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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농민봉기일로 해야” VS “무장기포일이 적합”

동학농민혁명기념일은 동학농민혁명 최초의 봉기인 ‘고부농민봉기일(음력 1월 10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지난 10일 ‘제40회 황토현 동학축제’를 맞아 ‘동학농민혁명기념일 제정을 위한 제4차 학술토론회’가 정읍시 황토현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내의 교육관에서 열렸다.

(사)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주관한 이날 토론회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언제로 제정해야 할까?'를 주제로 사회에 신영우(충북대)교수, 발제자로 배항섭(성균관대)교수와 조광환(사)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이사장, 그리고 토론자로는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과 김양식 충북학연구소 연구위원이 나선 가운데 열렸다.

배항섭 교수는 발제에서 “당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변혁지향 세력이 1892년경부터 구상하고 기도한 일련의 ‘반란’구상과 기도의 최종 귀착점이 무장기포(1894년 3월 20일)이며, 이곳에서 발포된 '무장포고문'이야말로 농민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서 “기념일은 무장기포일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고부농민봉기와 관련해서는 “1892년경부터 변혁지향 세력들이 교조신원운동, 척왜양운동, 사발통문 거사계획 등과 같은 일대 변혁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는데 이 과정에서 민란의 수준으로 봉기한 것이 고부농민봉기이다”라며 “그러나 그런 구상들이 번번이 좌절되어 본격적인 전국적 항쟁, 곧 농민전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으므로 동학농민혁명의 상징으로 고부농민봉기일은 적합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발제자로 나선 조광환 이사장은 “일부 학계에서 ‘상징성이 있다’면서 주장하고 있는 무장봉기일에 대한 명시적인 ‘농민전쟁을 시작 한다’는 기록 사실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전봉준 판결선고서 원본’이나 ‘수록’의 당시 무장현감 조명호의 보고를 보더라도 무장은 잠시 머무는 중간집결지의 성격일 뿐 농민군의 근거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상징성에서 취약하다”고 말했다.

조 이사장은 “반면 1968년 처음 공개된 사발통문을 통해 본 고부농민봉기는 ‘봉기는 의로운 깃발을 들어 창생(蒼生)을 구하고 북을 울려 조정에 가득 찬 간신도적과 탐관오리를 물리치며, 나아가 왜와 서양세력을 몰아내고 국가를 튼튼히 하고자 함이니 동참하라’면서 고부성 격파, 군기창과 화약고 점령, 전주영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는 등 혁명의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면서 “고부농민봉기야말로 전국적인 농민전쟁의 시작이며 무장봉기는 고부봉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조 이사장은 무장봉기를 입증할 만한 사료의 부족, 단순한 동학도의 집결을 보고한 당시 무장현감의 보고, 전봉준 스스로 ‘고부기포’를 표현하고 있으나 ‘무장기포’의 언급이 없는 점, 관군의 무장이 아닌 고부로의 출동, 무장의 농민군 집결은 사실이나 이는 전라, 충청도의 농민군이 백산으로 모이기 위한 중간집결지 내지는 출정지 중 하나 등 무장기포일의 기념일 제정 불가에 대한 사례를 들어가며 반박했다.

이와 함께 조 이사장은 “기념일은 어떤 사건의 상징이므로 제정에 있어서 역사성, 대표성, 상징성, 대중성, 현재성을 잘 살펴서 제정해야 마땅하다”고 전제하고 “고부농민봉기일이야말로 기념일로 가장 적합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박준성 연구원은 “동학농민혁명은 크게 고부농민봉기, 제1차 농민혁명, 집강소 단계, 제2차 농민혁명 등 4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혁명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 ‘반봉건, 반외세(침략)’의 구호를 가장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시기가 기념일로 타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양식 연구위원은 “사발통문-고부봉기-무장기포-백산대회-황토현전투의 전개 과정에서 발표된 ‘무장포고문’의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고 말하고 “포고문은 곧 시작을 알리는 선언적 의미가 있는 만큼 기념일은 무장기포일이 타당하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한편 이날 토론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고부농민봉기일(1894년 1월 10일) 등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해 기념일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날짜들을 둘러싸고 벌인 토론회를 지켜보고 ‘고부농민봉기일이 상징성이 가장 크다’는 견해에 입장을 같이 했다.

그러나 ‘무장기포일을 기념일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어 ‘좀 더 신중하게 따져보고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당초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곳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정읍 고부이다.

이러한 이유로 봉기의 도화선이 된 만석보 등 관련 유적이 29곳에 이르는 정읍에서 일어난 ‘고부농민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으로 보는 것이 당연시 됐었다. 그러나 지난 1996년 신용하 한양대 교수가 정읍에서 열린 ‘갑오동학 학술토론회’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된 곳은 고창군 무장이다”고 주장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점에 대한 논란이 시작됐다.

이번 토론회는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난 후 본격화된 기념일 제정을 두고, 그동안 관련단체와 학계가 3차에 걸쳐 토론회를 열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이날 네 번째로 열렸다.

지금까지 거론된 기념일은 음력으로 △1월10일(정읍 고부봉기) △3월20일(고창 무장기포) △3월25일(부안 백산대회) △4월7일(정읍 황토현 전승) △4월27일(전주 입성) △11월8일(공주 우금티전투) 등이다. 한편 기념일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날짜를 결정해 정부에 제출하면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심의위를 통해 최종 기념일을 결정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북 정읍지역신문 '정읍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고부봉기, #동학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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