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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은 가을에게 훌륭한 학교이자 놀이터입니다.
▲ 산책 중인 가을 이 세상은 가을에게 훌륭한 학교이자 놀이터입니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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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르도 입양된 강아지예요. 자기들끼리는 텔레파시로 통한다기에 한번 상상해봤어요.
-기자의 말

가을이의 편지

쵸르에게

쵸르야, 더운 여름 어떻게 보내고 있니? 우리 비록 만난 적은 없지만, 엄마로부터 네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난 네가 꼭 오래 알고 지낸 친구 같아.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좋은 집에 입양을 갔다는 것, 깨무는 버릇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것, 석류 엑기스를 먹고 피부병이 나았다는 것 등. 우리 엄마는 너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해줬어. 그래서 심심하던 차에 문득 네게 편지 쓸 생각이 났지.

최근에 너희 가족은 여행을 다녀왔다면서? 넌 호텔 같은 곳에 머물렀니? 지낼 만했어? 나도 그런 곳에 가게 될까? 우리 엄마도 여행 비슷한 것을 가는 것 같아. 하지만 집안에서 볼일(화장실)을 보지 않는 내가 걱정돼서인지 꼭 돌봐주는 다른 사람을 집으로 보내. 처음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엄마가 아니어서 엄청나게 놀랐지만, 산책은 해야겠기에 따라나섰어. 그들은 엄마 부탁으로 왔다면서 밥을 차려주고 좋은 말도 해주고 그러더라. 하지만 이건 어쩌다 한 번이야. 주로 엄마는 "돈 벌러 간다"하고 나갔다가 몇 시간 만에 헐레벌떡 들어와. 중간에 잠깐이라도 바람을 쐐야 내 건강에 좋다며, 일하다 말고 짬을 내서 오는 거래.

물론 엄마가 오랜 시간 날 혼자 두는 경우도 있지. 넌 집을 볼 때 뭘 하니? 듣자하니 텔레비전을 좋아한다면서? 난 기계엔 영 흥미가 없어. 카메라만 들이대도 도망쳐버려. 차라리 땅을 파고 노는 게 좋아. 맞아, 우리 집에 흙바닥은 없지만 부드러운 매트는 있거든. 엄만 내 관절 때문에 깔아놓은 거라는데, 나에겐 훌륭한 장난감이란다. 발톱으로 있는 힘껏 긁으면 만질만질한 가루들이 아름답게 흩어져. 음, 이게 '분리불안'은 아니라고 생각해. 엄마가 장판을 양탄자로 덮어버리면, '긁기'를 포기하고 그냥 자버리고 말거든.

내가 또 좋아하는 놀이가 있어. '전쟁놀이'인데, 제목처럼 무섭진 않아. 공격보다 방어에 힘쓰거든. 사진을 첨부할 테니 봐봐. 나의 식량을 비축해둔 모습이야. 가까이에 있는 이불 따위로 밥을 덮으면 되는데, 마땅한 게 없을 땐 이불 말고도 무엇이든 이용할 수 있어. 엄마의 속옷이나, 방석, 수건, 때론 나의 밥으로 밥을 가리기도 해. 난 누구 말마따나 제3차 세계대전을 대비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미리미리 챙기는 습관이 나쁜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생의 기로도 아닌데 살아남겠다고..
▲ 전쟁놀이의 흔적 생의 기로도 아닌데 살아남겠다고..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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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르야, 넌 언제가 가장 행복하니? 난 당연히 바깥 냄새를 맡을 때야. 입양 오기 전에 10년을 갇혀 산 내게, 이 세상은 훌륭한 학교이자 놀이터란다. 엄마는 천천히 걸으며 구경하고 있는 나에게 "그치? 어쩌고저쩌고"라며 이야기해.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저 혀를 날름거리고 마는데, 그래도 엄만 날 보고 웃어. 예전에, 가슴줄이 풀리는 바람에 꽤 먼 거리에서 나 혼자 집에 찾아왔다는 얘기 들었지? 평소에 구석구석을 눈여겨보고 냄새 맡아놓기를 잘했지 뭐야. 근데 가끔은 난감할 때도 있어. 난 고양이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작아질까? 엄마가 쭈그리고 앉아 고양이들에게 밥도 주고 말도 걸고 할 때, 난 숨어 있어. 예전에 만난 사나운 고양이가 떠올라서야. 나이를 먹으니까 한 번 학습된 건 영 잊히지 않아. 너도 내 말을 곧 이해하게 될 거야.

쵸르, 너도 별명이 있니? 난 꽤 많아. 엄마는 나를 '애기 강앙징', '백설공주 마마', '꾀순이' 하는 식으로 잘 불러. 언젠가는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애기가 나이가 많아서…"라고 하더라. '애기'는 나처럼 현명하고 우아한 개를 일컫는 말인가?

참, 너희 집에 나타난 작은 인간은 어때? 널 귀찮게 굴거나 하진 않니? 길에 걸어 다니는 작은 인간들은 대개 시끄럽더라. 난 멀리서 그들이 보이면 다른 길로 가버려, 후후.
너도 콩을 좋아한다기에 조금 보낼게. 난 요새 두부가 제일 좋아.

그럼 또 편지할게, 안녕!

이제 어엿하게 자라 텔레비전을 시청한다.
▲ 생후 2개월의 쵸르와 아가씨 쵸르 이제 어엿하게 자라 텔레비전을 시청한다.
ⓒ 이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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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르의 편지

가을이 언니에게

언니 안녕! 편지 보내줘서 고마워. 나도 엄마에게 언니 이야기 많이 들었어. 언니도 이젠 엄마를 좋아하겠지? 입양되고 얼마 동안은 낯가렸다며, 히히. 난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엄마가 설거지할 때면 엄마 발 옆에 앉아있고, 엄마가 TV를 보면 엄마 무릎 위에 올라앉아 같이 봐. 동물 친구들이 나오는 채널은 너무 재미있어서 TV 앞으로 막 달려가기도 해. 언니는 기계에 관심이 없다니 유감이다. 난 스마트폰도 좋아해. 내가 발로 누르면 이것저것 작동되거든! 엄마가 나보고 똑똑하다고 칭찬해줬어. 신나서 더 마구 눌렀더니 이번엔 혼이 났어. 그래도 괜찮아. 엄마가 날 많이 사랑하는 걸 아니까.

언니, 우리 엄마도 나를 '애기'라고 잘 부르는데 '우아한 개'를 뜻하는 말은 아닌 거 같아. 10개월 전에 엄마가 '애기'라고 하는 작은 사람을 데리고 왔거든. 2주 동안 엄마가 안 보여서 무지 보고 싶었는데, 그 친구와 함께 돌아왔더라. 열심히 냄새를 맡아보니 그 애에겐 좋은 향기가 났어. 게다가 정말 작고 귀여워서 한참을 바라봤지. 그런데 이 친구가 자꾸만 커지더니 이젠 나보다 커! 그리고 장난도 치고 날 보고 웃어대기도 해. 어쩌다 내 꼬리를 세게 잡아당길 때도 있지만, 날 화나게 하려는 것 같지는 않아. 난 평화를 사랑하니까 이해할 수 있어.

근데 말이야, 처음엔 어떤 사람들이 나랑 작은 친구가 같이 살면 큰일 난다고, 나를 다른 곳에 보내라고 했대. '큰일'이라는 건 뭘까? 아무리 봐도 그 애와 나 사이에 '큰일'은 안 생기는 거 같거든. 혹시 내 응가를 말하는 건가? 엄마가 응가를 가끔 그렇게 부르던데…

아, 언니 그거 알아? 작은 친구는 내가 싫어하는 응가 기저귀를 항상 입고 있어. 난 기저귀가 답답하고 싫어서 입양 온 지 2주 만에 응가, 쉬야를 잘 가렸는데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애기'는 뭔가 어리고 철없다는 뜻이 아닐까?

요즘 엄마가 자꾸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 산책하러 못 가서 미안해. 못 놀아줘서 미안해. 오늘 목욕해야 하는데 미안해……. 엄마는 작은 친구 때문에 할 일이 많아졌대. 그래도 엄마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어.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이야. 엄마가 작은 사람을 품에 안고 자면 나는 엄마 등에 기대 잠들어. 오늘 밤에도 엄마에게 살포시 몸을 대고 잘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언니, 처음으로 편지를 썼더니 피곤해서 자야겠어. 보내준 콩 맛있게 먹을게. 이따가 스마트폰으로 두부 맛집을 찾아볼래. 물론 우리가 들어갈 순 없겠지만. 다음에 또 편지 쓸게!

쵸르는 작은 인간의 얼굴에 묻은 밥이 탐난다.
▲ 한..한 입만.. 쵸르는 작은 인간의 얼굴에 묻은 밥이 탐난다.
ⓒ 이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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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유기견, #강아지입양, #가을이, #쵸르, #텔레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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