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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3일, 서안의 아침은 무덥고 습했다. 게다가 분지의 특성상 1년 중 쾌청한 날이 반도 채 안 된다더니 아침부터 뿌연 연무가 장난이 아니다. 어제 밤 호텔에 도착한 시간이 12시였지만 빡빡한 일정 때문에 아침 7시 40분부터 버스를 출발시켰다.

중국의 고도 서안, 옛 장안이다. 서안은 기원 전 1027년 주나라 도읍지로 시작해 진시황의 진나라, 유방의 한나라를 거쳐 수, 당까지 무려 1100년에 걸쳐 13개 왕조의 터전이 된 장구한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장안'이란 호칭은 한나라 때부터 시작해 당나라 때까지 불렸지만 명나라 주원장이 '서안'으로 개명했단다.

북경, 남경, 낙양, 개봉, 항주와 함께 중국의 6대 고도로 꼽히는 서안. 서안을 둘러 싼 진령산맥은 든든한 요새 역할을 해주어 외적의 침입을 어렵게 했고 드넓은 관중평야에서 소출되는 풍부한 곡식은 황하의 가장 큰 지류인 위하의 도움을 받아 물 걱정 없는 곡창지대를 만들어 주었다.

▲ 서안 성곽, 명대에 보수됐다는 성곽이 거의 완벽하다
ⓒ 조명자
완벽하게 보존된 서안 성을 지나 외곽 순환도로로 들어섰다. 아침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에 서 있거나 아니면 자전거 뒤에 아이를 태우고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고 있다. 길가 구멍가게 같은 좌판엔 아침부터 국수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

3순환도로까지 있다는데 우리는 지금 2순환도로를 타고 한무제 능으로 가고 있는 중이다. 한산한 시골길. 뻥 뚫린 도로 가 군데군데 수박 무더기와 토마토를 쌓아놓고 파는 농부들의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1시간을 달린 끝에 드디어 무릉 박물관에 도착했다. 한무제, 한나라(BC 202~AD220) 400여년 역사 중 가장 국력이 융성했던 시대의 황제다. 한무제 시대에 실크로드가 개척되었고, 우리 고조선 땅에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설이 있으며 통치이념으로 유교를 받아들인 강력한 통치자다.

박물관은 서안의 서북쪽 위하 북쪽 강가에 위치한 전한시대 능묘군 가운데 있었다. 전한의 11명 황제 중에 '문제'와 '선제'를 뺀 9명의 황제묘가 동서 50㎞ 내에 일직선으로 늘어서 있다는데 그 중에서도 '무제 능'이 가장 크단다.

▲ 곽거병 묘 봉분 꼭대기에 정자를 지은 중국, 엽기적이다
ⓒ 조명자
박물관 입구 정면 산꼭대기에 우뚝 선 정자. 그 작은 산이 바로 무제가 그토록 아꼈던 장군 '곽거병'의 묘란다. 봉분 꼭대기에 정자를 세우는 중국 사람들. 우리 시각으론 좀체 이해가 안 되는 엽기적인 행동이지만 어쨌든 곽거병 묘 정자부터 올라가기로 했다.

곽거병을 중앙으로 반경 500여 미터 이내에 커다란 무덤 몇 기가 보였다. 오른 쪽으로 보이는 거대한 봉분은 바로 이 능묘군의 실세인 '한무제 능'. 아예 가르마를 탄 듯 봉분 위로 올라가는 비탈길에 등산로가 쫙 그어져 있었다. 뒤 쪽에는 그 유명한 '위청' 묘. 그리고 왼쪽에 비교적 작은 묘는 어느 장군의 것이란다.

중국엔 이렇게 황제 묘 주변에 고위 문무 관리를 매장하는 배장 묘 관습이 있어 무릉 주변만 해도 곽거병, 위청, 김일제 등 모두 12기의 배장 묘가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스무 살에 장군으로 발탁 돼 흉노족 토벌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는 곽거병장군은 한무제가 자신의 묘 가장 가까이에 안장하라는 특명을 내렸을 정도로 아끼는 장수였다.

▲ 무릉군에서 출토된 와소. 콧구멍 때문에 더 귀엽게 보인다
ⓒ 조명자
곽거병 묘 앞 뜰에 전시된 출토 유물들은 대부분 석상들이었다. 힘차게 뛰어 일어나는 말 석상도 있었고, 뻥 뚫린 콧구멍이 너무 귀여운 와소 상도 있었다. 누워있는 코끼리 상, 멧돼지 형상의 와저 그리고 양을 먹고 있는 괴수의 상은 국보로 지정됐단다.

박물관에는 소박하나마 몇 개의 국보도 있었다. 코뿔소 모양의 술병과 신선이 노니는 모습을 조각한 벽산 향로는 국보로 지정되었고 주칠 걸상과 사지를 움직이는 나체 도용도 있었다. 특히 한나라는 벽화와 기와가, 진나라는 벽돌이 유명하다는데 한나라 벽화 중에는 현무와 주작이 꿈틀거리는 고구려 사신도 벽화의 원형이 있단다.

▲ 한무제 능, 작은 동산이다
ⓒ 조명자
▲ 무제 능 아래 여기저기 피어있는 나팔꽃, 우리 메꽃보다 덜 예쁘다
ⓒ 조명자
박물관과 곽거병 묘를 돌아 나와 한무제 능으로 향했다. 곽거병 묘에서 불과 300여 미터 떨어진 무제 능은 마치 작은 동산 같았다.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무제는 재위 기간만도 54년에 달한다.

전한 시대의 묘제는 황제가 즉위한 다음 해부터 황제 묘를 조성하기 시작한다니까 무릉의 축조 기간은 무려 53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다. 소금과 철을 국가 전매제로 묶고, 균수 평준법, 화폐(오수전) 주조권을 장악해 국가경제를 튼튼히 만든 무제는 그 유명한 사가 '사마천'을 궁형에 처할 만큼 실정도 많았다.

위청과 곽거병 등의 명장과 삼천갑자 '동방삭' 같은 문관을 등용해 현치를 이끌었던 반면 통치 기간 내내 흉노족과의 장기간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실 흉노족과의 일전은 선대로부터 당해 온 치욕을 되갚는 일이었다.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창건한 한 고조 유방은 즉위 후 그 여세를 몰아 흉노족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강력한 기마민족이었던 흉노족에 번번이 패해 마침내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만다.

매년 조공을 바치는 것은 물론 한나라 공주를 흉노 왕 선우에게 시집 보낸다는 불평등 계약은 말이 화친이지 식민지나 진배없는 굴욕적인 항복 선언이었다. 그때부터 흉노족에게 바치기 시작한 조공은 이후 300년 동안 이어진다.

한무제(기원전 156~87), 그는 한나라를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시킨 경제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문제와 아버지 양제의 탄탄한 업적을 이어받은 무제는 흉노족에게 당한 300년의 치욕을 되갚겠다고 133년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50년을 끈 이 전쟁도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민족인 흉노족의 기세는 결국 꺾지 못한다.

무제는 흉노족과의 전쟁이 얼마나 지긋지긋했던지 "앞으로는 흉노족과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천하를 호령한 영웅호걸이나 이름 없는 범부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가면 그게 그거다.

▲ 한무제 능 꼭대기. 평평한 봉분 위가 밭 갈게 생겼다
ⓒ 조명자
▲ 무릉에서 바라 본 들판. 수확 끝난 밀밭이 아련하다
ⓒ 조명자
봉분의 규모가 커 흡사 작은 동산 같은 무제 능이지만 그 속에 진토 된 백골이야 범부와 다를 바 있으리. 무제 능 봉분 꼭대기는 마치 평평한 묵정 밭 같았다. 무수한 사람들의 발밑 아래 이제는 맨살이 드러난 봉분 위는 좌우 종횡으로 어지럽게 오솔길이 나있는 모습이었다.

아이 둘을 데려와 능 아래 벌판을 바라보던 중국 여인. 그 엄마는 두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해줬을까? 봉분 아래 드넓은 평야에는 막 추수를 끝낸 밀밭이 고랑채로 엎어져 있었다. 아련한 연무 속에 어느 밭에서 태우는지 밀짚 태우는 냄새가 코끝을 간지른다.

오전10시 25분, 이곳에서 30분 쯤 가면 당 현종의 애첩 '양귀비 묘'가 있다고 한다. 황제의 눈을 멀게 하고 국정을 어지럽힌 천하의 요부. 중국 4대 미인 중의 하나. 양귀비, 양옥환을 만나러 가는 길은 햇살이 뜨거웠다.

덧붙이는 글 | 지난 6월 2일부터 10일까지 15년째 이어지는 '불교 공부' 모임에서 서안 답사를 다녀 왔습니다. 1100년이 넘는 세월 중국의 여러 왕조의 수도로, 실크로드의 출발지이면서 중국 불교의 성지로 자리 잡은 서안. 서안 사찰 곳곳엔 혜초, 의상 등 우리 승려들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태그:#서안, #무릉 박물관, #한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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