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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은 박정희가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한지 꼭 40년이 되는 날이다. 최근 대선 국면에 접어들어 박정희 시대를 둘러싼 역사인식 문제가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유신에 대한 평가와 인식 역시 커다란 쟁점이 되고 있다.

지난 9일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의 국사편찬위원회 국정감사 도중 5·16에 대한 질문을 받은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이 "당시 사회적 분위기로는 독재도 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말해 국감장이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웠던 점은 야당 의원들이 이 발언에 대해 반헌법적 발언이라며 비난을 퍼붓자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이 나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근대화 혁명에 기여한 바는 아무리 덮으려 해도 덮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이 위원장을 옹호했던 장면이었다.

김세연 의원의 이러한 발언은, 비록 지난 9월 24일 박근혜 후보가 자신의 역사인식 논란과 관련해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여론에 떠밀려 이루어진 것일 뿐 결국 새누리당 구성원과 한국 보수세력의 현대사 인식, 민주주의 인식 자체는 크게 변화한 것이 없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보이는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근래 들어 박정희 시대에 대해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조작된 '만들어진 인식'이 판치고 있는 세태를 목도하고 있다. 과연 박정희 시대는 경제 성장으로 모든 국민들이 혜택을 보았던 시기였는가? 그리고 과연 박정희는 한국의 근대화와 발전을 위해 5·16을 일으키고 유신을 선포했던 것인가? 유신 친위쿠데타 40년을 맞아 이점을 포괄적으로 따져보기로 한다.

박정희가 내세운 '유신의 필요성'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1972년 10월 17일, 저녁 밥상 앞에 둘러앉은 시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비상조치(계엄) 소식을 듣게 됐다. 일반인들은 거의 대부분 예상하지 못한 뜬금없는 소식이었지만, 그 내용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종합하면,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를 기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 등 현행헌법의 일부조항 효력을 중지시키며, 일부 효력이 중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은 비상국무회의에서 수행할 것이고, 비상국무회의는 열흘 뒤까지 헌법개정안을 공고, 이를 국민투표에 붙여 이것이 확정되면 72년 연말까지 이 헌법에 의거한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것이었다. 제2의 박정희식 쿠데타였다. 중앙청 앞에는 탱크가 등장했고, 전국은 비상계엄령하의 삼엄한 분위기에 빠졌다. 그리고 이후 일정은 위에서 선포한 그대로 착착 진행됐다.

그러면 박정희는 왜 1972년 10월,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일까? 사실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 의회민주주의를 뒤엎고, 그것을 지탱하던 헌법과 헌정을 뜯어고치겠다는 쿠데타적 조치를 취하겠다면, 반드시 이를 납득시킬 만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박정희는 10월 17일의 선언문에서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먼저 대외적으로 당시 진행되고 있던 국제정세의 변화를 들었다. 다 알다시피 이 시기는 미중화해가 이루어지고 분단 이후 처음으로 당국 간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국제적 데탕트 무드의 시대였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러한 긴장완화의 분위기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아직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동북아 지역에서 열강들끼리의 긴장완화는 그들만의 것이며, 이런 속에서 약소국은 열강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다음으로는 당시 진행되고 있던 남북대화를 지속시켜 민족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라고 강변했다. 박정희는 선언문에서 "지금 우리의 주변에서는 아직도 무질서와 비능률이 활개를 치고 있으며 정계는 파쟁과 정략의 갈등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같은 민족적 대과업마저도 하나의 정략적인 시비거리로 삼으려는 경향마저 없지 않습니다. 이처럼 민족적 사명감의 저버린 무책임한 정당과 그 정략의 희생물이 되는 대의기구에 대해 과연 그 누가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겠으며 남북대화를 진정으로 뒷받침할 것이라고 믿겠습니까?"라고 했다.

즉, 남북대화와 민족통일,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기 위해선 무질서, 비능률, 파쟁, 정략으로 표상되는 정당정치, 의회민주주의를 배격하고, 철통같은 단결로 뭉친 능률적인 체제로 개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대 유신(維新)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기서 박정희의 민주주의체제, 정당정치, 의회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과 반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에 이어 박정희는 이러한 비상조치가 결코 정권을 위한 것이 아닌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자유민주주의체제가 비록 훌륭한 제도일지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민주체제처럼 허약한 체제도 또한 없다"고 했다. 또 "이번 비상조치는 근본적으로 그 목적이 제도의 개혁이기에 국민의 일상생활과 활동에는 아무런 지장이나 변동도 없을 것을 확실히 밝혀둔다"고 했다. 물론 이는 뒷날 유신체제 아래에서 벌어진 일들로 본다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러면 과연 박정희가 내세운 이상의 이유들이 유신쿠데타를 일으킨 진정한 동기였을까?

데탕트 위기론의 허구성

1972년 무렵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실상은 어떠한 것이었기에 박정희는 정당정치와 민주주의체제를 뒤엎는 일대 유신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일까? 과연 박정희가 내세운 이른바 '데탕트 위기론'은 근거가 있는 것이었을까?

사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이 안보위기론을 내세웠다. 이 시기에는 주로 북한의 '전면 남침'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며 위기를 고조시켰다. 더욱이 1968년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이 연이어지자 박정희 정권은 1966년 무렵부터 준비해온 향토예비군 창설, 교련과목 도입, 주민등록법 제정, 민방위 훈련 실시 등을 서두르며 사회동원체제를 강화하고 준전시체제를 일상화하였다.

이때부터 박정희의 입에서 '총력전'과 같은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즉, 북의 군사적 위협을 명분으로 일련의 사회 통제 및 병영국가화를 강화해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1969년을 고비로 이후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은 확연히 잦아들었고 1968년 미 국무부 보고서에선 한국군과 북한군을 단순 비교할 경우 공군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한국군이 우세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 시기 미국이 주한미군 일부 사단 철수를 결정한 것도, 박 정권이 베트남 파병을 결정한 것도 이점을 반증한다. 만일 북의 전쟁 위협을 억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면 베트남 파병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당시 한국군은 충분한 전쟁 억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71년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박정희는 북의 남침위협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4월 21일 박정희는 "작금의 정세는 마치 6·25사변의 전야"라며 호들갑을 떨었고 대통령 선거 3일 전에는 국방부가 북괴가 도발을 획책하고 있다며 전군에 특별경계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누가 봐도 분명 과장이자 왜곡이었다. 무엇보다 북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그해 11월, 미국부부는 주한미국대사관에 보낸 전문에서 한국정부에 "북한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는 근거가 없고 한국의 이와 같은 국내정치적 정보 왜곡은 아시아에서의 긴장 완화 노력에 어긋나고 한국 투자 진흥에 해를 끼칠 것이며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미국의 지원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경고할 것"을 주문했다.

더구나 1971년 7월, 미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 키신저가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해 본격적으로 미중관계 개선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제 동아시아에서 냉전이라는 양극체제가 미국-중국관계의 성립으로 다극체제로 변화함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리고 이 시기 미국 정부는 한국정부에 한반도 긴장완화를 위한 북한과의 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미중관계 개선과 남북관계 개선을 동시에 추구했던 것이다. 그 결과인지는 몰라도 1971년 9월에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적십자예비회담이 열렸다. 이처럼 1971년 들어 동북아의 긴장상태와 전쟁 위험도는 상당히 완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박정권은 그해 12월 6일, "중국의 국제연합 가입에 따른 국제정세의 급변과 북한의 무력남침 준비 등을 주시한 결과"라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여기서 비상사태 선포의 근거로 북한의 남침준비 뿐만 아니라 '중국의 국제연합 가입에 따른 국제정세의 급변'이 들어가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이제 박정권이 '남침 위기론'에 더해 이른바 '데탕트 위기론'을 제기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어 같은 달 27일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켰는데, 그 내용은 대통령에게 "집회 및 시위의 규제, 국론을 분열시킬 수 있는 문제에 관한 언론 및 출판의 규제, 근로자의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의 규제 등을 할 수 있는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박정희는 북의 남침 위협과 비상사태임을 근거로 초월적 권한을 틀어쥐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아직까지 유신선포를 하지 않은 것일 뿐이지, 사실상 유신체제의 기본 원리는 이미 이때부터 갖추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미국은 "박정희 정부가 북한의 남침 위협을 근거로 강력한 통제와 국민희생을 정당화해왔지만 대북협상이 시작되면서 그러한 주장에 의문이 제기되고 박정희는 북한의 남침 위협에 대한 호소 없이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미국 측은 박정희 정권이 외치는 북한 남침 위협론이 실제로는 국내통제용임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이제 남북회담이 시작되면서 이러한 담론이 지니는 입지가 좁아져 박정희의 수법이 더 이상 먹히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은 박정희 스스로도 이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특히 1972년 5월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중정부장과 회담한 김일성 수상은 북이 전쟁을 도발할 의도가 없음을 강조했다. 실제로 이 시기 북은 막대한 군비 유지에 경제발전이 지체되고 허리가 휘청거리던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북 단독으로 전쟁을 일으킬 여력은 없었고, 이 점을 박 정권 역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속에서 박정희는 설 자리를 잃은 '북괴 남침론'이 아닌 '데탕트 위기론'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다시 10월 17일에 발표된 비상계엄 선언문을 보자.

나는 이 변화가 우리의 안전보장에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위험스러운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같은 변화는 곧 아세아의 기존질서를 뒤바꾸는 것 이며 지금까지 이곳의 평화를 유지해온 안보체제마저도 변질시키려는 커다란 위협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이 지역에서 다시는 전쟁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솔직한 우리의 현황인 것입니다.(중략)

우리 헌법과 각종 법령 그리고 현체제는 동서양극체제하의 냉전시대에 만들어졌고 하물며 남북의 대화 같은 것은 전연 예상치도 못했던 시기에 제정된 것이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국면에 처해서는 마땅히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필요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묘한 모순이 흐르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일단 이 선언문에서 냉전체제가 허물어지고 있음은 박정희 본인이 자인하고 있다. 그런데 냉전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새로운 국면은 분명 동북아시아의 냉전적 질서가 평화적 질서로 서서히 전변해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러한 질서의 '변화' 자체를 '위기'로 규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질서의 변화는 평화적 방향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위험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냉전질서의 종식은 전쟁 가능성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는데도 동북아에 전쟁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었다. 오히려 박정희의 논리대로라면, 냉전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어야 그간의 안보체제도 그대로 유지되어 안전보장과 평화를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결국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시기 국제질서의 변화는 국가적 차원의 위기가 아닌 정권 차원의 위기였다. 즉, 냉전체제에 기대어 끊임없이 북한 남침론을 설파하며 위기를 고조시켜 사회통제와 권력 강화를 꾀하던 박정희 정권의 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전술한 것처럼 한국사회의 전시체제화는 이미 1968년경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1968년경은 형식적으로나마 선거와 같은 민주주의적 원리가 지켜지고 있던 시기였다. 즉, 박정희는 굳이 유신체제 수립이 아니었더라도 국내의 동원 체제를 강화할 권한과 권력을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박정희의 위와 같은 주장은 납득키 어렵다.

한편, 데탕트 위기론의 허구성은 유신체제 수립의 결과로도 드러난다. 유신체제 수립으로 인해 남북 대화과정에서 북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고 국제 여론 역시 한국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연구자는 "유신은 위기의 해결이 아니라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작용을 했다"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창비, 2012, 275~280쪽 참조) 결국 유신체제 수립은 박정희가 내세웠던 명분들에서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태그:#박근혜, #유신쿠데타, #박정희, #영구집권,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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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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