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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영어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글귀가 야만적이고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 영어학원 버스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영어가 되어야 합니다!'라는 글귀가 야만적이고 폭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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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파트에서도 자주 보는 수많은 학원 차들 가운데는 영어학원 차임을 강조하는 중형버스도 있다. 가장 기세 좋은 그 차량의 양옆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영어가 되어야 합니다!"

얼마 전 그 차를 처음 보았을 때 피가 역류하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았다. 당뇨환자 처지에서 갑자기 저혈당 증세를 느꼈던 것도 같다.

그때는 대뜸 이명박 대통령의 말이 떠올랐다. 언젠가 그가 "대학에서 국어와 국사도 영어로 가르치면 좋을 거"라고 했던 말…. 국어실력은 엉망이면서도(방명록에 남기는 짧은 글줄에도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몇 개씩 틀리고, 주어와 술어가 전혀 호응하지 못하는 말을 적으면서) 영어 좀 할 줄 안다고 영어신봉자가 되어 버린 대한민국 대통령의 '실용교육'이 오버랩 되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그 차를 보는 순간 주로 카이스트(KAIST)라고 부르는 한국과학기술원 서남표 총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후 걷기운동을 하려고 아파트를 나설 때 중형버스 한 대가 기세 좋게 아파트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영어가 되어야 한다'고 부르대는 차였다. 그 글자들 위로 서남표의 얼굴이 얼비치는 것이었다.

4년 전 서남표가 총장이 된 이후로 KAIST에서는 전 과목 100% 영어 강의가 실행되어 왔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는 서남표가 확실한 '개혁'을 했다. 일국의 유수한 상아탑, '학문의 전당'에서 자국어를 송두리째 몰아내는 '쾌거'를 이룩했으니 일대 개혁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그런 개혁은 전국의 모든 대학들에서 KAIST를 선두 자리에 올려놓았다. 일단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셈이 되었다.

KAIST에서는 일본어와 동양사, 동양철학 등도 100% 영어로 수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대학에서 국어와 국사도 영어로 수업을 하면 좋을 것"이라고 했던 이명박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아무래도 서남표와 이명박은 숙명적으로 일맥상통하는 차원이거나, 서남표가 이명박에게 영향을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바꾸거나 뜯어고치면 그게 다 '개혁'인 줄로 아는 사람들, 머릿속에 온통 '경쟁'이라는 단어만 꽉 차 있는 사람들, 세상 사물을 다각도로 보지 못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내 나름으로 '폐쇄성 유아독존형'이라고 부른다. 그들을 심리학적 분석의 눈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일단 인생 경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사람들이다. 노고와 고생의 질량이야 어떠하든 인생 경쟁에서 승리하여 오늘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의 승리는 인정받아야 하고, 만인의 축하와 칭송을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그들의 그 승리와 그 자리는 만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소수 중에서도 소수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만인에게 자리 경쟁을 강요한다. 실력 배양에 그쳐서는 안 되고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닦달을 한다. 만인을 경쟁의 고통 속에 몰아넣는 그 닦달질을 통해 그들은 쾌감을 얻는다. 자신의 승리와 성공을 확인하고 반추하는 희열이다.

자신의 성공과 승리에서 오는 현시욕을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 그들은 자신을 닮고 따르라는 식의 경쟁 닦달질을 계속하지만, 그러면서도 낙오자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기는 자가 있으면 지는 자가 있기 마련이고, 레이스에 참가한 사람 모두가 똑같이 일등을 할 수는 없는 법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경쟁에서 지는 사람들을 배려할 줄 모른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탓이다. 노고와 고생의 질량이야 어떠하든, 또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안 해 본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바다에서 순항을 누리며 그저 이기기만 하고 성공신화(?)만을 쌓는 삶을 살았으니, 자신의 시야 밖을 헤아릴 재간이 없다.

설혹 자신의 시야 밖을 헤아릴 재간이 있다 하더라도, 그 어떤 것도 연민의 대상이기에 앞서 자신이 견지하는 '경쟁'과 '승리'라는 가치기준을 정당화해주고 강화시켜 주는 것일 뿐이다. 생리적으로 경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온정이나 철학적 품성이 박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영어가 되어야 한다!'는 영어 학원의 그 강박은 이명박과 서남표를 떠올리게 하는 것 외로도 여러 가지 유추를 가능케 한다.         

영어는 만국공용어이니까. 한국인으로서 영어를 못하면 출세도 못하고 행세를 못하니까. 이미 한국은 미국의 언어속국이고, 문화식민지이며, 언젠가는 미국의 51번째 주가 될 테니까. 오늘의 실용위주 교육환경이 지속된다면 우리의 모국어는 점점 위축되고, 자국어에 대한 사명감과 자부심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계속 국가 지도자도 되고 사회 각 부문의 리더들이 될 테니까. 영어 숭상 풍조와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니까. 등등….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영어가 되어야 한다'고 부르대지 않더라도, 또 대학교의 전 과목 100% 강의를 시행하지 않더라도 영어 공부를 할 사람은 한다. 우리 교육에서 영어는 이미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게 난리를 치고 요란을 떨지 않아도, 영어는 이미 대한민국 국민의 필수 요건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판국에서는 국가 지도자가 역으로 자국어에 대한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국가 지도자가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영어가 되어야 한다'는 영어 학원의 수준과 똑같은 시야를 가져서는 안 된다. 영어 학원의 수준과 국가 지도자의 시야, 그 범속함이 똑같다는 데에서 큰 슬픔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자존심이다. 또 자존심은 개인의 자존심을 초월하여 공동의 자존심을 형성할 때 진정한 자존심이 된다. 국가 지도자는 국가의 자존심, 민족의 자존심도 챙길 줄 알아야 한다.

저 6공 시절의 노태우처럼 유엔 가입 후 한국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을 때 영어 능력이 좀 있다고 자국어가 아닌 영어로 연설을 하는 치졸함 따위는 벗어나야 한다. 그때 노태우가 영어 능력을 지녔음에도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자국어로 연설을 했다면 전 세계에 얼마나 깊은 인상을 주고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국가자존심)을 세웠을 것인가!

영어 좀 할 줄 안다고 국가 지도자가 공식 자리에서 통역 없이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치졸한 짓이다. 외국 지도자를 상대하거나 공식 석상에서는 반드시 고유 의상을 착용하는 중동의 국가 지도자들처럼은 하지 않더라도(내가 이승만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한 가지는, 그가 미국이나 외국 지도자들을 만날 때는 주로 한복두루마기를 입었다는 점이다), 언어만큼은 자국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인격도 살고 국가자존심도 사는 것이다.

서남표가 KAIST에서 전 과목 100% 영어 강의를 실시하여 전국의 모든 대학들 가운데서 선봉을 차지하고, 일시적으로 '경쟁'에서 우위를 점했는지는 몰라도, 그의 그런 '용단'은 대단히 야만적이다. 야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을 주로 가르치는 대학이라 해도 그렇지, 학문의 전당에서 그런 일이 자행된다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요, 비극이다.

자국어를 무시하고 모멸하며 민족자존심을 내팽개치는 대학이 대학인가. 그런 사람이 어떻게 지성인이요, 지식인인가. 그런 사람은 대학 총장 자리에 앉을 자질이나 자격이 애초부터 없는 부류다.

지금은 보궐선거가 실시되는 때이다. 그리고 세월의 또 한 고비를 넘기면 본격적인 선거, 물갈이 때를 맞게 된다. 이제는 국민들이 외형적인 능력이나 자격에만 눈을 팔지 않았으면 한다. 실용만능주의에 현혹되지 말고 내면적인 가치, 인격과 인품이며 민족자존심과 철학적 품성을 얼마나 지닌 사람인가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한다.

국민부터 정신을 차리고, 철학적 품성을 지니고, 다시는 속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태그:#영어제일주의, #한국과학기술원, #서남표, #이명박, #전과목 100% 영어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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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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