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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5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무려 네 달 남짓 동안 국경 일대에서 신출귀몰하며 왜적을 경악케 한 참의부 소부대가 있다. 그들은 권총으로 무장하고 국경 15개 소 일경(日警) 합동부대의 포위 추격에 맞서 싸웠다. 곳곳에서 일경에게 타격을 주고 성공적으로 퇴각하는 전술로 장기전을 펼쳤다.

결국 일경이 1200여 명을 동원해 포위망을 구축하고 그도 모자라서 주재소와 별도로 762곳의 산골에 경찰 출장소를 설치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참의부 3중대 '내지(內地)출장반' 6인대(隊)다. 참의부는 임시정부 직할 부대를 표방하며 설립된 군정부로, 무송, 안도, 집안, 장백 등을 관할구역으로 했다. 국경과 가까워 활발하게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했다.

참의부 내지출장반 6인대, 수첩으로 남은 그 이름

당시 독립군은 국내에 진입해 작전하는 것을 '내지 출장'이라고 했다. 내지출장반 대장 이일권(李一權), 대원 원혹항(元或恒) 박봉두(朴鳳斗) 조병운(趙炳雲) 김문환(金文煥) 장평운(張平雲)은(주1) 25-26세 안팎의 청년 군인이었다. 원혹항 박봉두 조병운 김문환은 전사한 대장의 수첩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당시 기사는 전한다(<동아일보> 1927.9.15. 이하 출처 인용은 당시 동아일보 기사로, 연월일만 적는다). 장평운도 수첩에 있었지만 지면 관계로 빠진 것으로 파악된다. 그의 이름은 6인대 소식을 추적하던 다른 기사(1927.9.22)에 전사했다고 하며 기록되었다.

독립군은 군사정보를 왜적에게 노출시키기 않기 위해 순국하기 전에 가급적 서류를 없애지만, 대장 이일권의 수첩은 남아 대원의 이름을 전하고 있다. 수첩을 없앨 수 없을 정도로 전투의 순간이 급박했다 하겠다. 당시 기사를 보면 '내버린 수첩'이라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적에게 수첩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멀리 내던졌지만 결국에는 일경에게 압수된것으로 파악된다. 소속과 이름 외의 중요한 군사 정보는 적혀 있지 않았다 하겠다.

당시 독립군은 작전과 관련된 수첩을 지급받은 경우도 있었다. 수첩에는 이름이나 중요하지 않은 정보 등을 기록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테면 1924년 의주군에서 작전하다가 전사한 독립군도 수첩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는 동포의 집에서 밥을 청해 먹고 식대를 지불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1924.7.13). '출장', 곧 작전 중 비용과 관련된 사항이다. 여담이지만 당시 독립군은 국내 작전 중 동포 집에서 식사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동포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정당하게 식대를 지불했다. 특히 가난한 동포에게는 정해진 식대보다 더 많은 금액을 주기도 했다(1924.7.11). 여하튼 당시 독립군의 수첩이 발굴되면 역사에 좋은 자료가 되겠는데 일제는 패망하며 수많은 자료를 불태워 없애서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하겠다.

나이로 보아 6인대는 3.1혁명을 몸으로 겪고 그 영향으로 독립군에 입대했다. 1922년 무렵부터 태극면 등에 진입해 일경을 사살한 대원도 있었다(1927.8.20). 곧 5-6년 동안 국내 진입 작전의 경험이 전술적으로 축적되어 있는 고참 군인들이었다.
  
참의부 6인대의 이름을 적고 있다.
▲ 동아일보 1927.9.15 기사 참의부 6인대의 이름을 적고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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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일 희천군 송관동(宋串洞) 교전에서 1명이 부상당하자 5인이 활동하며 5인대로 불리기도 했는데 부상병 보호를 위해 1인이 남을 때는 4인대로 활동하기도 했다. 부상병이 만주 본대로 귀환하지 않은 것은 중상이 아니며 또한 처음부터 오래 작전하기로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배낭은 물론이고, 천막, 도끼, 가마솥, 식량(좁쌀·백미) 등 근거지를 확보하고 오래 작전할 수 있는 군수품도 지니고 있었다(1927.9.4). 그래서 부상 치료 후 다시 작전에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고 완쾌되자 8월 10일부터 함께 작전에 나섰다. 이 때부터 다시 6인대가 되었다.

6인대는 1927년 5월 말에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입해서 군자금 모집, 일경 사살 등의 작전을 했다. 일경은 5월 26일 위원군 서태면에서 이들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다. 이후 추격대를 편성해서 6인대를 사살·체포하려 했지만, 6인대는 평북·평남의 여러 곳을 오가며 추격을 뿌리쳤다. 5월말부터 7월말까지 58일간 위원군, 초산군, 희천군, 덕천군 등을 다니며 13곳에서 자취를 드러냈다(1927.7.26). 일경은 평남 경찰부 경무과장을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250여 명의 수색대를 동원해 추격했지만 신출귀몰한 6인대의 뒤만 쫓았다.

7월까지 몇 차례 교전이 있었지만 6인대는 피해 없이 경계망을 뚫고 계속 작전했다. 계획대로 장기 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에도 계속 활동하며 특히 7월 22일에는 수백 원의 군자금을 모집하고 24일에는 풍덕면 송정리주재소 순사부장 등 일경 3명과 교전했다(1927.8.7). 부상병 합대 이후에는 8월 26일 밤부터 27일 새벽까지 희천군 서면 평원리에서 많은 군자금을 모집했다.

1200여 명의 일경 대부대와 맞서 싸우다

일경은 250여 명의 수색대가 6인대를 막지 못하자 급기야 1000여 명의 경찰을 추가 파견했다. 평북 일대에 3중 수색선을 펴고 포위망을 좁혀나갔다. 8월 하순부터 강계경찰서장을 총지휘로 하여 강계 만포 위원 초산 벽동 북진 전천 등 7개 경찰서 인원이 총동원되어 수색과 추격에 나섰다(1927.9.13). 이때부터 6인대의 작전 목표는 군자금 모집과 일경 소부대 공격에서, 적 포위망 뚫기로 바뀌고 9월부터 일경 수색대와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다.

9월 2일 일경 수색대는 6인대가 주둔하던 초산군 송성동 약수령으로 접근했다. 오후 3시 무렵 바위 뒤에 매복했던 6인대가 일경 수색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저녁 8시까지 5시간 동안 교전이 이어졌다. 일경의 탄환이 떨어질 무렵 근처에 있던 다른 수색대가 전투 지역에 도착해서 6인대를 공격해왔다. 6인대는 전투를 마감하고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출장반 대장 이일권이 전사한다. 전투현장에는 6인대의 천막, 식량, 배낭 등의 군수품이 있었다. 이들을 챙기지 못할 정도로 6인대의 퇴각은 신속했다. 추가 수색대가 공격해 오자 더 이상의 교전은 무모하다는 전술적 판단으로 빠른 퇴각을 결정했던 것이다. 이일권은 부대원 5인의 퇴각을 돕기 위해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거나 부상당해 이동하기 힘든 상황에서 부대원이 무사히 퇴각할 수 있게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겠다.

9월 2일의 이 전투는 6인대의 작전 목표가 군자금 모집에서 일경 공격으로 바뀐 결과였다. 곧 진입 초기에는 군자금 모집을 목표로 가능하면 장시간의 전투를 피하려 했지만, 이 단계에서는 퇴각보다 일경에 타격을 주는 방향으로 전술 전환이 있었다. 추가 수색대가 공격하기 전까지는 6인대가 공격해 상대할 수 있는 적이라고 판단했다. 곧 적은 규모의 수색대는 선제공격할 정도로 일경 공격이라는 목표가 수립되어 있었다. 이일권의 전사는 작전 목표 전환에 따른 치열한 전투의 결과였다.

출장반 5인은 7일 밤 8시 무렵 위원군 서태면 인덕동에서 일경대와 1시간 동안 교전한 후 퇴각했다(1927.9.9). 제3수색선을 돌파한 이들은 다시 제2수색선 초산 방면으로 들어갔다. 8일 오후 9시 무렵 화신동 화곡 외탕곡에 진입해서 탐문 수색 중인 일경 대를 선제공격했다. 골짜기에서 11시 반까지 전투가 이어졌다. 이 전투에서 1명이 전사하고 4명은 퇴각에 성공했다. 전사한 독립군이 지녔던 군수품은 모젤 권총, 탄환, 민병모(民兵帽), 수첩, 시계 등이었다(1927.9.10,12,13). 탄환은 77발이었다. 여러 차례 전투를 했는데도 그 정도의 탄환이 있었다. 오래 전투를 치를 정도로 충분히 무장했던 것이다. 이 때 전사한 독립군은 다른 대원이 무사히 퇴각할 수 있게 길목을 지키고 일경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겠다.
  
참의부 6인대의 활동 가운데 전사한 독립군 소식과 그 유품을 적었다.
▲ 동아일보 1927.9.12 기사 참의부 6인대의 활동 가운데 전사한 독립군 소식과 그 유품을 적었다.
ⓒ 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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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4인대는 만주로 귀환하기 위해 압록강 쪽으로 이동했다. 일경은 도강을 막기 위해 만포진에서 벽동까지 380여 리를 40칸 간격으로 인원을 배치하고 골짜기마다 수색을 했다. 4인대는 9월 19일 위원군 밀산면 남파동 압록강 기슭에서 일경대 50여 명과 1시간 동안 교전했다. 이 때 장평운이 전사하고 3명은 다시 산골짜기로 퇴각했다. 이 무렵 일경 합동수색대는 1200여 명으로 증원되어 있었다.

참의부 3중대 본부에서는 적의 대규모 포위망 속에서 악전고투하는 출장반을 구출하기 위해 지원부대 26명을 압록강 기슭으로 파견했다. 본부에서는 출장반과 연락을 취해 도강할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었다. 출장반은 군자금을 모집해서 연락원을 통해 중대 본부로 보내곤 했다. 국내 작전 중에도 수시로 참의부 본부와 연락을 취했고 마지막 도강 작전도 본부와 연계하여 실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원부대는 강화된 국경의 경계망을 뚫지 못하고 만주로 귀환해야만 했다(1927.10.18).

도강에 실패한 3인대는 다시 국내 산림지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8일 동안 굶주리다가 일경 수색대에게 피체되었다. 10월 8일이다(1927.10.18). 장기 항전의 고투 속에서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피체된 것이다. 이들의 행적과 전투에 대해 5개월 동안 신문 기사가 끊이지 않았는데 정작 피체 이후 이들에 대한 재판 소식은 없었다. 피체 후의 신문(訊問) 과정에서 고문으로 순국한 것으로 판단된다. 전사나 마찬가지였다.

참의부 3중대 내지출장반 6인대의 최후 모습은 그러했다. 3인은 한 명씩 희생하며 대원의 퇴각을 돕다가 전사하고 3인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붙잡혀 사실상 순국했다. 초기에는 군자금 모집이 중요 목표였지만 일경 수색대가 포위망을 구축하면서부터는 포위망을 뚫기 위한 전투와 만주 귀환이 작전의 중심 목표가 되었다. 이들은 만주로 귀환하지 못했지만 15개 경찰서 연합부대 1200여 명의 포위에 맞서 견결히 싸웠다. 4개월이 넘는 작전이었다. 전사 순국했지만 신출귀몰한 활동으로 왜적을 경악하게 하면서 작전에 성공했다. 일경 수사대 비용은 4만 원이 넘었다(1927.10.18).

산악지대 전술의 승리

독립군 6인대가 대규모 일경 수색대의 추격 속에서 4개월이나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전술적으로 산악지대를 활동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군자금을 모집한 후에, 또 일경과 교전한 후에 산악지대로 신속히 이동하여 추격을 뿌리쳤다. 이를테면 7월에 덕천군 태극면 영창리에서 활동한 후 달마동 큰 산으로 들어갔는데(1927.7.23) 일경이 곧 추격했지만 종적을 찾지 못했다.

이일권 대장이 전사한 후에는 '해발 6300여 척 되는 비로봉을 넘고 또 다시 5300여 척의 강선봉을 넘어' 이동했다. 평남 관내에서 인가에 들러 일경의 경계 상황과 인근 부호의 정황을 살피고 '밥 몇 술'을 얻은 뒤에는 '해발 4600여 척이나 되는 가마봉' 부근으로 사라졌다(1927.8.7). 6인대는 전체적으로 '밀림의 태산준령'을 근거지로 삼아 '6000척 내지 7000척이나 되는 높은 밀림지대'에서 활동했다(1927.8.4). 곧 2000미터 안팎의 고산 지대가 근거지였다. 1200여 명의 일경 추격대를 오래 동안 무력화시킨 것은 산악지대를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 전술 훈련이 체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과 취사도구를 지니고 있었던 것도 산악지대에서의 활동을 가능케 했다. 때로는 동포의 집에서 식대를 내고 밥을 얻기도 했지만 직접 취식할 준비가 되어 있어서 장기 작전이 가능했다. 마지막 생존 3인이 도강에 실패한 후 산악지대로 들어간 뒤 피체 전의 8일을 굶었던 것은 먹을거리가 전혀 없는 험산(險山)으로 들어간 것을 뜻한다.
   
참의부 6인대의 활동을 '섬홀'이라고 표현하며 자세히 적었다.
▲ 동아일보 1927.8.7 기사 참의부 6인대의 활동을 "섬홀"이라고 표현하며 자세히 적었다.
ⓒ 국사편찬위원회(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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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신문은 6인대의 모습을 '신출귀몰,' 또는 '섬홀(閃忽: 섬광처럼 홀연히 나타남)'이라고 표현했다. 마을에서 일경을 공격하거나 군자금을 모집한 뒤에 산악으로 들어가 추격을 따돌리고 다시 예상치 못한 지역에 나타나서 작전하던 6인대를 형상한 것이다.

6인대는 참의부 의용군이었다. 군자금 모집만을 위한, 그래서 전투경험이 적거나 아예 없는 모연대(募捐隊)와 달랐다. 몇 달 동안 일경의 포위 속에서 쉽게 전멸하지 않고 장기전을 펼친 것도 훈련을 실제 전투에 적용하는 군사적 경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모두가 퇴각할 수 없을 때 1명이 남아 적을 막고 나머지 대원이 퇴각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3명의 전사가 발생하는 상황을 보면, 1-5시간의 교전 가운데 1명의 부상자가 나오면 그 대원이 현장에 남아 적의 공격을 저지하며 나머지 대원의 퇴각을 지원했다. 진입 후 초기 교전에서 부상당한 1명을 완치시키고 이후 같이 작전했던 전례로 보면 전사자가 나온 전투에서도 부상 대원을 보호해 함께 퇴각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하지만 일경 수색대가 점차 증가하는 상황에서 전체 대원의 성공적 퇴각이 담보되지 않을 때 부상당한 1명이 남아 나머지 대원의 퇴각을 지원했던 것이다. 1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대원이 성공적으로 퇴각하는 전투상황이 세 차례나 반복되었다. 1인이 자신을 희생하고 나머지 대원의 퇴각을 돕는 전술이 6인대에 전투적으로 체화되어 있었다.

1927년 참의부 3중대 내지출장반 6인대의 국내 진입 작전은 모두가 전사, 피체되어 본대에 귀환하지 못함으로써 겉으로는 성공한 작전이라 할 수는 없다. 소부대의 국내 진입 작전이 몇 달 동안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므로 네 달 남짓의 장기전도 6인대만의 경우가 아니었다.

하지만 6인대는 1200여 명의 일경 합동 수색대에 맞서 견결히 싸웠다. 군자금 모집이란 작전 목표는 포위망 속에서 적과의 교전으로 바뀌었고 그들은 산악지대를 이동하며 효과적으로 일경의 공세에 대처했다. 1인이 희생하고 나머지 대원을 구하는 전술은 이들이 쉽게 전멸하지 않고 장기전을 이끈 중요 요인이었다. 비록 모두가 희생되었지만 일경 대부대를 집중시켜 그 경비력을 소모케 한 것만으로도 참의부 내지출장반 6인대의 국내 진입 작전은 성공이었다.

끝으로 다시 한 번 그들의 이름을 적는다. 내지출장반 대장 이일권, 대원 원혹항 박봉두 조병운 김문환 장평운. 25-26세 안팎의 청년 독립군.

(주)
1)공훈전자사료관에서 조병운, 장편운 2인의 공적조서만 확인된다. 이일권 등 4인은 아직 서훈 받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새로 쓰는 독립군사'는 주중에 연재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독립군의 무기 1 - 3,800여 정의 무기, 독립전쟁의 선포'입니다.


태그:#참의부 6인대, #이일권, #무명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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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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