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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니, 다른 분들이 조언해 주신 말들이 생각납니다. 우리말을 아껴 쓰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는 말, 책이란 모름지기 생각을 담은 글이므로 무작정 칭찬만 하거나 무작정 거부하기만 할 게 아니라는 말, 자기 입맛에 맞는 책만 골라 읽지는 않는가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 등등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 말. 말. 갖가지 귀한 말을 여기에 다시 첫 마디에 담으면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박제가 : 아는 만큼 눈이 뜨이고 실천하는 만큼 삶이 넓어지리라


위 말은 박제가(朴齊家)가 실제로 한 말은 아니고, 이 책을 읽고 나서 박제가(朴齊家)가 했을 법하다고 여겨 짐짓 지어낸 말입니다. 지어냈다고는 하나, 막상 <북학의>를 읽고 나면 옛 책이라는 것 말고는 굳이 거칠만한 게 없다 하실 겁니다.

 

조그만 책을 놓고 일일이 다 알리는 게 무조건 좋은 게 아닐뿐더러 이런 책에서 정작 배울 만한 것은 지은이가 뜻했던 바이므로,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얘기는 ‘안다’와 ‘실천한다’는 그 사이가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먼가 하는 것입니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조선 후기에 살았던 실학자였습니다. 박제가는 중국 마지막 왕조였던 청나라에 사신을 따라가서 그곳 문물을 두루 살펴보았고 청나라 곳곳에서 배울 게 많다고 느꼈습니다. 청나라를 오랑캐 무리가 세운 나라로 낮게 보고 무시하는 조선 지식층에게 다른 시각을 제시한 책 중 하나가 바로 <북학의>입니다(참조. 맨 아래 덧붙인 글).

 

옛 책이다 보니 원본은 당연히 한문으로 되어 있고 제가 읽은 책은 현대 한국어로 번역한 책일 뿐 아니라 본문 내용을 줄여서 낸 책입니다. 그렇다 보니, 안 그래도 어려울 옛 책인 <북학의>를 전부 소개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한 일이고, 앞서 얘기한 것처럼, 정작 중요한 것은 <북학의>에 담긴 박제가 마음을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책에 대한 곁가지 이야기는 이 정도만 하고 <북학의>에 담긴 ‘쓸 만한 지식’들을 찾아보겠습니다.

 

<북학의>에는 박제가가 청나라에 가서 본 것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북학의>는 수레, 배, 벽돌, 말, 농사법 등등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문제들뿐 아니라 과거(科擧)처럼 국가 운영에 관한 얘기도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박제가는 당시 조선사회가 청나라 문물에서 배웠으면 하는 것이라면 최대한 자세히 기록하였고 이를 조선사회에 적용하려고 했습니다. 그 기록이 바로 <북학의>로 태어난 것이죠.

 

사실 <북학의> 내용을 조목조목 다 얘기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하나하나 자세하게 얘기하는 게 더 좋을 때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 이 책은, 원문을 줄인 축약본이면서도 얇은 책이라 무시해서도 아니며, 다만 지은이 맘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박제가가 당시 청나라에서 본 문물을 보고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기술시대, 지식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시대적 필요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려고 했던 이들이 지닌 마음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세한 책 내용은 직접 읽어보시기를 정중히 부탁합니다.

 

배우려는 마음만 있다면 높고 낮음을 따질런가


<북학의>는 재밌게도 박제가와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 <북학의>를 읽고 일종의 추천사처럼 써 준 글도 같이 실려 있습니다. 이 중,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은 <북학의>를 읽고 써 준 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학문하는 길에는 방법이 따로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 가는 사람을 잡고서라도 물어 보는 것이 좋다. 비록 종이라 할지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많이 알면 그에게서 배우는 것이 도리이다.” (<북학의>, ‘서문’ 중 박지원 글, 14쪽)

 

박제가도 똑같은 생각을 했기에 <북학의>를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박제가는 <북학의>를 곧바로 조선사회에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죠, 조선사회 지식인들 눈에 청나라는 명나라를 계승할 자격이 없는 오랑캐였을 텐데 박제가가 그런 나라에 가서 기록한 책을 적극 권장할 수는 없었겠죠.

 

그런데 박지원도 말했듯이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굳이 “비록 종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낮은 자세로 다가가 묻고 배우는 게 참된 지식인이 아니겠는가라고 되물었습니다. 저는 이 책 <북학의>를 읽으며 책 내용 자체보다도 그런 마음을 기억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게 제 뜻이고 박제가 뜻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박제가는 ‘청나라를 보는 눈을 바꾸어라, 세상을 보는 눈을 조금만 바꾸어 보라, 그러면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얻으리라’고 말하고 싶었으리라고 여깁니다.

 

중국이 조선과 달리 돌보다는 벽돌로 성을 세우는 습관을 가진 것을 보고 박제가는 이를 적극 추천합니다. 조선 성곽은 대개 산과 같은 자연지형을 살리면서 꼭 필요한 부분만 성으로 만들되 돌로 쌓아 만들었기 때문에 조선 지형에 맞는 방식인지는 모르나 벽돌을 쓰면 더 효과적으로 성을 쌓고 다양한 모양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게 박제가 생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박제가는 벽돌은 “크게도 작게도 마음대로 만들 수 있”(같은 책, ‘벽돌’ 53쪽)어 만들기도 수월하고 크기도 똑같아 사용하기도 편리하고 회를 발라 잘 붙이면 강력하고 빈틈없는 집, 성을 지을 수 있어 매우 좋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선사회에서 그리 널리 사용하지 않은 방법을 선뜻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이 말하길, 조선에서는 벽돌을 사용하는 예가 많지 않으니 그 이유 때문에라도 굳이 나라가 나서서 벽돌 사용을 권장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 박제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또 말하기를 ”사사로이 벽돌을 만들면 비록 나라에서 이용하지는 않더라도 자기 집만은 쓸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나 그것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이 살아가는 데 소용되는 물건은 반드시 서로 도와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라 벽돌이 없는데 자기 혼자 만들려고 하면 굽는 가마도 자기가 만들어야 하고, … (중략) …, 온간 만드는 일도 역시 내가 해야 할 것이므로 비록 벽돌을 만든다 해도 이익되는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말이다.” (같은 책, ‘벽돌’ 56쪽)

 

박제가는 온 나라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혼자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면 결코 실제적인 이익을 볼 수 없다고 맞받아쳤습니다. 누구 생각이 맞고 누구 생각이 틀리고를 떠나, 배울만한 것이라면 기꺼이 배우고 적용하길 원했던 박제가 마음만큼은 인정하고 싶습니다.

 

필요한 인재를 뽑을 수 있는 꼭 필요한 제도를 만들라


자신이 직접 보고 적은 수많은 중국 문물 이야기 중 우리 시대 ‘뜨거운 감자’ 중 한 가지인 취업 문제와 관련된 얘기를 한 가지 더 하겠습니다. 바로 과거(科擧)에 관한 얘기입니다.

 

박제가는 '과거(科擧)'란 필요한 사람을 뽑는 국가 중대사로서 “문장(文章)으로써 사람을 시험하고 뽑아 그 사람의 문장을 이용하는 것은, 활쏘기로써 사람을 뽑아 그 사람의 활 솜씨를 이용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같은 책, ‘과거론(科擧論)’, 145쪽)고 말하면서 과거제(科擧制)에 대한 실용적 의견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인재 등용 제도도 실용적인 방법과 실용적인 목적에 따라 새로 고칠 것을 주문했는데, 당시 조선 과거제가 지닌 문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과거에는 시체문장(時體文章)으로서 사람을 시험하는데 그런 문장으로는 위로 관각(館閣)에 임용되어 자문(咨文)에 대비할 수 없으며 아래로는 사실을 기록하고 정서(情緖)를 펴지도 못한다. 더벅머리 때부터 배워서 머리카락이 희어졌을 때에 비로소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합격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모두 버리게 되어, 평생의 정력(精力)이 이미 다 쇠하였고 그러니 자연 나라에서도 쓸모가 없다.” (같은 책, ‘과거론(科擧論)’, 146쪽)

 

조선 과거제를 비판한 그는 조선 과거제에서 고쳐야 할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지적합니다.

 

“그런즉 지금 당장 고쳐야 할 것을 말한다면 과거보다 먼저 할 것이 없고, 과거제도를 고치려면 중국 제도를 배우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이 없다. 첫째는 문체(文體)를 보아야 할 것이고, 둘째는 주관하는 고시관(考試官)이 어떤 문제를 내느냐 하는 것이며, 셋째는 과장(科場)을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잠그는 것이다.” (같은 책, ‘과거론(科擧論)’, 150쪽)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박제가는 왜 조선 과거제를 비판했을까요? 당시 조선 과거제에서 어떤 폐단을 보았기에 그랬을까요? 정작 이 질문을 다시 해야겠습니다.

 

“도대체 당당한 선비를 뽑는 것이 도리어 제비 뽑는 재수만도 못하니, 사람을 뽑는다는 방법을 과연 믿을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상황에 더구나 문벌(門閥)이다 당파(黨派)다 하여 그 연고로 덕을 보기도 하고 잘못되기도 한다. 요행으로 이런 어려운 고비를 면하고 제때에 등용된 자는 또한 아주 교묘한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책, ‘과거론(科擧論)’, 147쪽)

 

위 글을 보니 박제가가 왜 조선 과거제를 비판했는지 알 수 있겠죠? 지금도 늘 이런 일이 있습니다만 엉뚱한 사람이 ‘낙하산’ 방식과 같은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뽑히는 일이 시대를 막론하고 늘 있던 일이었음을 여기서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적잖은 얘기를 했습니다만, 박제가는 우리에게 한 마디로 ‘배우려면 낮은 자세를 가져라’, ‘배울 만한 것이라면 기꺼이 배우기를 자청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누군들 그걸 모르겠습니까만, 다른 이에게 그것도 온 나라가 무시하는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박제가는 은연중 지적하고 스스로 그 옥쇄를 깨버리려 했습니다.

 

<북학의>를 읽으며 정작 머리에 남는 것이라곤 책 내용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말없는 충고였습니다. 그 마음을 담아 이 책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북학의> 저술 배경과 의도본문 9쪽(‘이 책을 읽는 분에게’/옮긴이)

“<북학의>는 박제가가 진주사(陳奏使)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가 몇 개월간 머무르면서 느낀 바를 청나라와 조선 사회의 차이점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중국의 것을 거울삼아 우리나라의 모순된 형식을 개혁해야 한다는 자신의 논리를 <내외편(內外篇)>으로 정리하여 만든 책이다. … 그러다가 정조 22년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綸音)이 내려지자 이때를 기해서 상소(上疏) 형식으로 바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북학의>의 <내외편>과 상소한 <진북학의소(進北學議疏)>와는 그 형식과 내용이 다르다. 왜냐하면 <진북학의소>는 주변 인물들과 상의하여 보다 합리적인 내용으로 재편하여 올린데다가, 내외편 분량의 삼분의 일가량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전체적인 대략의 의도는 알 수 있으나 박제가 자신의 전반적인 의도를 이해하는 데에는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덧붙이는 글 | 알림
1. 공지사항
* 제가 본 책은 1995년판으로, 겉그림 사진은 이후 2002년판에 사용된 겉그림입니다. 새 책과 본문 위치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본 기사에 사용한 인용문은 쪽수뿐 아니라 어느 항목에 위치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같이 알려드렸습니다.

2. <북학의> 박제가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북학의 - 제2판

박제가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2002)


태그:#북학의, #박제가,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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