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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면 내리게 되어 있다. 내리면 오르게 되어 있다. 안나푸르나를 2주간 걷고 나서야, 오르내리길 수백 번 반복하고 나서야, 몸으로 머리로, 겨우 이해했다. 내가 좀 둔하긴 하다.
 오르면 내리게 되어 있다. 내리면 오르게 되어 있다. 안나푸르나를 2주간 걷고 나서야, 오르내리길 수백 번 반복하고 나서야, 몸으로 머리로, 겨우 이해했다. 내가 좀 둔하긴 하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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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에서 벗어나겠다.

전투의지가 타올랐다. 도전 정신, 경쟁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나에게서 이런 의지가 타오른 건 게으름 때문이었다. 그만 걷겠다. 도시로 가겠다. 널브러져 있겠다.

"오늘 따또빠니까지 가겠어!"

나는 앞에 놓인 오믈렛을 포크로 내리꽂았다. 케첩보다 붉은 나의 의지. 누가 꺾을쏘냐.

"정말? 네가? 따또빠니는 먼데….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

더스틴은 트레킹보다 느린 나를 데리고 다니는 데 더 지쳐 있던 터다. 드디어 빨리 걸어보겠다는 나의 의지가 반가운 모양이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오고 나서야 의지가 타오른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뚝체에서 따또빠니까지는 이틀 일정이다. 할 수 있을까? 어제만 해도 한 시간 걸리는 길을 다섯 시간 넘도록 걸은 느림뱅이 바보천치 주제에? 뭐. 안 되면 말고.

설산은 아직 여기에
 설산은 아직 여기에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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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멋진 산에서 벗어나겠다고 생각했다니. 내가 미쳤었나보다.
 이 멋진 산에서 벗어나겠다고 생각했다니. 내가 미쳤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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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은 여전히, 하산인 듯 하산 아닌 하산 같은 길이다. 언덕을 하나 오르면 더 높은 언덕이 나왔다. 이제 다 올랐다 싶으면 내리막길이다. 오른 만큼 내려가면, 다시 내린 만큼 오른다. 융통성 없고 논리적이지 못한 길과 마음속으로 한참을 싸웠다. 어차피 다시 올라갈 거라면 내려가지도 말라고, 길아. 그냥 평평하면 나도 편하고 너도 편하고 좀 좋니? 지프 한 대가 찡그린 내 얼굴에 먼지 다발을 뿜고 지나갔다. 그래. 나도 편하고 너도 편하려고 도로를 만들었지. 닥치자. 내가 잘못했다. 차 타고 오르내릴 게 아니라면, 닥치고 걷자.

그리하여 우리는 오르고 내렸다. 강을 가로지르고, 빽빽한 나무가 시야를 가리는 숲길을 올랐으며, 긴 폭포수가 떨어지는 마을을 지났다. 오르면 내리게 되어 있다. 내리면 오르게 되어 있다. 산이 가르쳐준 거다. 초등학생도 아는 자명한 논리를 서른이 다 되어서야 깨달은 건 부끄럽지만, 사실 산이 아니라면 생각해보지 못하는 일이다. 산이 아니라면, 오르막길은 건너뛰고 험한 길은 가로지를 수 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원하는 층수의 버튼만 누르면 그만이고, 산을 오르는 대신 뚫어놓은 터널을 따라 차를 타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안나푸르나를 2주간 걷고 나서야, 오르내리길 수백 번 반복하고 나서야, 몸으로 머리로, 겨우 이해했다. 내가 좀 둔하긴 하다.

단순한 진리를 깨닫느라 온몸이 너덜너덜하다. 다나에 도착했을 땐 더스틴도 나도 너무 지친 나머지 아무 말이 없었다. 다나에서 한 시간 반을 더 가면 목표했던 따또빠니다. 이미 날은 저물었다. 내 몸도 저문 지 오래다. 한 발짝만 더 갔다간 알아서 하라며 퉁퉁 부은 두 발이 욕을 한다. 알았어. 알았다고. 다나 마을로 들어가 산장을 잡았다.

야크대신 소다. 나에게로 달려온다.
 야크대신 소다. 나에게로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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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우리는 오르고 내렸다. 강을 가로지르고, 빽빽한 나무가 시야를 가리는 숲길을 올랐으며, 긴 폭포수가 떨어지는 마을을 지났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르고 내렸다. 강을 가로지르고, 빽빽한 나무가 시야를 가리는 숲길을 올랐으며, 긴 폭포수가 떨어지는 마을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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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피날레를 위해, 푼힐로 


따또빠니의 뜻은 '따뜻한 물'이다. '따또'는 따뜻한, '빠니'는 물이란 뜻. 단순하기도 하여라. 깔로빠니, 코포체빠니, 따또빠니. 마을 이름에 '빠니'가 많았던 것도 좀솜에서부터 이어진 강줄기 때문인가 보다. 따또빠니에는 따또빠니가 있다. 온천이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일의 끝 무렵인 동시에 푼힐 전망대로 이어지는 길목인 따또빠니에는 산장도 많고 사람도 많다.

따또빠니에서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의 끝인 베니로 이어지는 길. 베니로 가면 영광의 버스를 타고 포카라로 귀향(?)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시카로 이어지는 길. 시카는 푼힐 전망대로 가는 길목이다. 따또빠니에서 한나절이면 시카를 거쳐 푼힐 전망대 바로 전 마을인 고레파니까지 갈 수 있다. 다음 날 푼힐 전망대에서 일출을 보고, 나야풀로 내려가면 된다. 아직 안나푸르나와 헤어지기 아쉽다면, 고레파니에서 나야풀로 가는 대신 촘롱 쪽으로 빠지면 된다. 촘롱에서 안나푸르나 ABC 트레킹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이틀이면 갈 수 있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나라면 죽었다 깨나도 못할 짓이다. 대단하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 나라면 죽었다 깨나도 못할 짓이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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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염소들
 어린 염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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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은 ABC 트레킹도 문제없이 해낼 테니 선택은 나에게 달렸다. 촘롱은 질문 밖이다. 베니로 갈까. 밥 말리 호텔에서 만난 아밀의 눈빛이 나를 가로막았다. 히말라야와 사랑에 빠진 아득한 눈. '푼힐은 반드시 가야 해요!' 아밀의 눈빛이 나에게 다그쳤다. 그래. 푼힐 전망대만 가기 위해 산을 오르는 사람도 있잖아. 이틀이면 끝이다. 어찌 됐든 끝은 오는 법이니까. 하산하고 이틀이면 산이 보고 싶다고 칭얼댈 게 분명하다.

따또빠니에서 고레파니까지는 6시간이 걸린다. 가파르고 끝이 없는, 힘겨운 오르막길이다. 어제의 산행은 무려 10시간이었다. 바로 다음날 이런 길을 걷고 있다. 난 정말 대단하군! 푼힐의 일출을 상으로 주자. 오늘만 열심히 걸으면, 내일 웅장한 일출을 마음에 새기며 안나푸르나 라운드 트레킹의 피날레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포카라로 돌아가는 것이다!

상의 가격은 가혹했다. 쏘롱 라 뺨치는 산길이다. 못하겠다고 나자빠지고 싶은 순간엔 언제나처럼 포터들이 등장했다. 사다리, 문짝, 커다란 가방. 묵직한 짐을 하나씩 들고 산을 오르내리는 포터를 보고 있자면 불평으로 종알대던 입도 꾹 다물게 되는 것이다. 더위와 혈압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잔뜩 찡그린 빨간 얼굴 사이로 땀이 흘러내렸다. 나 지금 되게 못생겼다. 더스틴 나 좀 봐. 이래도 나랑 살래?

푼힐에 가면, 웅장한 일출을 보며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멋진 피날레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푼힐에 가면, 웅장한 일출을 보며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멋진 피날레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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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번은 건너야 했던 아찔한 현수교.
 수십번은 건너야 했던 아찔한 현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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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에 도착했다. 시카까지 가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올라야 한다. 때려치워! 점심이나 먹자. 식당에 들어가 볶음밥을 시켰다. 영광의 스프라이트도 하나 주문했다. 스프라이트는 우리의 영적 고취다. 저기까지만 가면 스프라이트를 마실 수 있어. 저기까지 오르면 우리에게 스프라이트를 선물하자. 과장해서 말한다면 스프라이트를 볼모로 베시사하르에서 마낭까지, 마낭에서 묵티나트까지, 그리고 여기 가라까지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차가운 스프라이트 한 모금이면 온몸을 감싼 열기가 한 번에 파괴되는 환상을 느낄 수 있다. 산장 가격에 맞먹는 가격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

식당은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처럼 얼굴이 빨갛고 못생긴 트레커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지나갔다. 힘들지? 들어와서 스프라이트 한잔해. 이들은 왜 산을 오를까. 어차피 내려갈 건데. 그러는 우리는 왜 이곳을 올랐나. 사람은 왜 사나. 어차피 죽을 건데. 이유는 모르지만 살아보는 거다. 이유는 모르지만 잘한 일 같다. 안나푸르나를 오른 나와, 오르지 않은 나는 다른 사람이다. 잘한 일임이 틀림없다.

산을 바라보는 닭. 선인인듯한 닭이다.
 산을 바라보는 닭. 선인인듯한 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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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내려갈 이 산을, 우리는 왜 올랐을까. 사람은 왜 사나. 어차피 죽을 건데. 이유는 모르지만 살아보는 거다. 이유는 모르지만 잘한 일 같다. 안나푸르나를 오른 나와, 오르지 않은 나는 다른 사람이다. 잘한 일임이 틀림없다.
 어차피 내려갈 이 산을, 우리는 왜 올랐을까. 사람은 왜 사나. 어차피 죽을 건데. 이유는 모르지만 살아보는 거다. 이유는 모르지만 잘한 일 같다. 안나푸르나를 오른 나와, 오르지 않은 나는 다른 사람이다. 잘한 일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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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만난 프랑스 트레커가 지나갔다. 반가워. 함께 산행을 시작한 브렛이나 엘리는 진작에 포카라로 갔겠지. 벌써 미국으로, 이스라엘로 돌아갔을지도 몰라. 우리는 보름 일정인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을 스무날이 넘도록 걷는 중이다. 성적이 저조해 방과 후 수업이라도 듣고 있는 기분이지만, 자기비하는 그만 하련다. 나는 누가 뭐래도, 저 높은 쏘롱 라를 씩씩하게 걸어 넘어온 히말라야의 여왕이다!

명랑하게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들어간 산장 언니는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보이는 낯익은 얼굴. 흔히 보이는 서양 트레커 커플. 어디서 봤더라.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빠니'는 '물'이라는 뜻이다. 깔로빠니, 코포체빠니, 따또빠니. 마을 이름에 '빠니'가 많았던 것도 좀솜에서부터 이어진 강줄기 때문인가 보다.
 '빠니'는 '물'이라는 뜻이다. 깔로빠니, 코포체빠니, 따또빠니. 마을 이름에 '빠니'가 많았던 것도 좀솜에서부터 이어진 강줄기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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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여행 후에도 서로 사랑한다면, 아마 그 사람이 맞을 거다.
 오랜 여행 후에도 서로 사랑한다면, 아마 그 사람이 맞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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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내가 너를 만났던가 안 만났던가. 눈썹을 가로 모으고 판단하고 있는 사이, 커플은 이미 산장 문 앞으로 당도했다. 누구냐 넌. 나는 너를 모르는데 너는 나를 아는 민망한 상황이 발생할까 발가락에 힘을 모으고 긴장했다. 아! 네덜란드 커플! 쏘롱 라에서 고산병 약 주고 간 사람들!

"저희보다 훨씬 빨리 걸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만나네요!"
"묵티나트 마을에서부터 사이드 트레킹을 몇 번 했거든요. 그래서 스케쥴이 맞았나 봐요"

우리는 좁은 테이블에 끼어 앉았다.

"그날 쏘롱라에서 정말 고마웠어요. 증세를 무시하고 걸었다가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누가 알아요? 스프라이트라도 한 병 대접하고 싶은데…."
"무슨 소리! 건강하게 잘 내려온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아, 이 훈훈함. 바로 이것이다. 쏘롱 라에서 꿈꿔왔던 하산길의 눈부신 장면.

고도가 낮아지니 빨간 꽃도 보인다.
 고도가 낮아지니 빨간 꽃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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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름 일정인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을 스무날이 넘도록 걷는 중이다. 성적이 저조해 방과 후 수업이라도 듣고 있는 기분이지만, 자기비하는 그만 하련다. 나는 누가 뭐래도, 저 높은 쏘롱 라를 씩씩하게 걸어 넘어온 히말라야의 여왕이다!
 우리는 보름 일정인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을 스무날이 넘도록 걷는 중이다. 성적이 저조해 방과 후 수업이라도 듣고 있는 기분이지만, 자기비하는 그만 하련다. 나는 누가 뭐래도, 저 높은 쏘롱 라를 씩씩하게 걸어 넘어온 히말라야의 여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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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두둑이 채우고 시카로 향했다. 마을에 가까워지면 걸을 만한 길이 나오다가도, 멀어지면 무자비한 오르막길이 등장하기를 반복했다. 치트레로 오르는 고약한 경사길을, 건장한 세 청년이 씩씩하게 걸어 올랐다. 네덜란드 커플과 더스틴이다. 체력이 모두 고갈된 나는 노인네처럼 들고 있는 대나무 스틱에 온몸을 기대며 한 발짝, 한 발짝을 고되게 걸었다. 저기 너희. 너희는 뭘 먹고 그렇게 기운이 세니. 스프라이트? 

치트레에서 한 시간. 고레파니에 도착했다. 고레파니 마을은 진작에 도착한 트레커들로 복작였다. 지난 3주간의 트레킹에서 단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던 한국 트레커들이 이곳에 다 모여 있었다. 80세 영국 할아버지 클리포드도 다시 만났다. 좀솜에서 따또빠니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고 한다. 멋지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할 수 있는 만큼만 걷는 멋진 할아버지다.

소치는 어린 꼬마
 소치는 어린 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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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커플, 클리포드 할아버지와 산장에 짐을 풀었다. 산장에는 따뜻한 물이 나왔다. 안나푸르나의 많은 산장은 '핫샤워'를 내걸고 트레커들을 유혹한다. 하지만 미지근한 물이 찔끔 나오다 말거나, 부엌에서 데운 물을 한 바가지 가져다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안나푸르나에서 '핫샤워'란 인도에서 마살라를 뺀 음식을 찾는 것만큼 고귀한 일이다.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털모자 아래 감춰진 내 머리칼은 언제 감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샴푸와 린스를 쓰면 안나푸르나의 환경을 망칠 수 있다는 말에 아주 가끔, 비누로만 머리를 대충 감아왔다. 모자를 벗으니 헝클어지고 눌린 추한 머리칼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철사처럼 뻑뻑하다. 풍성하던 머리숱도 반쯤 사라진 것 같다. 산에 와서 늙어버렸군. 악마와의 거래다. 눈이 시린 풍경을 선사한 대가로, 안나푸르나는 내 풍성한 머리칼을 앗아갔다.

고레파니 가는 길. 우박이 내려 잠시 멈췄다.
 고레파니 가는 길. 우박이 내려 잠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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푼힐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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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도 하기 전에 장기여행? 제대로 미쳤다

빠져나간 머리칼을 하수구로 씻어 보냈다. 간만에 땟국물 없는 얼굴로 창가에 앉았다.

"연인 사이가 된 지는 1년 정도 됐어요. 관계를 확인해보고 싶어서 히말라야에 왔어요."


네덜란드 커플은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한 달 일정의 히말라야 여행을 떠났다. 나도 결혼하기 전 반 동거 생활을 하면서 미쳤다는 소리 좀 들었지만, 이들은 제대로 미친 것 같다.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결혼할 사이도 아니고. 고작 1년 사귀고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장기여행을 가? 직장을 그만둬?

현명하다.

사실 더스틴과의 여행이 여기까지 이어진 건 기적이다.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인도 삼등석 기차 대기실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히말라야에서 눈에 미끄러져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삼십 분 동안 쫓아다니는 호객상인에게 시달리다, 15시간 동안의 버스 여행을 하는 상황들을 겪으면서 서로가 끔찍이도 싫어질지, 누가 아는가?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확고한 의지가 무너져버리면 그때는 어쩔 텐가? 장기 여행을 하다 보면 나 자신도 지긋지긋해질 때가 있는데, 너에 대한 마음을, 그리고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 여행이 끝나고 나서야 알 일이다. 장기여행은 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오랜 여행 후에도 서로 사랑한다면, 아마 그 사람이 맞을 거다.

돌담을 지나면 설산이 보인다.
 돌담을 지나면 설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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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파니 가는 길. 작은 마을들로 이어진다.
 고레파니 가는 길. 작은 마을들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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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영국 트레커와의 대화는 유럽 여행 이야기로 이어졌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에서 만난 트레커의 대부분은 서유럽 출신이다. 그들의 고향 이야기, 유럽을 돌며 여행한 이야기를 매일 끼니처럼 들었다. 우리의 머릿속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유럽에 대한 꿈이 비 오기 전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처럼 뭉게뭉게 자라나 있었다.

푼힐에 오르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더스틴과 나란히 누워, 한참을 떠들던 유럽 여행에 대해 곱씹어보았다. 히말라야에 올라 유럽 생각이나 하는 우리는, 역시 바보다. 인도를 함께 여행하고도, 히말라야를 함께 오르고도, 그래도 같이 유럽을 여행하고 싶은 걸 보면, 역시 이 사람이 맞나 보다.

하얗고 파랗다. 초록이다.
 하얗고 파랗다. 초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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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안나푸르나, #푼힐, #안나푸르나 라운딩, #네팔, #히말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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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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