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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돌이 아빠 길중선씨(69)
 순돌이 아빠 길중선씨(69)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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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못 고쳐요. 기판을 새로 다 갈아야 돼. 새로 하나 사는 수밖에 없어요."  

어느 날 여유롭게 음악을 듣고 있는데 파워 앰프에서 매캐한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뜯어보니 전자기판 한가운데 있는 부속 몇 개가 까맣게 타 있었다. 가만히 두면 부속 전체가 망가질 게 뻔했다.

해당 앰프 회사는 오래 전 문을 닫았고, 단종제품인지라 앰프 중고판매 겸 수리점을 찾아갔다. 하지만 주인장은 고칠 수 없다며 버리고 중고제품 하나 장만하라고 성화다. 꽤 묵직한 앰프를 들고 이 집 저 집 다녀봤지만 하나같이 '고칠 수 없다'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골목을 헤매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어렵게 물어물어 전파사 한 곳을 찾았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부속 하나하나 다 확인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어. 맡겨놓고 내일 찾으러 와."
"고칠 수 있겠어요?"
"사람이 만든 건데 못 고치는 게 어디 있어. 고생스러워서 그렇지…."

다음 날 전파사를 찾아가니 수리가 끝나 있다.

"다른 부속 상한 거 없나 다 확인했고, 완벽하게 고쳐났으니 맘 놓고 써."

'순돌이 아빠' 길중선씨  "사람이 만든 건데 못 고치는 게 어딨어"

만능수리점 전파사
 만능수리점 전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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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만능 전자제품 수리기사인 '순돌이 아빠' 길중선(69)씨에 대한 호기심은 이렇게 시작됐다. 3∼4평 남짓한 그의 가게는 전파사보다는 고물상을 떠올리게 했다. 진열장에 전시된 카세트는 전자제품 박물관에서나 나올 듯한 수십 년 전 제품이었고, 겹겹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작업장 안은 길씨가 앉아 일할 의자와 책상, 손님 한 명이 겨우 앉을 만한 공간이 전부다.    
     
- 전파사, 전자제품 수리는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어렸을 때부터 했어. 국민학교, 중학교 때부터 라디오 같은 전자제품을 뜯었다가 다시 맞췄다(조립)가 하면서 놀았어."

- 직업으로 '순들이 아빠'를 시작한 때는요?   
"집이 가난해서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못 갔어. 그래서 당시 '충남무선기술학원'에 가서 기술을 배우기로 했어. 8개월 만에 수석으로 졸업했는데 당시 우리 기수는 7명인가 8명만 졸업했지. 끝까지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 졸업 후에 전파사에 직공으로 취직해 1년 가까이 일했어. 그러고는 대전 대동 3거리 근처에 자그마한 내 가게를 차렸어."

20대 초중반이었던 당시는 길씨의 전성기였다.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고 제법 돈도 많이 벌었다.

"68년과 69년인데 그때는 진공관 전축시대야. 테레비(TV)는 구경하기 어렵고 라디오 아니면 전축이었지. 진공관 전축을 부품을 사다가 완제품을 직접 내가 만들었어. 케이스까지 사다가… 많이 팔 때는 일주일에 2대도 팔아봤어. 그때 쌀 한말이 1000∼2000원 할 때인데 전축 한대에 8만 원에서 9만 원씩 받았어. 벌써 까마득한 옛날 얘기네…."

하지만 돈의 소중함을 잘 모를 때라 쓰기 바빴지 모으지는 않았다. 스물여섯 나이에 미루던 군대에 입대했지만 천식으로 6개월 만에 의가제대했다. 제대 후에도 전파사를 계속했고 27살에 결혼을 해 1남 3녀를 두고 살아오는 지금까지 여기저기 가게 장소를 옮기며 전파사 일을 놓은 적이 없다.

"그러니까 제품 수리하는 일만 한 50년 정도 한 셈이네... 근데 근래에서야 쬐그만한 아파트 하나 장만했어. 그것도 딸애들이 번 돈 보태서…."
  
- 돈벌이 좀 되지 않았나요?"
"젊을 땐 세상물정 모를 때니 쓰기 바빴고 좀 시간이 지나니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죄 바뀌는 거야. 좀 지나니 수입품이 들어와서 중구난방이 됐어. 이 기술이 옛날에는 고급기술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대우 못받는 일이 됐어."

'고급기술'에서 어느 날 '대우 못받는 일'로

휴대용 카세트를 수리하고 있는 길중선씨
 휴대용 카세트를 수리하고 있는 길중선씨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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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씨는 아날로그는 물론 디지털 제품까지 못 고치는 게 없다. 그러면서도 아날로그 제품 예찬론자다.
-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를 다 거치셨는데 그 차이를 설명한다면요?
"아날로그 제품은 퉁퉁하고 번거로운 대신 중후한 맛이 있어. 디지털 제품은 간단하고 빠르게 취급하기 좋아서 매력이 있지만 흡족하진 않지."

- 아날로그 제품과 디지털 제품 중 어느 쪽에 후한 점수를 주시나요?
"나야, 당연 아날로그지. 예를 들어 영화관에서 옛날 입체음 스피커로 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들으면 '펑'하는 폭발음에 잔해물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는 잔음, 여기에 쇠가 울리는 진동음소리… 그 생생한 현장감은 지금 극장 스피커에서는 느낄 수가 없어. 이건 느껴본 사람만 알지."

- 그래도 요즘 전자제품이 더 성능이 뛰어나지 않나요?
"절대 그렇지 않아. 오히려 옛날 제품이 뛰어났어. 한 예로 요즘 오디오 제품은 소리 부분만 놓고봐도 증폭장치와 출력장치 기본만 장착돼 있어. 옛날 기계는 증폭장치에 보강회로를 갖춰놨지. 그래서 기준치 이상의 예상치 못한 게 들어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요즘 제품엔 원가절감한다고 보강회로 같은 안전장치가 빠져 있어서 입력치가 조금만 높아도 출력장치가 부담을 느껴서 깨져버려."

- 다른 제품도 그런가요?
"그렇지. 많이 쓰는 선풍기도 마찬가지야. 옛날 국산 선풍기는 모터가 크고 코일이 굵은 놈으로 많이 말려 있어. 그래서 아무리 돌려도 모터가 열을 안 받아. 요즘 선풍기는 가볍게 날씬해졌지만 모터가 작고 코일도 가늘고 해서 오래 돌리면 열을 받아 고장이 잦아. 특히 중국산 선풍기는 1∼2년 안에 고장 나기 일쑤지. 옛날 국산 선풍기는 지금도 한번 고쳐놓으면 몇 년 동안 끄떡 없어."

"고치지 않고 바꾸는 것은 서비스 아닌 장사"

앉을 틈도 없는 전파사 안
 앉을 틈도 없는 전파사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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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요즘 대형 전자제품 회사들의 서비스센터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고장난 제품을 고치지 않고 바꾸는 것은 수리서비스가 아닌 장사라는 게 그의 직업관이다.

"손님들이 서비스센터 갔다가 다시 여기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 서비스센터직원들이 잔 부품이 고장 나도 기판을 통째로 바꾸라고 한다는 거야. 쉽게 고치는 대신 수리비가 많이 나오잖아. 또 서비스센터 직원들이 '고쳐봐야 또 고장 나는 데 뭐 하러 고치냐, 새로 사는 게 낫다'고 하는 경우도 많더라고. 내가 손대보면 다 고칠 수 있는 것들인데도 말야. 다는 아니겠지만 이런 식으로 제품을 수리하면 서비스가 아냐. 그냥 장사에 불과한 거지."

지금 그의 가게를 찾아오는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오랜 단골들이 대부분이다. 단골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갈수록 그 수도 줄어들고 있다. 이날도 노인 한 분만이 휴대용 카세트를 고치러 왔다.

"단골이 많아. 충남 금산, 논산, 공주 이런 데서도 찾아와. 하지만 단골들 평균 나이가 70대라 자꾸 줄어들지. 요즘 사람들은 예전처럼 전자제품에 애착심 갖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새로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몇년 전부터 손님들이 눈에 띄게 확 줄었어."

- 가끔 못 고치는 제품도 있지 않나요?
"요즘 고치러 오는 게 오디오, 테레비, 믹서기, 난로, 청소기, 선풍기, 비디오, 녹음기, 야외 전축 이런 거야. 고치러 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착같이 쓸 수 있게 해줘. 특히 나이 드신 분들 것은 여하튼 고쳐내고 봐야혀. 못 고친다고 하면 신뢰도가 떨어지잖아. 대신 중국산 선풍기 같은 거는 고쳐봐야 완전한 문제해결이 안되니까 안 고친다고 말해."

길씨 같은 '순돌이 아빠'는 대전에 얼마나 되는 걸까?

"글쎄… 제품을 수리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곳은 별로 없어 전파사 간판 내건 곳은 많지만 가보면 대부분 판매 목적이야. 갖다 맡기면 다시 서비스센터나 수리센터로 보내는 경우가 많아. 내가 아는 전문 수리점은 대전을 통틀어 4군데 정도… 그중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아."

- 혹시 기술을 배우게 해달라고 찾아오는 수제자는 없었나요?
"몇 명 있었어. 안 된다고 해도 돈 주고 배울 곳도 없으니 배우게만 해달라고 떼를 쓰더라고. 신원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어서 내키지 않았지만 기술을 전수하려 해도 힘들어 못하더라구. 배우려는 사람이 어느 정도 기본지식을 갖고 와야 하는데 음극과 양극이 왜 필요한지조차 모르더라고. 한 마디 하면 어느 정도 알아들어야 하는데 양극의 원리부터 설명해야 하니 난감하더라고. 그래서 못 가르친다고 했지."

"돈 주고 샀다면 무조건 고쳐 써라"

20대 초반, 학원에서 처음 수리기술을 배우며 작성한 노트
 20대 초반, 학원에서 처음 수리기술을 배우며 작성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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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기술을 습득하기가 쉽지 않은가 보죠?
"어느 정도 지식은 있어야지. 나는 고장 난 제품 고치려고 외국산 전자제품 사용설명서 들여다 보다 영어를 배웠어.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간단한 방정식과 싸인, 코사인 계산법 정도는 알아야 해. 예를 들어 전자제품 회로 몇 개가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탔다고 생각해 보자구. 가운데 망가진 부품 넣으려면 전압은 몇 볼트고 몇 와트짜리니까 어느 정도 용량의 부품을 해 넣어야 하는지 값을 구할 줄 알아야 해."

그의 마지막 전파사(?)가 있는 곳은 역세권개발이 한참인 대전역 부근이다. 이날도 관계자들이 개발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현장방문을 하고 있었다.

- 역세권이 개발되면 자리 옮겨서 또 가게를 열 생각인가요?
"개발되면 더 이상 못해. 한 번 자리 옮기면 자리 잡는데 최소 2∼3년 걸리는데 다시 가게를 차리는 건 나이도 있고 어려워. 비싼 세 감당할 능력도 없고… 여기가 내 인생 마지막 수리점이야."

그에게 끝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냐고 물었다.

"전자제품을 너무 쉽게 버려. 고쳐 쓸 만한데도. 버린 물건 주워다 고쳐서 팔기도 많이 해봤어. 오래됐다고 버리지 말고 고칠 수 있는 데까지 고쳐 쓰면 좋겠어. 또 하나, 고장 났다고 서비스센터로 가기 전에 수리전문가에게 의뢰했으면 해. 돈 주고 산 것은 무조건 고쳐 써야 한다는 의식이 생겼으면 좋겠어."


태그:#전파사, #순돌이 아빠, #만능수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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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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