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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집을 비운 사이에 아그배 사과나무의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연분홍 꽃봉오리를 달고 있더니 어느새 웃음 띤 얼굴로 반겨준다. 그 밑에 있는 영산홍도 진홍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야흐로 산천이 제각기 멋을 부리기 시작하는 계절이 된 것이다.

산천이 물이 올라 달아오르는 이 좋은 계절에 무정하게 떠나 버린 사람이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채 하기도 전에 뭐가 그리도 급해서 저승길을 떠난 것일까.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는 길을 그는 급하게 떠나 버렸다.

지난주 금요일(4일) 오전 11시 30분쯤, 볼일 보러 어디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편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촌 형님, 즉 나에게는 사촌 시숙이 되시는 분이 쓰러지셔서 병원으로 이송했는데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는 거였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가슴 한쪽을 스치며 지나갔다.

이 좋은 봄날에 뭐가 그리도 급해서 떠나셨나요

사촌 시숙은 술을 좋아하셨는데, 술병으로 탈이 나서 몇 해 전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담당 의사가 말하길 간 수치가 이렇게 높은 사람은 처음 본다고 그랬다 한다. 시숙은 당뇨와 지방간으로 치료를 받다가 퇴원을 했다. 그 이후로 몸조리를 좀 하는 듯하더니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마침내 쓰러진 모양이었다.

남편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고향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또 전화가 왔다. 시숙이 유명을 달리했다는 거였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지 채 2시간도 안 되어서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날아온 것이다. 아, 어찌해야 하나. 남은 가족들은 어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조퇴를 하고 온 남편과 함께 그 길로 바로 고향으로 달려갔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남편은 자꾸 과속 페달을 밟았다. 그래서 나도 손잡이를 꽉 움켜잡고 함께 힘을 주며 달렸다.

시숙은 우리 집안의 장손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청소년기에 시골로 내려와서 농사지으며 살았다. 시숙에겐 아버지가 되시는 우리 큰아버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큰어머니가 식솔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넓디 너른 서울에서 활개치며 자라던 사람이 갑자기 시골 촌구석으로 내려왔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갑갑했을까. 손에 익지 않은 농사일은 너무 힘들었을 테고 희망도 별로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시숙은 틈만 나면 서울로 갈 궁리를 했다 한다. 하지만 홀어머니와 어린 동생들, 그리고 집안 어른들의 반대 때문에 번번이 그 뜻은 굽혀지고 말았다 한다.

시숙은 요새 사람이었지만 또 옛날 사람이기도 했다. 장손이다 보니 항상 전체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다. 집안과 가문을 위한 일에 온 마음을 쏟았다. 봉제사와 접빈객이 시숙의 가장 큰 의무였고 또한 보람이기도 했다.

시숙은 옛날 사람이었다

일찍 출발한다고 했지만 어린이날이 낀 휴일 전날이라서 그런지 길이 좀 막혔다. 그래서 저녁때나 되어서 시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네 초입에 들어서면서 큰집 쪽을 쳐다봤다. 운명하셨다는 연락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바라봤더니 집 안팎에 등불을 여럿 밝혀놓은 게 보였다. 아, 진짜 돌아가셨구나. 저렇게 불을 밝히고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니 분명 돌아가시긴 돌아가셨나 보다.

큰집 마당에는 벌써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모두 집안 어르신들이었다. 평소 때 같으면 웃으면서 어른들께 인사를 드렸을 테지만 시숙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머리 숙여 인사만 드리고 빈소가 차려져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는 병풍이 처져 있었고 촛불과 향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사촌 시숙의 영정 사진이 조용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촌 동서 형님은 나를 끌어안고 오열을 터뜨렸다.

"동서야, 말 한마디 없이 그양 가뿟다. 아푸다는 소리 한 마디 안하고 그양 가뿟다. 아프다고 한 마디라도 했으마 내가 이래 안 원통할끼다. … 아침에 어깨 아프다며 좀 주물러 달라 그래서 주물러줬는데…, 그카다가 갑자기 사람이 넘어가더라. 그라고는 말 한마디 몬하고 그양 가뿟다. 말 한마디라도 했으마 내가 이래 안 원통할낀데…. 애들 얼굴도 몬 보고 그래 가뿟다."

애통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50살도 안 된 사람이 갑자기 갔으니 그 참담함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가 있겠는가. 갓 스무 살이 된 종조카와 이제 고등학생밖에 안 된 종질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사촌 시숙이 돌아가시자 집안에선 장례식을 집에서 치르기로 결정을 내렸다. 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르기보다는 망자를 집에 데리고 와서 보내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경황없는 가운데 장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이 갔으니 어디 부고하기도 그랬다. 그래서 친척들에게만 전화로 간단하게 부고를 알렸다. 그리고 문상 올 사람들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문상 올 사람이 많지 않을 거 같았는데 정말 사람들이 많이들 오셨다. 준비한 음식이 몇 차례나 바닥이 났다. 살아생전엔 그다지 존재 가치가 높지 않았던 시숙이었는데 죽으니까 사람이 보이는 거였다.

관 뚜껑을 덮은 뒤에 그 사람이 보인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고 관 뚜껑을 덮은 후에라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한 인간적 가치를 알 수 있다 하더니, 살아서는 명예도 부귀도 못 누렸던 사람이었는데 죽은 뒤에 보니까 비로소 사촌 시숙의 됨됨이가 보이는 거였다.

우리 시숙은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살림도 넉넉지 못했다고 하지만 사람 사는 도리를 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예상치 않게 문상객들이 많이 오셨다. 그리고 시숙의 마지막을 함께 해 주었다.

상여가 나가는 날이 되었다. 시숙은 이제 산으로 가는 것이다. 남은 가족들의 애끓는 울음을 뒤로 하고 시숙은 산으로 갔다.

"나는 우째 살으라고 혼자 가니껴. 나는 우째 살으라고, 우에 살으라고 혼자 가니껴."

동서 형님은 상여를 부여잡고 놓지 않았다. 옆에서 끌어안고 떼어 말렸지만 형님은 엎어지고 기어서라도 상여 뒤를 따라가는 거였다. 그렇게 아주버님을 보내드렸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주버님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형님은 가장 좋은 것들만 보내 드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동서야, 이 양복 보내 드려라. 이거 딸이 세뱃돈 모아서 아빠한테 선물한 건데, 양복 선물 받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이거를 이래 입고 가네. … 동서야, 냉장고에 보면 약물이랑 야채들 있을끼다 그거도 보내 주라. 내가 그 사람 건강을 얼매나 챙깄는데…. 아침저녁으로 간에 좋다카는 야채들 갈아서 줬는데…."

형님이 꺼내주는 물건들을 안아 들고 집 모퉁이 옆 빈터로 갔다. 시숙에겐 작은 어머니가 되는 우리 시어머니가 벌써 불을 붙여놓고 있었다.

"연기가 산으로 가야 될낀데…. 지 가는 데로 따라가야 되는데…."

어머니는 그러시며 옷가지들과 이부자리 등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기가 산으로 가지 않고 자꾸만 집 쪽으로 가는 거였다.

"산으로 가야 되는데 와 자꾸 집으로 가노? 지 가는 길 따라서 가야 되는데…."

어머니는 연기가 집 쪽으로 간다고 걱정하시는 거였다. 그런데 얼마쯤 지나서부터 연기가 방향을 바꾸더니 산 쪽으로 가는 거였다. 그리고는 너훌너훌 춤을 추며 산을 향해 올라갔다.

"그케 산에 가야제. 조카야, 인자 다 이자뿌고(잊어버리고) 가서 쉬거라. 집 걱정 돼서 집 둘러봤디나? 인자는 다 이자뿌고 가거라. 좋은 데로 가거라."

우리 시어머니는 달래듯이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산으로 가야 되는데..." 집 둘러보고 산으로 간 시숙

작년 봄에 사촌 형님네와 우리 부부가 같이 노래방에 간 적이 있었다. 우리 시어머니 생신이라서 고향에 내려온 우리는 그날 저녁에 형님네와 함께 읍내에 나갔던 것이다. 나이도 비슷하고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한 우리들은 사촌 간이긴 하지만 친형제 간이나 마찬가지로 지냈다.

그날 밤, 형님은 입에 대지도 않던 맥주를 받아 마시는 거였다.

"아지뱀이 주는 거라서 그런강 술이 다네요."

그러면서 사촌 형수와 사촌 시동생이 되는 우리 남편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보던 시숙은 "이 사람이 와 이카노? 안 묵던 술을 다 묵노?" 그러면서 마누라의 파격에 놀라워했다.

그날 자리는 참으로 유쾌했다. 흥이 오른 시숙이 사촌 제수씨가 되는 내게 그랬다.

"제수씨, 내년에도 또 노입시더. 노래방 또 오입시더."
"아주버님, 노래방도 가고 해외여행도 나중에 같이 가입시더. 애들 다 키우고 아주버님네랑 우리랑 재미나게 살아 보입시더."

그렇게 약속했던 사람이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먼저 가버렸다. 꽃 피고 새 우는 이 좋은 봄날에 뭐가 그리 급해서 이렇게 일찍 길을 떠났단 말인가.

어버이날인 오늘은 사촌 시숙의 삼우제 날이다. 남은 가족들의 애끓는 곡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다. 형님이랑 종조카들이 힘차게 잘 살 수 있도록 저승에서도 항상 지켜봐 주실 것을 믿는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태그:#시숙, #종손, #개관사정, #삼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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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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