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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인 4.11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및 김주열 열사 추모식."
 4월 11일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인 4.11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및 김주열 열사 추모식."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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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3·15의거, 4·11민주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물론 경남 마산, 창원시민들이 큰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 없이 걸핏하면 상대에게 '빨갱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3·15정신'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

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 상임대표를 지낸 김영만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고문이 4·11민주항쟁 63주년을 맞아 '3·15정신과 빨갱이 타령'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 강조한 말이다.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회장 백남해)는 11일 경남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4·11광장)에서 추모식을 열었고, 김 고문은 이날 관련 안내 책자에 글을 발표했다.

4·11민주항쟁은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경, 3·15의거에서 행방불명이 됐던 김주열 학생이 27일 만에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중앙부두 바다에서 떠올랐고, 그의 참혹한 시신을 직접 본 시민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해 일어난 항쟁(3·15 2차의거)을 말한다. 이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김영만 고문은 이 글에서 "1960년 마산에서 일어난 3·15의거와 4·11민주항쟁 당시 이승만은 모두 3차례에 걸쳐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고 소개했다.

이승만은 그해 3월 19일 나온 첫 담화에서 "마산에서 지각없는 사람들의 선동"이라 했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된 4월 11일에 일어난 항쟁에 대해 4월 13일 두 번째 담화에선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이라고 했다. 4월 15일 세 번째 담화에서는 "마산에서 일어난 폭동은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언급한 김 고문은 "담화문을 살펴볼 때 이승만은 3·15의거에 대한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경찰을 중심으로 한 공권력으로 강경대응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태가 진정될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러나 4월 11일~13일까지 사흘에 걸쳐 마산시민들과 학생들의 거센 항쟁이 일어나자 상당한 위기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이승만이 꺼내든 카드가 마산시민들을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승만의 빨갱이 몰이가 실패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3·15의거는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거해서 일어난 것으로, 당시 경찰이 쏜 최루탄과 총에 시민 8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당시 발포명령자로 지목된 사람은 서득룡 부산지방경찰청 마산지청장과 손석래 마산경찰서장이었다. 두 사람은 4·19를 전후해 도피하다 행방을 감추었다.

이후 손석래는 도피 8년 4개월만에 자수해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위반, 살인·폭행과 그 지휘명령 등 행위자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서득룡은 도피 11년 만에 자수해 대구지검에서 조사를 받았다. 당시 손석래와 현장에서 데모대 진압을 지휘하며 직접 최루탄을 발사한 박종표(마산경찰서 경비주임)가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했다.

박종표는 이때 "3월 15일 밤 손석래가 '영감, 야단났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자 서득룡이 '빨갱이 같은 새끼들, 쏘아버리세요'라고 말했고 그에 따라 손석래가 실탄사격을 명령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서득룡은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를 설명한 김 고문은 "대한민국에서 빨갱이라는 말은 이처럼 '함부로 죽여도 괜찮다'라는 살의를 담은 단어"라며 "요즘도 자신의 정치적 성향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빨갱이들이니 멸공이니 하는 이념 갈등을 부추기는 발언이 난무하고 있다. 역사는 또 다른 이름으로 반복된다. 3·15, 4·11 역사의 정신계승과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4월 11일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인 4.11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및 김주열 열사 추모식." 김영만 고문의 참배.
 4월 11일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인 4.11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및 김주열 열사 추모식." 김영만 고문의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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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잘못 지적하면 빨갱이로 몰아가는 나라"

4·11민주항쟁 기념·김주열열사 추모식은 이동재 시인이 추모시 '김주열, 그는 역사의 눈이다'를 낭송하고 김희정씨가 추모곡을 부르면서 시작됐다.

백남해 회장은 식사를 통해 "오늘은 4·19혁명의 첫날인 4·11민주혁명의 날이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른 이 자리에서 공권력의 폭력에 대해 고민한다. 시민의 정당한 외침을 총과 최루탄으로 폭력 진압하던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고 말했다.

백 회장은 "지금, 현 정권은 국민을 기만하며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는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이런 현 정권의 매국 폭력행위는 불의에 항거한 3·15의거 정신과 김주열 열사의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정신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라면서 "우리는 다시 김주열 열사와 함께 이 시대의 불의한 공권력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 됐다. 나라를 걱정하는 모든 민주 시민이 김주열 열사와 한마음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기원한다"고 염원했다.

이영노 남원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장은 "민주주의는 불의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슬픈 말이 있다. 독재정권과 부정선거에 항거하다 숨진 김주열 열사의 이야기가 바로 그 처절한 예이다"라며 "열사가 남긴 민주주의 기반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의 숭고한 정신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열사께서 온 국민의 가슴 속에 민주주의의 암흑기를 밝힌 횃불로 영원히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심건우 마산용마고 학생대표는 추모사를 통해 "후배들은 선배님의 희생, 선배님의 용기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 잊지 않겠다. 꼭 기억하겠다. 앞으로 또다시 우리 역사가 부정한 권력으로 국민을 짓밟으려 한다면, 선배님이 그랬듯 우리 후배들이 의연히 일어나 부정한 권력과 맞서겠다. 선배님께서 만들어준 이 민주주의의 봄꽃이 시들지 않도록 잘 가꾸고 키워가겠다"고 다짐했다.

박완수 경남도지사는 최만림 행정부지사가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김주열 열사 주검 발견은 민주화의 횃불이 돼 전국으로 번졌고, 마침내 4.19혁명을 통해 독재를 밀어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었다"며 "경남도는 민주 영령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룩한 민주주의 정신을 기억하고, 그 정신을 우리 자녀와 젊은이들에게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박종훈 경남도교육감은 "4·11민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불빛이다. 어둠을 내몰아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우리는 자유·민주·정의의 정신을 이어받아 연대하고 협력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남표 창원특례시장은 하종목 제1부시장이 대독한 기념사에서 "우리는 김주열 열사를 비롯한 많은 민주 열사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다. 그날의 함성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오늘 이렇게 추모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며 "한 젊은이의 꽃다운 죽음과 민주 영령들의 숭고한 뜻을 이어받아, 시민들이 일상에서 자랑스러운 창원의 민주주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류조환 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단체연대회의 상임대표는 기념사에서 "63년 전 그때, 이승만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를 바로잡고자 길거리로 나온 학생들, 시민들이 잘못한 것이었느냐"며 "왜 꽃다운 청춘들과 시민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야 했느냐? 열사들도 그리고 지금 우리들도 대단한 것들을 원하지 않는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 민주적인 세상'을 원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이어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입으로는 공정과 상식을,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현실에서는 언제나 역사를 되돌리려는 만행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더디지만 앞으로 전진을 해왔다"며 "그 맨 앞자리에 섰던 김주열 열사를 비롯한 열사들이 계셨기에 가능했다. 과거를 팔아서 미래를 살 순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친일·친독재가 어깨 펴고 사는 나라, 일제 강제 동원 매국협상을 국익이라 선전하는 나라, 자국의 영토를 왜국이 자기네 땅이라 우려도 대꾸도 못 하는 나라, 자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분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는 나라, 정권의 잘못을 지적하면 빨갱이로 몰아가는 나라, 국민의 뜻을 외면하고 거역하는 지도자는 독재자밖에 없다"며 "그럼에도 더 많은 민중의 목소리는 실천하는 양심은 '꺼지지 않을 정의의 빛'으로 대한민국을 지켜낼 것"이라고 일갈했다.
 
4월 11일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인 4.11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및 김주열 열사 추모식."
 4월 11일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인 4.11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및 김주열 열사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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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출신인 김주열 열사는 1960년 3월 11일 옛 마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른 뒤, 이모할머니 집에 있다가 3월 15일 형(김광열)과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마산시민의 의거에 참가했다.

그는 그날 오후 7시 30분부터 10시 사이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현 창원지법 마산지원) 앞 도로에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고, 경찰은 시신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빠뜨렸다.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마산의료원에 안치되었다가 경찰이 빼돌려 남원으로 옮겼으며, 남원 금지면 옹정리 우비산에 묻혔다.

이에 4·11민주항쟁 당시 시민들은 "고문경찰 잡아내라", "살인경찰 처벌하라", "죽은 학생 살려내라", "이기붕 죽여라", "이승만 물러가라"고 외쳤고, 그해 4월 12일과 13일에는 마산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으며, 사흘 동안 밤낮으로 계속된 항쟁은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결국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했다.

옛 마산상고는 1995년 4월 11일 김주열 열사한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는 3·15의거와 4·11민주항쟁이 발발한 지 39년 만인 1999년 3월 14일 남원에 있는 김주열 열사 묘소를 참배했고, 2010년 4월 11일에는 50년만에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을 거행하기도 했다.
 
4월 11일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인 4.11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및 김주열 열사 추모식." 박종훈 교육감의 참배.
 4월 11일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인 4.11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및 김주열 열사 추모식." 박종훈 교육감의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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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인 4.11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및 김주열 열사 추모식." 최만림 경남도 행정부지사와  하종목 창원특례시 제1부시장.
 4월 11일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인 4.11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및 김주열 열사 추모식." 최만림 경남도 행정부지사와 하종목 창원특례시 제1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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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인 4.11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및 김주열 열사 추모식."
 4월 11일 창원마산 김주열열사시신인양지인 4.11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4.11민주항쟁 기념 및 김주열 열사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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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411민주항쟁, #김주열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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