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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천(오른쪽)과 서방천(왼쪽)이 만난 두물머리. 광주천과 서방천이 만난 이곳을 '한강'이라 불렀다.
 광주천(오른쪽)과 서방천(왼쪽)이 만난 두물머리. 광주천과 서방천이 만난 이곳을 '한강'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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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1교를 출발해 1km 남짓 걷다보면 광주천은 서방천과 만나 마침내 '한강(漢江)'이 된다. 사람들은 두 샛강이 만나 강폭이 넓어지고 수심이 깊어지는 광주천을 한강 혹은 대강(大江)이라 불렀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곳을 '두물머리'라 하듯 광주천과 서방천이 만나는 곳 역시 '두물머리'라 했다.


강폭이 넓어지고 수심이 깊다는 것은 배가 다니기 수월하다는 뜻. 자연스럽게 두물머리 나루가 생겨났다. 서남해 갯것들이 영산강을 타고 광주천 두물머리에 도착해 육지것들과 조우했다. 빛깔 좋게 구워진 영산포 옹기가 광주천 두물머리에 도착해 광주의 장사꾼들에게 팔렸다.

한동안 광주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던 두물머리는 지난 2007년 광주시가 '두물머리 나루'를 개장하면서 다시 돌아왔다. 광주시는 삼각지 형태의 둔치인 두물머리 나루에 무등산 서석대를 본뜬 인공폭포를 세우고 정자와 자전거 도로를 만들어 시민들의 쉼터로 가꿨다.

광주환경운동연합 광주천 지킴이 '모래톱'에 따르면 광주천 두물나루 주변에선 예덕나무를 비롯 방가지똥, 살갈퀴, 괭이밥, 꽃마리, 굴피나무, 수레국화, 애기똥풀 등 각종 식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예덕나무는 산지나 바닷가에서 주로 자라는데 광주천변에 뿌리 내린 것은 이채로운 일이다.

광주천 두물머리 주변에 서식하고 있는 철새(지난 여름 촬영).
 광주천 두물머리 주변에 서식하고 있는 철새(지난 여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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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 나루에서 광운교를 건너면 무등경기장이다. 무등경기장은 축구 등을 할 수 있는 주경기장과 야구경기장이 있다. 원래 무등경기장 터는 일제 때 하천 직강화사업을 하면서 하천 부지로 방치했던 곳이다. 그 하천부지에 한국전쟁 직후 피난민들이 모여살았다.

피난민들이 5평 남짓의 구호주택으로 이사해가고 그 자리에 무등경기장이 자리잡기 시작한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무등경기장의 첫이름은 '광주공설운동장'이었다. 1954년 처음으로 만들어진 경기장은 흙으로 담을 쌓은 '토담 경기장'이었다.

무등경기장은 1965년 신축한 이후 붙여진 이름이다. 무등경기장은 전국체육대회를 치르면서 필요성을 느껴 만들어진 경기장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등경기장' 하면 야구경기장을 먼저 떠올린다. 여느 지역과는 남다른 '야구의 추억' 때문이다.

1980년 5월, 그 잔인한 학살을 당하고서도 광주는 제대로 목 놓아 울지조차 못했다. 학살자들은 광주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목 놓아 울 수도 없고, 함께 어울릴 수조차 없던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정통성이 부족했던 정권은 스포츠라는 마약을 통해 룰을 지키는 '정의구현 사회',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결과에 승복하며 서로 포옹하는 '국민화합 국가'를 도모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름 정밀했던 그들의 정치적 계상은 광주에서 무참히 짓이겨지고 만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한국 프로야구 구단 중 유일하게 타이거즈 홈페이지만이 그를 추모하는 글을 홈페이지 대문에 걸었다. 그 정도로 광주는 김대중이었고, 광주는 타이거즈였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한국 프로야구 구단 중 유일하게 타이거즈 홈페이지만이 그를 추모하는 글을 홈페이지 대문에 걸었다. 그 정도로 광주는 김대중이었고, 광주는 타이거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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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가 출범하고 난 뒤 무등경기장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는 <목포의 눈물>이었다. 왜 하필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목포의 눈물>이 가장 많이 불렸는지 김대중이란 코드를 시대에 투영시키지 않고선 이해할 수 없다. 그 시절 김대중은 광주였고, 목포의 눈물이었으며 해태 타이거즈였다.

80년 5월 광주시민들이 금남로에 서서 외쳤던 구호는 "김대중을 석방하라"였다. 12·12쿠데타를 일으킨 반란도당 전두환 신군부는 거꾸로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을 '국가내란 음모죄'로 감옥에 가뒀다. 내란음모 수괴가 된 김대중, 그를 석방하라고 요구한 광주시민은 그 해 오월 '폭도'의 누명을 썼다.

과자회사 해태가 새로 개막하는 프로야구의 지역 연고 구단이 됐다. 유니폼은 영국 황실 근위병의 붉은 색(상의)과 검정색(하의)을 본 따 호랑이의 위엄과 기개를 뽐냈지만 고작 선수 14명으로 창단식을 갖고 광주에 둥지를 튼 해태 타이거즈. 당시만 하더라도 시쳇말로 '고양이만도 못한 호랑이들'이 사나운 무등산 호랑이가 되어 천지를 호령할 것이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부터 1994년까지 무려 아홉 번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아홉 번 모두 우승을 거머쥐었다. 전라도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하믄 하고, 말믄 말고!" 기왕 하는 일이면 분명하고, 야무지고, 후회 없이 한다는 뜻이다. 그 시절 해태 타이거즈가 그랬다.

군사정권은 5월 18일엔 해태 타이거즈가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홈경기를 못하게 했다. 그들은 광주가 다시 하나 되는 것이 두렵고 싫었다. 해태 타이거즈는 1983년부터 1994년까지 치러진 모두 일곱 번의 5월 18일 경기에서 단 한 차례도 지지 않았다.

언젠가 이종범은 '5·18경기'들을 회상하며 "그날(5·18)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나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팀 모두가 그런 마음을 이심전심으로 갖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무등경기장을 알리는 표지판 너머로 무등경기장 야구장의 야간조명등이 보인다. 무등경기장 야구장은 2014년 광주야구경기장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공사가 진행 중이다.
 무등경기장을 알리는 표지판 너머로 무등경기장 야구장의 야간조명등이 보인다. 무등경기장 야구장은 2014년 광주야구경기장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공사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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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경기가 있는 날이면 광주시민들은 무등경기장으로 향했다. 승패와는 별 상관없이 시민들은 무등경기장에 모였고, 보해 소주를 마시며 <목포의 눈물>을 쉬지 않고 불러댔다. 취기와 설운 눈물이 뒤범벅된 노래가 끝나면 누가 먼저랄 것이 경기장 여기저기서 삼단 구호가 터져 나왔다.

"해태, 해태, 해태! 김대중, 김대중, 김대중! 도청, 도청, 도청!"

무등경기장은 금남로였고, <목포의 눈물>은 <광주출정가>였으며, 도청은 끝내 이기고 말아야할 승리의 그날이었다.

해태 타이거즈는 한국시리즈 10회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고, 김대중은 대통령의 꿈을 이루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고 이승을 하직했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지금까지도 '전략적 선택'을 요구받으며 '할 도리'를 주문받고 있다.

야구의 추억과 광주의 사연이 가득한 무등경기장 야구장은 '광주야구경기장'으로 새 단장을 하고 있다. 2014년 프로야구는 무등경기장 야구장이 아닌 광주야구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른다. 새 경기장에서 새로운 경기를 치르듯 광주도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갈 날은 올 것이다.

무등경기장을 에돌아 나와 다시 광주천에 선다. 서방천과 만나 덩치가 커진 광주천은 이제 영산강과 합치기 위해 유속을 높인다. 다만 그렇게 흘러가는 것들이 희망을 키운다.

덧붙이는 글 | 광주천 따라 걷기 4-4코스는 '광천1교-광천철교-두물머리 나루-광운교-무등경기장-광천2교'입니다.



태그:#광주천 따라걷기, #무등경기장, #김대중, #타이거즈,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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