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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입니다. 정년까지 두 해가 채 남지 않은 늙수레한 평교사랍니다. 편지를 길게 쓰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말과 글의 허망함에 대해서 학습된 결과일 것입니다만, 그럼에도 이렇게 교육감님께 공개편지를 드리게 된 것은 지금 저에게 일고 있는 물음이 너무나도 절실한 까닭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 왜 아이들은 아침 7시 반에 식사도 거른 채 서둘러 등교를 해야 하는가?
- 왜 아이들은 버스도 끊긴 밤 11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 왜 한창 성장의 기쁨을 누려야할 아이들이 죄도 없이 수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식상할 만큼이나 새삼스러운 물음에 혹시 실망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니면 내심 마음을 놓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 물음을 모른 척 비껴가면서 교육 혁신을 논하고 학생인권을 운운하는 것은 진실에 대한 조롱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교육감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고백하자면, 저도 이 물음을 비껴가고 싶었습니다. 꽤 오래 전 일입니다. 지금은 성인이 된 아들 녀석이 고등학교에 막 입학하던 해의 일입니다. 입학 첫날부터 아들의 표정이 어두워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학생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강행한 방과후 보충수업과 야간 자율학습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은 방과후 수업만은 받을 의사가 있었습니다. 부족한 과목을 보충할 기특한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담임선생님께 희망자 조사는 언제 하느냐고 여쭈었는데 이런 대답을 주신 모양입니다.     

"응. 그건 나중에 할 거야."   

학교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아들에겐 적지 않은 충격이었나 봅니다. 담임선생님이 인자하게 생기신 분이어서 더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희망자 조사를 먼저하고 방과후 수업을 해야 맞는 건데, 그 순서를 뒤바꾸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을 하셨으니, 고지식한 아들 녀석으로서는 그럴 법도 한 일이었지요.

정말 충격이 컸던지 평소 밝고 명랑한 아이였는데 아무리 말을 걸어도 어둡고 무표정한 얼굴이었습니다. 과장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그날 밤 아들은 영혼이 짓눌리는 아픔을 처음 경험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아픔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자기 언어로 얘기할 수 없는 답답함을 넘어선 절망감이 아니었을까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그런 무력감에 시달리거나, 혹은 타율에 길들여져 자기 삶의 동기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과연 바르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저는 그 일을 계기로 일선학교에서 자행되고 있는 강제 보충자율학습과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막 사회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면서 나름대로는 극심한 윤리적 갈등과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을 자식을 염려한 아버지로서의 절박한 조치였습니다.    

5개월 남짓 치열한 싸움을 했습니다. 도교육청과 교육부, 그리고 청와대 홈페이지에까지 제 신분을 밝히고 공개질의를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같은 순서로 그 조치 결과에 대한 질의를 멈추지 않자 어쩔 수 없었던지 어느 단위에선가 한 통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제가 줄기차게 요구한 학교 감사를 하겠노라는 반가운 내용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 후 실제로 학교 감사가 이루어졌고, 미미하게나마 가시적인 성과가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보면 산기슭에 자리한 인문계 고등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퇴근하고 귀가하여 저녁을 먹고 한 시간 넘게 산책을 하고 돌아와 책을 읽거나 뉴스를 보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하루 일과를 끝내려고 침대에 피곤한 몸을 눕히는 꽤 늦은 시간에도 학교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 광경을 자주 목격하면서도 솔직히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제 안에서 아무런 물음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다시 그 물음이 찾아온 것은 최근에 일어난 교사의 체벌과 관련한 비극적인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교육감님께서도 익히 잘 아실 터이니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제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 후 학교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사고가 있은 후, 해당 학교에는 시민단체와 학교 구성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공동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집니다. 학교 문화를 바꾸기 위한 소위원회도 꾸려져 새로운 학교의 청사진이 그려지고, 그 과정에서 학교 일일시정 개정과 관련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학교 구성원들 간의 이견으로 인한 진통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잘 극복하고 다음과 같은 최종안을 도출하게 됩니다.

▲등교 시간은 종전 7시 40분(3학년), 7시 50분(1,2학년)에서 8시 10분(1,2,3학년)으로 변경한다.
▲아침 자율학습과 학급조회 후 9시 정각에 1교시 시작한다.
▲방과후 수업은 종전 2시간에서 1시간으로 줄여서 선택형으로 운영하며, 특기적성을 고려하여 예체능교과 무학년제도 포함하여 운영한다.  
▲야간 자율학습은 희망자에 한하여 1,2학년은 9시 30분, 3학년은 10시 30분까지만 한다.
▲시정 변경은 5월부터, 선택형 보충과 야간 자율학습은 6월부터 변경 실시한다. 

이런 결과를 공동대책위원으로 참여한 지인으로부터 전해 듣는 순간 저는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기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글픈 마음도 함께 들었습니다. 소위 학교 혁신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이뤄낸 결과라고 하기엔 어딘지 맞지 않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쓸쓸한 감정도 잠깐이었습니다. 그보다는 진통을 겪으면서 애써 이뤄낸 학교 구성원들 간의 합의가 오래 지속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했습니다. 오늘 제가 교육감님께 공개편지를 드리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금 순천 지역 대다수 인문고에서는 학생들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7시 30분경에 등교하여 밤 11시가 되어서야 하교를 하는 일종의 집단 가학적인 일상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는 강제적으로 무리하게 시행하는 방과후수업과 야간 자율학습을 엄중 단속하겠노라는 교육부와 도교육청의 지시를 어긴 엄연한 불법행위입니다. 물론 이런 행태가 어느 한 지역만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만. 

저는 교육감님께서 이런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반교육적인 그릇된 관행을 척결하지 않고도 교육의 진정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고 보시는지요? 존경받는 학자이자 교육전문가이신 교육감님의 마음에도 앞서 말씀드린 그런 물음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매우 궁금합니다.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 왜 아이들은 아침 7시 반에 식사도 거른 채 서둘러 등교를 해야 하는가?
- 왜 아이들은 버스도 끊긴 밤 11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 왜 한창 성장의 기쁨을 누려야할 아이들이 죄도 없이 수인 취급을 받아야하는가?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게 과연 교육인지, 신체의 자유와 행복추구권이 엄연히 헌법으로 보장된 나라에서 가능할 수 있는 일인지, 해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우리 교육의 현주소를 해부하거나 분석하는 일은 무슨 이유로 하는 것인지, 정부 관료나 국회의원들이 교육선진국을 방문하는 목적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정말 아리송합니다. 또한, 다른 분도 아니고 고매한 인품과 투철한 교육철학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계시는 교육감님께서 왜 이 문제를 계속 방치하고 계시는지도 저로서는 정말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간곡하게 부탁을 드립니다. 최근 학교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 다시는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학생 학부모 교사가 아픔을 감내하면서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학교 혁신안이 잘 정착될 수 있도록 전남 교육계의 수장으로서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아직도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대다수 학교의 불법행위를 더 이상 용인하지 마시고 촘촘히 살피셔서 적절한 지도와 감독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제 편지를 갈무리할까 합니다. 혹시라도 무례가 있었다면 교육에 대한 염려와 열정의 지나침으로 여기시고 넉넉히 품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환갑이 지난 나이지만, 남은 기간 동안 아이들을 더욱 사랑하고 섬기며 열심을 다하겠습니다. 곧 선거철이라 많이 바쁘시겠지만, 존경하는 교육감님의 성실한 답변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전라남도 교육청 홈페이지 교육감 신문고에 민원으로 신청하였습니다. 이후의 상황들도 기사화하여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태그:#방과후수업, #강제 야간자율학습, #교육정상화 , #장만채 전남 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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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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