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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이른 아침, 부일이 형님은 논가에 나와 있었다. 수확이 거의 끝난 농촌의 한가로운 모습.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는 들녘에선 두서너 논의 벼들만 농부의 마지막 손길을 기다리며 머리를 잔뜩 숙이고 있다.


다섯 가족이 400평 논에 봄부터 모를 심고 피를 뽑는 등 함께 지은 유기농 벼를 수확하는 날이다. 함께 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부일 형이 지어가는 농사를 가끔 와서 거들고 체험하는 수준이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모인 날 오후에는 가족단합대회를 하고 그 놀이는 다음날까지 가기도 했다.

 

그렇게 건성으로 참여한 농사지만 마지막 피(잡초) 뽑는 날은 일주일내내 몸이 쑤시기도 했다. 억지로 따라 온 아이들은 차츰 벼농사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지난 태풍 때는 “아빠, 우리 논에 벼는 무사할까?”라고 어른도 미처 못 한 걱정을 하기도 했다.

 

다섯 가족, 유기농 벼 수확하던 날


연장을 내리고 짚토매를 준비한 오전 10시쯤, 아이들을 앞세운 다섯 가족이 모였다. 논가에 놓인 낫을 들고 벌써 한 아버지와 2~3명의 아이들이 논으로 들어간다.

 

“안 돼. 너희들, 내 시범을 보고…. 안 된다니까! 너희들 그러다가 다리 벤다.” 


잠시 소란이 있었고 부일 형이 오늘 농사일을 설명한다.

 

“논 네 귀퉁이만 손으로 벨 것인데 자, 낫을 잡고 오른발은 앞으로 왼발은 뒤로, 벼는 30cm쯤 잡고, 조심스럽게 벤 다음 가지런히 뒤에다 놓습니다.”

 

부일 형의 설명이 끝나기가 바쁘게 아이들은 낫을 들고 달려들고, 어른들은 말리며 다시 시범을 보인다.

 

“아빠, 안 비어져.”

“야, 너 그렇게 서면 다리 빈다. 그리고 낫의 각도를 약간 기울여서 잡아당겨.”

“아, 된다.”

 

지켜보던 아이들도 다른 귀퉁이 자리를 찾아 달려가고, 차츰 몸에 익은 아이들은 더 많이 경쟁하듯 벼를 베어나간다. 부일 형은 어른들에게 짚토매를 나눠주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제지하며 자신들이 벤 벼를 나란히 정리해 묶어보게 한다. 처음에는 서툴지만 이내 묶인 볏단을 논둑을 달리며 나르기 시작한다.


농로에 포장을 깔고 홀태 양옆으로 볏단을 쌓았다.

 

“옛날에 조상들은 이걸로 털었어요. 자, 벼를 한 움큼 잡고 이 사이에 끼고 쭉 당기면 됩니다.”

 

나락이 바닥에 떨어지자, 환호성을 지르며 아이들은 서로 해보려고 달려든다.

 

“세게 빨리 당기려 하지 말고, 천천히 당겨. 모가지채 떨어져 버리니까.”

 

어른들이 거든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해본 다음, 부일 형은 탈곡기를 옮겨왔다.

 

“그 다음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발로 밟아 구르는 철사통 사이에 나락을 털었습니다.”

 

부일 형이 발판을 밟자 탈곡기는 대롱대롱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그 사이로 한 움큼씩 벼를 올려놓자 순식간에 나락이 튀며 떨어졌다. 아이들은 발을 구르랴 손으로 벼를 잡고 놀리랴 서툴지만, 이것에도 금세 재미를 붙여 신이 난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리듬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모두 해본 다음 다시 자기 차례가 올 때를 기다리고, 어른들까지 돌아가면서 탈곡에 열중했다.

 

체험으로 농부의 소중함 알게 된 아이들


어느새 볏단이 바닥날 때쯤, 동네 콤바인이 논으로 들어와 서 있는 나락을 순식간에 베어간다. 아이들은 이제 콤바인에 정신을 팔고 어른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나락을 까불렀다. 텅 빈 논을 아이들이 달리는 동안 어른들은 농로에 점심상을 준비했다. 들판 사이 둘러앉아 꿀맛의 점심을 먹으며, 어른들도 아이들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운다.

 

“쌀은 어떻게 찧으면 좋겠어요? 난 현미로 하고 싶은데….”

 

한 엄마가 말하자, “80kg를 다 현미로?” 한동안 참석하지 않은 가족들의 의견을 묻고 집에 연락을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귀한 유기농 쌀을 이왕이면 현미로 찧고 싶어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죽은 쌀을 먹을 것이냐 산 쌀을 먹을 것이냐.” 모두 산 쌀을 먹고 싶어 했지만 아직 현미밥에 길들지 못해 또 보관이 어려운 현미를 한꺼번에 찧는 건 무리여서, 백미와 현미를 절반씩 원한 가족도 있었다.

 

처음 유기농벼농사 체험을 꾸릴 때, 수확한 쌀을 다섯 가족이 한 가마니씩 가져가기로 했다. 물론 농부인 부일 형에게 한 가마당 25만원을 지불하기로 했다. 농사를 함께 짓는다고 했지만, 체험을 진행하는 부일 형에게는 많은 번거로움을 지우는 일이었는데, 평소 부일 형의 유기농 쌀값만 지불하고 한해 농사체험을 한 것이다.


이 체험이 없었다면 컴퓨터와 텔레비전에 매달려 휴일을 보낼 아이들인데, 저렇게 기뻐하고 자신감이 붙었다. 어른들도 어렵게만 느꼈던 유기농 벼농사 과정을 곁눈으로나마 배울 수 있었다. 함께 한 가족들은 서로 믿음이 깊어졌다. 어린 모가 벼로 벼에서 나락으로, 그 쌀이 밥이 되고 사람 생명이 되는 과정과 농부라는 역할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벌써 아이들은 말라가는 물웅덩이에서 피라미들을 발견하고 몰려갔다. 물이 모두 마르면 저 고기들은 어디로 갈까? 갈수록 노인들만 남고 천대받는 농촌의 모습과 닮았다.

 

방치된 임진왜란 유적지와 골프장 건설


어른들은 오후에는 뭘 할지 상의한다. “직장인들 휴일이 늘어나긴 했어도 왜 이리 바쁜지 모르겠다”고 말하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모의를 꾸미고 있었다. 우리에게 소중함을 가르쳐준 이 땅에 대해 알아보기로, 고흥반도 영남면 능정마을 주변 산천을 둘러보기로 했다.

 

부일형이 안내하는 대로 바닷가를 지나 흙길을 따라 산 중턱에 올랐다. 바닷가에서 산쪽으로 길다랗게 쌓여진 돌무더기를 가르키며, “여기가 임진왜란 때 쌓은 돌성 ‘사도 만리성’입니다”라고 말했다.

 

“아, 사도진성?”

“아니요. 사도진성은 저 아래 사도마을 안에 있었고, 이곳은 더 넓게 방어선을 구축한 사도만리성이에요.”

“실제로 만 리나 되나요?”

“그렇지는 않지만 이 산 넘어서 바닷가를 지나 저 산 너머까지 있어요.”

 

그렇게 긴 성터인데 안내문 하나 없었다.

 

“보존은 잘 되어 있나요?”

“아니오. 어렸을 때 보면 바닷가쪽도 돌성이 쌓여 있었는데, 그 돌들이 허물어지고 밭둑으로 쓰이고, 그냥 내버려진 상태지요.”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아이들은 벌써 무너진 돌성을 따라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어린 아이 한 명은 아버지에게 임진왜란이 뭐냐고 묻고, 아버지는 그 고난의 전쟁을 설명하느라 애를 썼다.

 

“참 그런데 골프장 예정지는 어디인가요?”

“글쎄 저쪽 산 일대라고 하던데, 어째 정보가 시원하게 공개 안 된 상태예요. 지금 마을 청년들이 반대에 나서고 있어요.”

“군수가 고흥에다 골프장을 세 갠가 다섯 갠가 유치한다면서요?”

“주민들을 전부 공짜로 치게 하려는가 보죠?”

“나도 골프 잘 칠 수 있는데, 회원권이 수천만원 한다는데 진짜 공짜?”


무너진 채 방치된 임진왜란 문화유적지와 군수가 밀어붙이고 있다는 골프장 이야기가 겹치면서 한동안 어른들의 자조섞인 말들이 오간다. 바다에 떠 있는 섬들 이름을 물어 보고 단풍든 나무 이름도 물어본다. 그러다 어른들은 멀리까지 간 아이들을 불러 차에 태웠다.

 

외롭게 펄럭이던 농촌의 절규

 

하산하는 길에 만난 바닷가 갯벌은 평화롭다. 고갯길을 돌자 바닷가 어촌마을엔 올해 마지막인 듯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앉는다. 다섯 가족들이 한 해 농사를 지었던 논을 지나고 부일 형이 사는 능정 동네도 지나 마을입구 고개에서 차들이 멈췄다.

 

돌아보니 그 고개마루에는 플래카드가 외롭게 펄럭이고 있었다. 시퍼런 하늘을 배경으로 “ 청정해역에 골프장이 웬말이냐!! 갯벌이 오염된다!! 결사반대!!” 아무리 경쟁력을 잃어가는 농사지만 아름다운 농촌의 자연환경만은 절대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절규 같았다.

 

바쁘다던 어른들은 무엇이 또 그리 아쉬운지 남은 오후를 어떻게 보낼지 모의를 시작한다. 아이들도 삼삼오오 차에서 내려 자기들끼리 뭉치며 “빨리 가요!” 외친다.

 

“어디를?”

“아무 데나요!” 


태그:#벼수확, #유기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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