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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란마호의 출항으로 쿠바혁명은 진군을 시작했다.
ⓒ 오마이뉴스 천호영
"1956년 11월 25일, 오전 1시 30분, 하얀색의 그란마호에 마침내 시동이 걸렸다. 여든두 명의 몽상가들은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질 올리브그린색 군복을 입고 있었다. 모든 불을 끈 채 요트는 강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밤중이라는 점과 때맞춰 내려준 비가 도움이 되었다. 머지않아 그들은 피델의 말처럼 '해방군 아니면 순교자'가 될 터였다."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중에서

82명 혁명 전사들을 이끄는 총사령관은 피델 카스트로였다. 아르헨티나의 젊은 의사 체 게바라도 의무대장으로 함께했다. 쿠바혁명의 진군은 그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의 연극' <체 게바라>도 그렇게 그란마호의 출항으로 막을 연다.

신화가 된 전설의 게릴라

▲ 루아 역의 배우가 뒤집힌 그란마호에 올라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천호영
체 게바라. 본명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승리로 이끌고 쿠바의 상공부장관, 중앙은행 총재 등을 지냈다. 그러나 권좌에서 스스로 내려와 세계를 돌며 게릴라투쟁을 벌이다가 결국 볼리비아에서 붙잡혀 총살당했다. 1967년 사망, 그때 그의 나이 서른아홉.

사람들은 그를 본명 대신 '체(Cheㆍ'나의'라는 뜻의 인디언 토속어)'라고 불렀다. 체 게바라, '나의 게바라'. 그렇듯 그는 남미 민중들에게 지도자라기보다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프랑스의 사상가 사르트르는 전선에서도 괴테를 읽던 그에 대해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죽음으로, 게바라의 전설은 게릴라의 신화가 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체 게바라는 그의 '적'들에게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저항' '청춘' '열정'의 아이콘이 됐다. 긴 머리, 거친 수염, 별이 달린 베레모 등 그의 초상은 티셔츠와 포스터는 물론 심지어 속옷에까지 등장하고 있다.

사후 40년, 지금 우리에게 체 게바라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나무닭움직임연구소란 곳에서 연극 <체 게베라>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체 게바라를 어떻게 무대에 되살려내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22일, 연극 <체 게바라>의 연습 현장인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자계예술촌을 찾았다. 무주IC를 빠져나와 차로 20분 정도 더 숲길을 운전해 민주지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자계예술촌에 도착했다. 폐교를 개조한 그곳에서 <체 게바라> 공연팀 9명이 합숙하며 '혁명'을 연습하고 있었다.

산골의 게릴라 연극부대원들?

▲ 연극 <체 게바라>의 연습 장면. 우측에 보이는 바퀴장치가 체 게바라의 오토바이 '페데로사'를 상징하는 '로시난테'다.
ⓒ 오마이뉴스 천호영
일단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연습 장면을 지켜봤다. 가슴에 게바라의 초상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여자배우가 외쳤다.

"이 세상에는 아직 대마와 아편이 아닌 꽃과 과일을 재배할 기회가 있습니다."

전국이 25℃를 오르내리는 초여름 날씨임에도 연습장으로 쓰이는 교실 안은 시원했다. 벽 한 면에는 다양한 탈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맞은 편 무대 공간 뒤로 흰 천이 드리워져 있고, 또 그 뒤로 각종 소품들이 가득했다. 사무실로 쓰이는 듯한 작은 방 벽에 붙어있는 붉은 천의 수건도 눈길을 끌었다. 거기엔 일본극단 하구루마좌의 이름으로 '아시아연극인 연대만세'라는 구호가 씌어있었다.

무대에서 배우들이 밥을 나눠주는 장면을 연기했다. 연출을 맡은 장소익씨가 배우들에게 설명한다. "바그다드 사람들에게 대추리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준다고 생각하세요." 또 길을 닦는 장면. 마찬가지로 연출의 주문이 이어졌다. "길 닦는 장면은 높은 건 낮게 하고 낮은 건 높게 한다는 그런 의미를 담아 연기했으면 좋겠어요."

오후 4시 휴식시간. 둥그렇게 모여 앉아 참외를 먹으며 오후 연습 장면들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한 여자배우가 "연출님 말씀대로 하니까 2막이 잘 정리되는 것 같아요"라고 했다. 옆자리의 남자배우가 핀잔을 준다. "주인공 따려고…." 모두 폭소.

향후 일정 및 공연당일 준비에 대해서도 점검했다. 연출이 "선풍기가 없는데…"라고 하자 누군가 "저희 집에 선풍기 많아요"라고 대답하고, 또 "항아리 하나밖에 없나"라고 하자 또 누군가 "나중에 김장독 파기로 했어요"라고 응답했다.

배우들은 서울·인천·대구·광주·청주 등 전국 각 곳에서 모였다. 지난 3월부터 합숙을 하며 주 5일 동안 연습을 하고 있다. 오전은 배우들의 기술 훈련, 오후는 창작 논의 및 작품 연습, 그리고 저녁 시간은 요즘 '런 스루(run through)'로 리허설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잠시의 휴식 뒤 연습은 다시 저녁 식사 전까지 이어졌다. 저녁 식탁은 야외에 차려졌다. 식사는 당번조를 짜 돌아가며 준비한다고 했다. 배우들이 직접 텃밭에서 키운 채소들이 식탁에 올라왔다. 밑반찬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배우집에서 '보급투쟁'해왔다. 우습게도 "이들이 바로 게릴라들이네"라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기억'과 '낭만'...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체 게바라> 공연팀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향후 일정 등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천호영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연출 장소익씨와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왜 이곳, 휴대폰도 잘 터지지 않는 산골에까지 와서, 그것도 합숙하며 연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이 곳에 내려온 지 3년이 된다. 서울이나 도시에서 작업하게 되면 알게 모르게 상상력에서 도시문화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배우 자신들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밤에 별 보고, 달 보고, 개구리 소리 종일 듣고, 사냥꾼 쫓아 다녀보고, 그런 것들이 상상력에 영향을 줄 것이다. 텃밭도 직접 가꾸고 있다. 작품 중에 경작 장면이 있는데 땅도 한번 안 파보고 어떻게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 이번 작품을 준비하게 된 계기는?
"3, 4년 전 다른 작품으로 대만에 공연 갔을 때 홍콩 연극인 한 분이 체 게바라 얘기를 연극으로 만들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예순 정도 되시는 분인데 체 게바라의 광신도 수준으로 그 분 자신도 직접 게바라 공연을 했었다. 그래 고민하던 중 중국희곡 <체 게바라>를 접하게 됐다."

▲ 연기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연출자 장소익(선 이)씨와 각색자 임은혜씨.
ⓒ 오마이뉴스 천호영
연극 <체 게바라>의 원작자는 황지수씨. 그는 중국 베이징 사회과학원에서 발간하는 잡지 <사회과학>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베이징으로 건너가 황씨를 만나 "흔쾌히 응낙을 받았다". 다음으로 "평전으로만 아는 게바라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남미를 직접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돈이 없어 공연을 준비했다. 2년이 걸렸다. 마침내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공연과 워크숍을 하며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페루·볼리비아 쿠바 등 남미 6개국을 돌았다. 게바라가 안치된 곳, 박물관 등을 보고 문화운동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쿠바에서 게바라의 위치, 남미의 전반적인 운동에 대해 새롭게 느끼게 됐다."

그는 특히 그 가운데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르헨티나 5월 광장 어머니들을 직접 만나보고 느낀 건 '기억'이란 문제였다. 그들은 80년대 학살주범 가운데 딱 1명을 기소해 무기선고를 받게 했고, 우리가 갔을 때 또 1명을 기소한 상태였다. 30년 가량을 5월 광장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침묵시위를 해왔다. 아흔 되신 할머니가 목발을 짚고 여전히 도신다. 우리는 4ㆍ3도 잊고, 광주도 벌써 잊었고, 민주화운동은 거의 돈으로 정리가 되고 있지 않나. 남미 운동의 중심을 잡아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잊지 말자', 기억이었다."

그는 연극 <체 게바라>도 "사실 혁명 얘기라기보다는 혁명을 둘러싼 것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을 주제로 잡고 있다"고 밝혔다. '혁명'에 대해서도 "단지 정치사회적인 혁명이 아니라 좀더 포괄적인 인류 보편의 가치로서 혁명을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체 게바라가 꿈꾸었던 근원으로 돌아가는 혁명, 모든 존재를 품는 혁명, 부드러움에서 나오는 혁명, 하나의 씨앗이 죽어서 열매가 되기까지의 혁명…. 그리고 그가 남미에서 찾아낸 또 하나의 코드는 '낭만'이었다. 이번 연극에도 '낭만제의'란 이름을 붙였다.

"체 게바라는 게릴라전 한복판에서도 책을 읽고, 사진도 찍고 그랬다. 남미에서 느낀 것도 낭만이었다. 또 평소 관심 있던 우리 별신굿의 구성원리를 이번 작품에 적용했다. 단지 보여주는 게 아니라 관객들과 함께 술도 나누고 춤도 추며 놀려고 한다. 이번 작품은 체 게바라를 빌미로 벌이는 한판의 별신굿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럼 체 게바라의 삶이 오늘날 갖는 의미는?
"나로선, 게바라의 삶을 보면, 사람이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영감을 주는 것 같다."

삼바·탱고가 흐르는 별신굿... 쿠바는 광주이고 새만금이다

▲ 연극 <체 게바라>는 체 게바라의 정신을 나누는 한판의 별신굿이기도 하다.
ⓒ 오마이뉴스 천호영
저녁 연습은 8시가 넘어 시작됐다. 이미 땅거미는 짙게 깔렸고, 개구리 울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연극 <체 게바라>는 폭격으로 두 눈을 다친 '루아'라는 이름의 팔레스타인 소년이 자신을 체 게바라라 여기며 게바라의 혁명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루아'는 아랍어로 '이상'이라는 뜻. 각 장면마다 이상과 현실, 혁명과 반혁명, 그리고 기억과 망각이 대립한다.

제1막 그란마호의 출항. 무대 중앙에 욕조가 하나 놓여 있다. 아니 '그란마호'다. 거기에는 5월 광장 어머니들의 포스터와 남미의 정치 포스터들로 치장돼 있다. 배 밑바닥에는 '결사투쟁 승리의 그날까지- 포항지역건설노동조합'이란 포스터도 눈에 띈다.

루아와 남녀 지지자 2명이 배를 타고 노를 젓는다. '그란마호의 노래'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저 바다 건너면 만날 수 있을까 / 저 산을 넘으면 찾을 수 있을까 / 노 젓고 저었지 파도를 넘었어 / 걷고 또 기었지 어둠 속 산길 넘어 / 그렇게 시간의 파도를 넘어왔지.'

연극 <체 게바라>에선 많은 노래들이 불려진다. 보사노바·삼바·탱고 등 남미의 리듬이 우리의 민중음악ㆍ민속음악과 만난다. 특히 이번 공연에 맞춰 남미의 노래운동 '누에바 깐숀(Nueba Cancion)'의 음악을 우리식으로 재창조한 곡들도 새롭게 작곡했다.

▲ 연극 <체 게바라> 연습 장면
ⓒ 오마이뉴스 천호영
무대는 환상과 실재를 넘나든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그렇고, 배우들이 폐품을 재활용해 직접 만든 의상과 소품들도 판타지에 가깝다. 예를 들어 게바라가 혁명 전 남미를 여행할 때 탔던 오토바이 '포데로사'는 자전거 바퀴 한 짝과 깡통들, 그리고 못쓰는 카메라를 헤드라이트로 단 채 '로시난테'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배우의 연기와 함께 연극을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축인 그림자극도 환상적인 장면들을 연출한다. 그란마호가 맞는 격랑을 그림자 물결로 보여주고, 쿠바 혁명 이후 반동의 처형 장면이나 새 사회 건설 모습도 그림자로 비쳐진다.

또 중국작가의 원작에, 40년 전 게바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그때 쿠바의 상황이 오늘 우리의 현실로 이어진다. 게바라의 유언이 전태일의 유서와 겹쳐지고, 쿠바의 새 사회 건설 현장에서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가 불려지며, 새만금의 솟대가 등장하고, 80년 5월 광주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난다.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일까. 제2막까지 보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떴다.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한 배우가 대사로 던진 질문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날 소위 '똑똑하다'는 입들은 모두 이렇게 말합니다. 그란마호는 애초에 출항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오늘날 가장 '깨어있다'는 머리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같은 일은 전부 어리석고 분별없는 짓이라고. 그란마호는 그때 출항했어야 하는 걸까요, 아닐까요? 오늘날 게바라의 정신은 필요한 걸까요, 아닐까요?"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연극 <체 게바라>는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서울 여의나루 한강시민공원에서 첫 선을 보인다. 이후 대구 인천 등 전국순회공연을 거쳐, 11월부터 12월까지 쿠바 칠레 페루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등에서 남미 민중과 함께 체 게바라 굿판을 벌일 계획이다. 공연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공연 홈페이지(www.woodchicken.com/che)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태그:#체 게바라, #연극, #혁명, #장소익, #자계예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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