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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셔츠(white shirts)는 양복 바로 안에 입는 서양식 윗옷이다. 칼라와 소매가 달려 있고 목에 넥타이를 매게 되어 있다. 와이셔츠를 처음으로 입어본 건 내 나이 10대 말 무렵이다. 당시 숙부님께서 호텔을 임대하여 사업을 시작하셨는데 조카인 나를 불러 지배인이란 중책을 맡기셨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나오지만 호텔리어(hotelier)는 멋진 근무복에 더하여 항상 청결과 '멋 부림'이 생명이다. 따라서 나는 만날 양복 정장에 눈부신 흰색의 와이셔츠와 밝은 색 넥타이로 치장하였는데 덕분에 그 주변의 아가씨들 '포섭 대상 1순위 총각'으로까지 그 위상이 쑤욱 올라갔다!(^^)

이후 군 복무를 마친 뒤엔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즈음 취업한 직장은 공교롭게도(?) 영업사원, 즉 세일즈맨이었다. 다 아는 상식이고 또한 늘 보는 현상이지만 세일즈 우먼과 달리 세일즈맨은 호텔리어처럼 정장 차림에 와이셔츠의 착용 역시 기본의 패션이다. 여하튼 당시나 지금 역시도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사관에 입각하여 남들보다 열심히 뛰었다. 그 결과 전국 최연소 영업소장으로 승진하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장으로 승진하기 전에 우리 속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격으로 호되게 당한 '배신의 아픔'이 실재한다.

주지하듯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것은 잘 되리라고 믿고 있던 일이 어긋나거나 믿고 있던 사람이 배반하여 오히려 해를 입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나 또한 굳게 믿던 이로부터 배신을 당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입사한 회사는 천안역 앞에 위치했다. 거기서 근무를 시작하고 보니 소장님이 초등학교 2년 선배였다. 그래서 더욱 믿고 열심히 일을 했는데 하루는 소장님이 인천으로 발령을 받았다며 "같이 가서 나 좀 도와달라!"고 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부탁을 쉬 거절하지 못 하는 스타일이다. 암튼 그래서 생후 두 달도 안 된 아들을 업은 아내와 생면부지와 사면초가의 인천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곤 아들의 백일잔치가 일주일 앞으로 도래할 무렵에 급여를 받았다. 그러자 소장님은 급한 일이 있어 돈이 필요하다며 내일 줄 테니 돈을 꿔달라고 했다.

그 말을 또한 철썩 같이 믿고 당시로선 거금이었던 수십 만 원을 드렸는데 아뿔싸~ 이튿날부터 소장님이 함흥차사로 아예 출근조차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이튿날 오후가 되자 경리담당 여직원이 "홍 주임님, 본사서 전화왔는데 받아보세요."라며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그러자 일면식이 있던 본사의 000 과장은 소장님이 공금횡령 후 잠적했다며 탄식을 금치 못 하는 게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향의 초등학교 후배를 이따위로 배신하다니......!! 소장님의 그러한 배신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백일잔치는 잔치가 아니라 빚만 남긴 상처의 밥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동안 몸담았던 언론사를 그만 두고 재작년부터 경비원으로 취업했다. 그러자 회사에선 근무복을 주었는데 파란색 양복에 빨간색 넥타이, 그리고 흰 와이셔츠였다. 헌데 와이셔츠는 하루만 입으면 반드시 빨아야(세탁) 하는 까닭에 여벌로 몇 개가 더 있어야 마땅했다. 여름엔 근무복이 단출하다. 하늘색 반팔 와이셔츠에 넥타이도 안 매는 때문이다. 그랬던 것이 지난 10월1일부터 추동(秋冬) 근무복으로 바뀌면서 다시금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착용하는 중이다. 그제 옷장을 열어 지난봄까지 입었던 와이셔츠를 살펴보니 색도 바래서 볼품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오전에 백화점에 가 와이셔츠를 하나 샀다. 그걸 집으로 가지고 와서 다리미로 다리려니 문득 와이셔츠와의 인연이 어느새 40년 가까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시간과 세월이 지나면 고통이나 감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기억과 이성이 채우기 마련이다. 이런 측면에서 고찰하건대 지금은 내 처지가 고작 박봉에 헉헉대는 경비원일 따름이다. 하지만 지난 시절엔 나도 장밋빛 시절이 실재했다. "미스터 홍~ 오늘 시간 있어요? 제가 술 살 테니 시간 좀 내주실래요?" "이건 제가 산 건데 미스터 홍 쓰세요."라며 선물공세까지 펼쳤던 그 나비처럼 곱던 처자들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태양 아래서 더욱 빛을 발하는 흰 와이셔츠처럼 팽팽했던 그 시절의 나는 분명 멋진 청년이자 또한 근사한 호텔리어였거늘.

이제 결론을 짓자. 31년 전 나를 배신했던 그 소장님을 다시 만난 건 대전으로 이사를 한 뒤 길거리서 조우(遭遇)한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소장님에게 가져간 내 돈을 청구치 못한 건 백배사죄를 하는 진정성을 보인 까닭이다. 다만 나는 이 말 한 다미로써 그에 대한 서운함을 희석해냈다. "인생 그렇게 살지 마슈!" 이제 다음 주 일요일엔 고향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총 동문 체육대회가 열린다.

그렇지만 그 선배는 오지 않을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참석을 해오고 있으나 유독 그 선배만 보이지 않았기에 예단(豫斷)하는 것이다. 나의 하나뿐인 아들의 백일잔치나 총 동문 체육대회 역시 같은 잔치의 장르에 다름 아니다. '잔치'는 기쁜 일이 있을 때에 음식을 차려 놓고 여러 사람이 모여 즐기는 일이다. 지금이야 기왕지사 지나간 일이고, 또한 당시 아들의 백일잔치를 전후하여 겪었던 극심했던 배신감 역시도 세월의 강에 흘러간 까닭에 그 즈음의 아픔도 어쩌면 가소로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로 말미암아 소중한 교훈의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언정 사기를 치면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 대상이 지인이고 또한 후배라면 더더욱이나. 
첨부파일
SAM_5628.JPG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공모 ‘잔치, 어디까지 해 봤나요’ 응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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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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