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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5월 19일 오전 9시, 압록강 위원군 대안의 절벽 위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국경을 시찰하던 사이토(齋藤) 총독 일행을 참의부 독립군이 공격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일경은 당황한 뒤에 대응사격을 했다. 독립군은 수십 발의 조준 사격으로 총독 일행의 혼을 빼놓은 후 사상자 없이 여유 있게 퇴각했다. 일제 당국을 경악케 한 조선총독 공격 작전이었다. 비록 총독을 살상하지는 못했지만 식민 권력 수괴에 대한 공격이 동포들에게 준 영향은 아주 컸다.

3.1혁명 5년 뒤, 절벽에서 총독을 저격하다

1920년 일제는 만주를 침략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파괴했다고 자신했지만 만주 독립군단은 곧 전열을 가다듬고 국내 진입 작전을 활발히 전개했다. 총독부는 일본 군함 다섯 척을 경비선으로 개조하고 또 빙상 위에서 동력으로 움직이는 경비썰매(雪馬)를 제작해서 국경 경비에 투입하려 했다.

조선총독부는 국경 경비를 우선 과제로 삼았다. 1924년에는 총독이 국경을 시찰했다. 독립군이 출입하는 북선(北鮮) 지방을 순회해 국경이 평화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항일전의 무장대오가 존재하고 대한의 독립정신이 살아 있음을 절벽 위의 총격이 여실히 보여줬다.

저격 작전을 수행한 부대는 참의부 1중대 8명이다. 작전에 참가한 이의준(일명 한권웅)이 뒤에 일경에 피체됐는데 그의 행적을 추적한 기사에 따르면 작전 과정은 이렇다(<동아일보> 1927.10.18. 이하 출처 인용은 날짜만 적는다).

참의부 제1중대장 백광운은 조선 총독이 국경을 순시 중이니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창헌을 지휘로 해 이의준 등 동지들은 8월 19일 아침에 강계군 고산면 대안인 중국 집안현 사랑곡(四狼谷) 팔합목(八合目)에 매복했다. 오전 9시 무렵 배 두 척이 나타났고 앞배에 평안북도 경찰과 수행원들이 탄 것을 보고 총독 일행임을 확인, 공격을 시작했다. 경찰과 수행원은 놀라서 응사했고 맹렬한 총격이 오갔다. 참의부 부대는 퇴각했다. 총독은 뒷배에 타고 있어서 사살되지 않았다.

총독 공격이라는 작전 목표가 뚜렷했다. 총독의 국경 시찰 사실을 미리 알았던 것이다. 정보 출처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당시 언론에 실린 시찰 기사이다. 하지만 언론에는 19일 압록강의 승선(乘船) 일정이 없으므로 신문을 통해 알고 공격 일자와 장소를 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둘째, 독립군을 지원하는 국경지대 동포를 통해 정보를 확보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독립군을 지원하는 동포는 국경 경비 상황이나 특이 사항을 파악하여 독립군에 전달했는데 그 정보망에 총독의 시찰 일정이 파악됐고 곧 참의부에 전달됐을 수 있다. 일제에게 피체된 참의부 간부 장기초(일명 김소하) 공판에서는 총독 순시 사실을 알고 공격을 지시했다고 했다(1932.6.5.). 그는 작전 지역과 가까운 강계 출신이었다.

하지만 정확한 시간과 장소까지 파악하지는 못했다. 뒤에 말하듯이 공격 대원은 8명 정도이고 사격 거리는 600여 미터였는데, 총독의 이동 경로와 시간을 정확히 알았다면 참의부에서 적어도 중대 병력을 투입하고 조금 더 가까운 사격 지점도 확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총독이라는 목표를 정확히 공격할 수 있다면 지휘관으로서는 동원할 수 있는 전 병력을 투입했을 것이다.

따라서 총독의 이동 정보는 일경 수비대의 움직임이나 주민 사이의 소문으로 압록강을 시찰한다는 정도였고 시간, 경로, 어느 배에 탑승할지는 등은 파악되지 않았었다. 특히 18일 초산에 진입한 독립군을 일경이 뒤쫓지 않고 총독의 이동로로 추격대를 옮기어 '강안을 경계'하는 상황이었다. 강안 경비가 강화되는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이동 경로를 짐작하고 곧 총독이 지나갈 것이라는 정보를 확보했다.

작전에 나선 인원은 <독립운동사 5>에 따르면 8명이다. 작전지휘 장창헌, 참의부 1중대 소대장 참위(參尉) 한웅권(이의준), 오장(伍長) 이춘화, 일등병 김창균·현성희·이명근·김여하·전창식 등이다(주1). 2소대와 3소대의 혼성부대로 총독 저격을 위해 특별히 편제됐다. 또 공격에 나서진 않았지만 작전 명령을 내린 백광운, 작전에 관계된 장기초를 포함하면 10명이 된다.

당시 기사는 적게는 4명, 많게는 50명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50명이라 한 것은 총독 저격 사실에 놀란 상황을 반영한다. '결사대의 돌격'으로 언급(1926.12.28.)한 것도 교전이 급박했던 정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당시 교전 상황은 근접거리의 돌격이라 할 수 없었다.

일제 당국은 10명 정도로 파악했다. 평북도지사의 보고('평북고 제8894호')는 '약 10명'이 저격한 것이라 했다. 사건 직후 기사도 경무국 발표를 바탕으로 '백광운의 부하 약 10여 명'으로 추정했다.
 
아래 타원 부분의 화살표 위치가 총독 저격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국내 남산동 건너 중국 하활용개 지역의 지세가 가파르게 높은 곳이다. 중앙 위쪽의 노란 표시가 집안현성이다.
▲ 총독 저격 장소(옛 만주상세지도) 아래 타원 부분의 화살표 위치가 총독 저격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국내 남산동 건너 중국 하활용개 지역의 지세가 가파르게 높은 곳이다. 중앙 위쪽의 노란 표시가 집안현성이다.
ⓒ 이중연 (1차 저작권 텍사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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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지점은 압록강 건너 중국 산꼭대기였다. 적의 경계를 피하면서 전술적으로 공격에 유리한 곳이었다. 작전 직후 가장 빠른 5월 20일 치 기사(1924.5.20.)는 '위원군 마시(馬嘶) 대안의 중국 산위'라고 했다. 이튿날 기사(1924.5.21.)는 고산진에서 50리 거리의 대안 '하활용익(河活龍益)의 낭떠러지 언덕'이라고 했다. 평북도지사의 보고('평북고 제8894호')는 '강계군 고산면 남산동(南山洞) 마시리 대안, 중국 측 집안현 아래 합룡개(合龍蓋) 약 20정(丁) 하류 압록강안 무명산 산복'이라고 했다.

중국 지명으로는 이의준이 피체된 후의 기사(1926.12.28.)는 '집안현 융화보(融化保) 대랑곡(大狼谷)의 강안'이라고 했다. 이의준, 김창균의 재판 과정을 자세히 전한 기사(1927.10.28.)는 '집안현 사랑곡(四狼谷) 팔합목(八合目)'이라 했다. 김창균이 집안현 융화보에 거주했으므로 실제 김창균, 이의준이 밝힌 장소가 중국 지명으로 '집안현 융화보 사랑곡(대랑곡) 팔합목'이었다 하겠다.

이후 조선 총독들은 저격이 무서워서 압록강을 순시하지 않았다

압록강을 현지 답사한 오기영 <동아일보> 기자는 공격 지점의 지세를 이렇게 기록했다(주2).
 
강계로 흘러들어가는 운성강(雲成江)이 찢겨나가고 이름 없는 섬(島)을 지나니 여기가 강계군 고산면 대안의 중국땅 집안현 사랑곡 팔합목으로 그전 조선총독 재등(齋藤: 사이토) 씨가 국경순시를 하다가 쏟아지는 총알에 간담이 서늘하던 곳이란다. … 참의부원이 숨어서 총을 발사하였다는 중국편의 까마아득히 높은 산은 짐작컨대 해발 이천 척(尺)을 훨씬 넘으리라. 꼭대기는 나오고 들어가 제물에 포대(砲臺)를 이루고 나무조차 무성하였으니 기나긴 강안에서 이런 지대를 택하여 몸을 감추고 계획을 단행한 백광운의 눈도 넓은 것을 알겠다.
 
 
600미터 이상의 높은 산인데 우거진 나무 사이에 몸을 감추고 사격하기 좋은 지세였다는 것이다. 강안의 낮은 구릉은 일경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따라서 경비망을 뚫은 뒤 매복 저격하기도 좋은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평북도지사의 보고에도 '암석이 많고 올라가기 어렵지만 산위에서는 선박을 내려다보고 저격하기 가장 좋은 지점'이라고 했다.

저격하기 좋지만 저격 명중률을 담보하는 곳은 아니었다. 작전부대는 소총으로 무장했는데 유효 사거리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독립군이 많이 쓰던 소총은 러시아 모신나강으로 다른 소총보다 사거리가 길고 명중률도 높았다. 유효 사거리도 750미터 정도로 저격용으로 많이 사용했다.

그렇지만 600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폭 100미터 안팎의 압록강 가운데를 운항하는 엔진동력선, 그 위에 있는 사람을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쉽지 않았다. 평북도지사의 보고는 사격 지점에서 배까지 거리를 600미터로 봤다. 공격받았지만 "여러 발이…앞배 오른쪽 2~3간(間) 앞의 물속에 떨어지거나 삼서(森西) 경부와 강전(岡田) 순사부장의 귀를 스치고 배 위를 날아갔다"라고 기록했다. 거리가 멀어 명중시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를 축소하는 일제 보고임을 감안하면, 일경을 사살하지는 못했지만 부상시켰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공격은 오전 9시 무렵이다. 이튿날 기사는 9시경이라 했고, 2일 뒤 기사는 9시 20분이라 했다. 또 평북도지사의 보고는 9시 5분경이라 했다. 공격은 5분간 이뤄졌다. 몇 시간 동안 교전했다는 언급도 있지만 발사 수를 고려하면 5분 정도가 맞다. 20일자 기사는 30~40발 사격했고 곧 일경이 70여 발을 대응 사격했다 적었다. 21일자 기사는 40~50발을 발사했고 일경이 약 80여 발을 대응 했다고 하였다. 평북도지사의 보고는 "장총 또는 모젤 권총으로서 약 40~50발 발사한 것으로 파악되고…기총(騎銃) 28발, 모젤 권총 44발, 모두 72발을 응사했다"라고 적었다. 8명이 각 5발 정도를 조준 사격했다고 보면 전투시간은 5분 정도가 된다 하겠다.

총독을 쓰러뜨리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총독 일행이 두 척의 배에 나눠 탔기 때문이다. 곧 사이토는 웅비호(雄飛丸. 10톤 규모)라는 민간 여객선을 탔고, 그 앞을 평북 경찰부원과 수행원이 탄 비창환(飛昌丸)이 인도했다. 비창환은 웅비환의 경비 역할을 했다. 무장 일경을 확인하자 독립군은 앞배에 총독이 탄 것으로 판단하고 바로 공격했다. 하지만 총독은 뒷배에 있었다.

1923년 말에 기관총을 장착한 일본 군함을 경비선으로 배치할 계획이었지만 결빙으로 미뤄졌다. 1924년 5월에는 무장 경비선을 배치하고 그에 탑승하거나 호위를 받아 국경을 시찰할 수 있었지만 사이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실제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비선 두 척이 압록강에 배치된 것은 5월 말로 사이토의 국경 시찰 직후이다. 사이토는 국경 경비가 완벽하고. 독립군의 진입 작전도 없이 평온하다는 것을 민간 여객선을 타고 과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사이토의 의도는 참의부 부대의 공격으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왜적과의 독립전쟁이 힘차게 이어지고 있음을 총독을 향한 저격이 증명했다. 오기영 기자의 표현으로, 식민권력의 수괴 총독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후 사이토는 물론이고 후임 총독들도 다시는 압록강 순시를 시도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개발한 소총으로 독립군이 많이 구입했다. 유효사거리 750미터로 저격용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 모신나강 소총 러시아가 개발한 소총으로 독립군이 많이 구입했다. 유효사거리 750미터로 저격용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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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부대원들의 희생

공격 작전에 참가한 부대원들은 독립전쟁을 지속하다가 일제에게 희생됐다.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던 장창헌은 일제 밀정의 간계에 빠져 가장 먼저 희생됐다. 강계군에 홍인화(洪仁化)라는 밀정이 있었는데 장창헌을 유인해서 일경이 총살하게 만들었다.

이어 장창헌의 부하들도 속여서 일경이 매복한 곳으로 유인했다. 총독 저격 작전에 참가한 이춘화 등 2명이 이때 전사했다. 장창헌 소대의 근거지도 파괴되었다. 1924년 7월 13일이다. 이 때 동원된 일경은 강계서와 경기도 경찰부 수사반이었다(1924.7.17.).

경기도 경찰부도 참가했으므로 총독 저격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밀정을 동원해 장창헌 소대장을 해쳤던 것이다. 일제는 장창헌이 작전에 참가했음을 만주 일경 정보를 통해 알고 있었다. 장창헌 부대의 희생에 분노한 손용준, 최윤흥, 박학빈 등 동포들은 곤봉과 낫으로 밀정 홍인화를 처단했다.

김창균은 총독 저격 후 화창면 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항일전투를 지속했다. 1926년 1중대 소대장으로 국내로 진입하다 일경에게 붙답혀 옥중 순국했다. 진입 당시 촌부의 옷으로 변장하고 고향 집의 형을 만나러 갔는데 변절자가 참의부 의용군임을 확인해서 일경에게 피체됐다. 재판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태연자약하게 "사형을 당하나 와석종신을 하거나 죽기는 일반이라 결국은 시간문제에 불과하다"고 하며 "내가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만으로 사형을 준다면 사양할 바도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했다(1928.9.27.).

이의준도 항일전투를 지속하다가 1926년 말에 중국에서 피체돼 국내로 인도됐고, 사형당해 순국했다. 재판에서 총독 저격과 주재소 공격 등의 사실을 당당하게 밝혔다(1928.9.27.).

기자 오기영은, 이들의 순국 후에 총독 저격의 현장을 찾아가 "이미 교수대의 이슬 된 그들이 일찍이 이 깊은 산을 내 집 삼아 다니든 광경이 눈앞에 선히 나타난다"라며 추모했다.

현성희는 1927년 중국 관헌에게 피체돼 일제 관헌에게 인도됐고 피살돼 순국했다. 이명근, 김여하, 전창식은 이후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저격 작전 후 장창헌 소대원으로 계속 활동했다고 보면, 장창헌 소대 근거지가 밀정의 간계로 파괴될 때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
1)<<독립운동사 5: 독립군전투사(상)>>,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473쪽. 이 기록은 2중대라 했는데 1중대였다. 1중대장이 참의장을 겸임한 백광운이었다. 이의준이 피체될 때 1중대 2소대장이었다. 지휘를 맡은 장창헌은 3소대장이었다. 김여하는 당시 기사에 김창하(金昌河)로 기록되었다.
2)오기영, '압록강상이천리 5', <동아일보> 1929년 8월 20일.
3)위와 같음.

덧붙이는 글 | 다음 이야기 '일본군의 만주 민간인 동포 학살 - 경신참변'은 8월 19일에 이어집니다.


태그:#무명독립군, #총독저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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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독립군가' 1절. 지은책 -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일제강점기 겨레의 노래사), '황국신민'의 시대, '책'의 운명(조선-일제강점기 금서의 사회사상사), '책'-사슬에서 풀리다(해방기 책의 문화사), 고서점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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