.

생명살이 농사, 발효식품, 민족의학, 풍물, 공동체 마을 만들기, 기공춤, 몸살림운동, 물수련, 집중 마음공부, 생태집짓기, 본국검(本國劍), 종합예술공연 등으로 심신을 연마한다. 100일동안의 출가수행이며, 창조적 고증을 통해 실용화한 화백회의, 복원력이 기본 성질인 보이차, 북미원주민 걷기 등을 일상 생활화 한다.

수료 이후에는 산촌유학, 지역아동센터, 대안학교 등이나 신화마을네트워크, 마리영농조합, (주)티프로모션과 같은 대안공동체 중 희망하는 곳에서 인턴십 근무를 하고 개인 여건에 따라 정식 활동가로 일하게 되는 이 <청년 100일학교>에 무수한 김예슬양들이 오기를 바란다.

가슴 뛰는 삶 속으로 한발한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프레시안>에도 기고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잔는 사단법인 밝은마을의 이사며 <청년 100일학교>의 '생명살이 농부학교' 교사이기도 합니다.



태그:#100일학교, #밝은마을, #김예슬, #전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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