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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소재 청량산에는 청량사에서 200 미터쯤 떨어진 곳에 오산당(吾山堂)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식 명칭은 청량정사(淸凉精舍)라는 고가이다. 오산당이라는 당호는, ‘내 산의 집’이라는 뜻이니, 퇴계 이황 선생이 청량산을 사랑하여 학문과 소요를 즐기며 시를 쓰던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측근들이 지은 집이라고 한다.

그 오산당 기둥에는 ‘도산서원 거경대학’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그리고 한 달에 하루는 열서너 명의 선비들의 책 읽는 소리가 낭랑히 들린다. 도대체 거경대학이란 무엇인가?

청량산 오산당에서 수업 중인 모습
 청량산 오산당에서 수업 중인 모습
ⓒ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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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활발한 유학의 재발견과 우리 것 찾기 움직임
 

최근 사회 일각에서는 서구 물질문명의 폐해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동양적, 전통적 정신문화의 재건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다. 그 때문인지, 실용성이 없는 형식과 공론(空論)에 치우친 것으로 비판 받아오던 유교를 재인식 하자는 바람도 불고 있다.

그러한 정신문화 재건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교육이나 문화 콘텐츠가 국가적 차원에서 개발 운영되고 있지는 못하다. 다만, 전국 각지의 향교나 서원 등을 중심으로 선비 문화 체험이나 유학 관련 교육이 실시되고 있거나, 일부 민간단체나 개인이 영리성도 가미하여 한자 한문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정도인 것 같다.

경북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에서도 선비문화 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퇴계를 향사하는 도산서원은 경상북도의 행정적 지원을 받아 서원과는 별도로 선비 문화 체험과 수련을 위해 선비문화수련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2002년에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교원, 학생, 공무원들에 대한 연수를 실시해 오고 있다. 

도산서원에 걸린 거경 대학 현판
 도산서원에 걸린 거경 대학 현판
ⓒ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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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경대학은  배우는 곳이 아닌 심성(心性) 수련 과정

최근에 그 선비문화수련원과는 별도로 역시 도산서원 산하에 거경대학(居敬大學)이라는 학문과 수양 프로그램이 큰 소문 없이 운영되고 있어서 주목된다. 대학 이름인 ‘거경’은, 중용에 나오는 <거경(居敬)>에서 따온 말로, 구체적으로는 퇴계의 <경(敬)> 사상을 배워서 실천하자는 것이 목표이다.

선비문화수련원이, 학생에 대한 예절 교육이나 유적 답사 등 선비 문화 체험, 그리고 방학을 이용한 2박 3일 과정에서 교원 등을 상대로 한 유학 맛보기 과정이라면 거경대학은 그 심화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거경대학은 대학이라는 명칭으로 부르지만, 학점도 학위도 없다. 특별히 가르치는 교수가 있지도 않다. 어떤 인가를 받거나 체계도 없다. 가끔 인근 유학자들을 초빙하여 강의를 듣기도 하지만, 학생들 자신이 경전을 함께 공부하고 독송하며 퇴계 선생의 생활을 실천하기 위한 수련에 중점을 둔다. 누구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부 장소도, 숙소를 겸하고 있는 열화재(悅和齋)뿐만 아니라 안동, 봉화 일대에 산재하고 있는 24개 정자나 고택이 모두 강의실이다. 매 회차 혹은 매일 오전 오후 마다 수시로 옮겨 다니면서 강의가 이루어진다. 때로는 퇴계 선생이 생전에 집에서 청량산까지 걷던 길을 걸어보면서 낙동강변의 풍광도 쐬고 곳곳에 있는 시비(詩碑)의 한시를 감상하기도 한다.

경전에 대한 공부도 물론 중요하지만 퇴계의 일상생활을 함께 익히고 실습하는 것을 더 중요시한다. 식사를 할 때의 묵언정식(黙言淨食), 걷기 명상, 활인심방(活人心方)을 수련하고 실천한다.

일단 입교하면 도산서원의 퇴계 사당에 대한 알묘(謁廟)부터 시작하는데, 가장 먼저 실시하게 되는 과정이 <경재잠(敬齋箴)>과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의 독송이다. 퇴계가 선조대왕에게 올린 그림 교육서인 <성학십도(聖學十圖)> 중에 있는 이 두 편은, 일상생활에서 갖출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대한 잠언이므로 특히 강조된다.

도산서원 내 퇴계 사당을 알묘한 후
 도산서원 내 퇴계 사당을 알묘한 후
ⓒ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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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 불교의 경전까지 포함한 경전의 독송

거경대학에서는, 4년간 스물네 번에 걸친 수련과정 동안 소학, 사서삼경, 퇴계학, 금강경, 도덕경 등을 강독하기로 되어 있다. 이 과정만을 보아도 얼른 알 수 있는 것이,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유학 과목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의 경전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퇴계 선생의 학문 곳곳에 스며있는, 유학에 치우치지 않는 전인적 사상을 공부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 번 모이는데 3박 4일의 기간 동안 그 많은 경전을 다 공부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분량이 많은 경전은 중요한 대목과 핵심 사상을 발췌하여 공부하는데, 방법은 모두가 함께 큰 소리로 독송을 한다. 이 과정에서 익힌 방법들이 귀가하여서도 일단의 공부 습관을 형성하게 된다는 점을 본 기자도 직접 체험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과목은 <활인심방>이다. 옛 선비들이, 테니스도 골프도 조깅도 하지 않으면서 건강을 유지한 비결의 해답을 이 활인심방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거경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실시하는 활인심방 수련이 하루의 정신을 맑게 한다고 입을 모은다. 며칠간에 그 활인심방을 모두 터득하기는 어렵겠지만 거경대학 과정이 그 요령만은 익힐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열화재는 강의실과 활인심방 수련장으로 쓰인다.
 열화재는 강의실과 활인심방 수련장으로 쓰인다.
ⓒ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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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의 후손인 중산 이동한 선생이 주도

현재 이 거경대학을 이끄는 사람은, 퇴계의 15대손인 중산(中山) 이동한(李東翰) 선생이다. 전 충북대 교수로 재직하고 지금은 명예 교수로 있는 그는, 직계 조상으로서의 퇴계뿐만 아니라, 사상적 지주로서의 퇴계 선생을 흠모한다. 그래서 학문적 연구뿐만 아니라 그의 언행과 사상을 생활에서 직접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가 퇴계에 관하여 쓴 책도 꽤 있다. 국왕을 가르친 잠명(箴銘)을 다룬 <임금님은 제발 조용히 하시요>, 퇴계의 언행과 좌우명을 풀이한 <현대를 살아가는 지혜>, <생활명상> 등의 저서에서는, 학문적 퇴계 연구는 아니지만 일반인들이 퇴계에게 좀 더 다가가기 쉽도록 애쓴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퇴계 선생의 건강법인 <활인심방>을 터득하여 20년 이상 몸소 수련해 오고 있다. 아직까지 수십 년 동안 병원에 가본 적이 없다는 그는, 그 비결이 곧 활인심방의 수련 덕분이라고 강조한다.

수업 장소의 하나인 고계정에서 수업하는 장면
 수업 장소의 하나인 고계정에서 수업하는 장면
ⓒ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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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여섯 번, 매회 3-4일씩 4년간의 과정

거경대학은 일 년에 여섯 차례(4, 5, 6, 9, 10, 11월) 개학하고 4년에 전 과정을 마치게 된다. 본래 매월 둘째 주말이 낀 3박 4일 동안 운영해 왔는데 가끔 2박 3일의 과정으로 하루 단축하여 운영되기도 한다.

거경대학의 현판은 곳곳에 있지만, 숙소와 본 강의실은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의 도산서원 근처에 있는 열화재(悅和齋)이다. 매 끼 식사에는 퇴계종택에서 대대로 전수되어 내려오는 몇 가지 메뉴가 곁들여진다.

대학 운영에 드는 비용은 무료이거나, 외부 강사 초빙 등 경우에 따라 3만 원 정도를 받는다고 한다. 3-4일간의 식비에도 못 미칠 그 돈으로도 운영될 수 있는 것은, 도산서원의 예산으로 도움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이동한씨의 열정도 한 몫을 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만 보면 매회 서울, 인천, 부산 등 지역을 불문하고 12~15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참여자는 현직, 퇴직 중고교 교장들을 비롯하여, 대학 교수, 퇴직 공무원 등 다양한 계층이다.

인원에 대해서, 이동한 교수는 15명 내외가 가장 적절하다고 한다. 다만, 아직 아무런 체계도 갖추어져 있지 않고 알려져 있지도 않은 점에 대해 그는 단 한 사람이라도 좋다고 하면서 굳이 규모를 크게 하는 것을 반대한다. 그는 기자에게 말한다.

“퇴계 선생의 학문과 생활을 익히고 실천하는 길이라면 내 돈을 들여서라도 사람들에게 이런 기회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기자가 보기에, 이 거경대학이 어느 정도의 규모와 체계를 갖추지 않는 한, 열의 있는 한 개인의 사숙(私塾)을 벗어나지는 못 할 것 같다. 단순한 견학 식의 유학이나 선비 교육이 아니라 좀 심도 있는, 그야말로 과거에 <소학>을 다 떼고 진급하던 <대학>의 체계를 갖춘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다.  (연락처 : 019-9336-3303 이동한 )


태그:#도산서원, #거경대학, #이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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