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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

 

 

마애대불을 보고 200여m 정도 가파른 길에 올라서면 삼릉골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에 이른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금오산 정상까지 300m라고 쓰여 있다. 이제 5분 정도면 금오산 정상에 이르게 된다. 약수골 입구에서 금오산 정상까지 한 시간 반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다. 이 정도면 산행이 아니고 정말 산책과 답사이다. 정상에 올라보니 부모 손을 잡고 올라온 대여섯 살짜리 아이들도 눈에 띈다.


금오산 정상(468m)에는 경주 일요산악회에서 2004년 4월 25일에 세운 표지석이 서 있고, 다른 한쪽에는 건설부에서 만든 삼각점이 박혀 있다. 표지석의 금오산(金鰲山)이라는 한자 글씨가 참 좋다. 산이라는 글자가 상형문자처럼 표기되어 더욱 인상적이다. 표지석 뒤에는 남령 최병익(崔炳翼) 선생이 노래한 금오산이라는 한시가 적혀 있다.

 

 

금오산을 노래함                                       詠金鰲山

 

높고도 신령스런 금오산이여!                      高高靈靈金鰲山
천년왕도 웅혼한 광채 품고 있구나.              千歲王都雄輝抱
주인 기다리며 보낸 세월 다시 천년 되었으니 待人歷年復千載
오늘 누가 있어 능히 이 기운 받을련가?        今日誰在能受氣

 

금오산의 웅혼하고 신령스런 기운을 받으려는 시인의 절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에 비해 내가 알고 있는 정민호 시인의 ‘금오산에 올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신라 왕조의 패망에 대한 우수가 깃들어 있다. 시인은 서라벌 땅을 굽어보고 있는 하늘을 깃발에 비유하고, 남산을 깃대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 깃발이 깃대에 걸려 펄럭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 금오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는 서라벌 땅은
형산강이 굽이치며 가로질러 흐르는 분지.
어느 왕조의 패망으로 흐트러진 먼 강물
그 위로 널려있는 하늘 한 자락이
남산 꼭대기에 걸려서 펄럭이고 있다.

 

천년 왕업을 연 사람들을 찾아

 

남산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은 사방으로 나 있다. 동쪽으로 가면 용장사지로 이어지고 서쪽으로 가면 배리로 내려갈 수 있으며, 북쪽으로 가면 남산리까지 연결된다. 우리는 남쪽으로 올라왔던 길을 되밟아 내려간다. 같은 코스지만 마애대불입상부터는 조금 다른 길을 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길 역시 석가여래좌상을 지나가게 되어 있다. 내려오는 길은 훨씬 수월해서 한 시간 남짓에 약수골 입구에 도착한다.

 

하산을 하니 시간이 네 시밖에 안 되었다. 왕릉 전문가인 이광국 선생이 오릉(五陵)에 한번 가보자고 한다. 오릉은 시내에서 남산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있어 멀지 않은 거리다. 차를 타고 오릉 앞에 도착하니 4시 10분이다. 안내판을 살펴보니 신라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이라고 써 있다. 오릉 즉 다섯 무덤은 신라 왕조를 연 1대 혁거세 거서간, 2대 남해 차차웅, 3대 유리 이사금, 5대 파사 이사금과 혁거세의 왕비인 알영 부인의 것으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4대 탈해 이사금은 왜 빠졌을까? 탈해 이사금은 박씨가 아닌 석씨였기 때문에 다른 곳에 장례를 지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묘는 문중의 땅에 썼던 것 같다. 다음에 설명하겠지만 남산의 서북쪽 지역이 박씨들의 터전이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오릉에는 박씨 왕들만이 묻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알영부인을 제외하고 다른 부인들의 얘기가 없는 것을 보면 다른 왕비들은 합장을 한 것 같다.

 


최근에 세워진 신라문(新羅門) 안으로 들어가니 정면으로 ‘신라오릉 정화사업 기념비’가 나온다. 최운철 선생이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라고 비판적인 입장을 나타낸다. 정화라는 좋은 말이 칠팔십 년대에 좀 왜곡되어 사용된 것은 사실이다.

 

이 표지석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니 혁거세 거서간에게 제사를 올리는 숭덕전이 자리하고 있다. 숭덕전은 닫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숭덕전 뒤 비각에는 신라시조 왕비 탄강유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는 왕비 알영이 태어났다는 알영정이 있다. 이것은 오릉 무덤을 향해 가다 오른쪽으로 대나무 숲을 따라가면 볼 수 있다.

 

박혁거세와 알영부인 그리고 왕들의 이야기

 

우리는 오릉으로 발길을 옮긴다. 4시 25분이다. 벌써 겨울의 짧은 해가 오릉의 소나무들 사이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오릉 무덤 영역에 들어오니 올망졸망 다섯 개의 봉분이 사이좋게 자리하고 있다. 들어가는 쪽에서 보면 앞에 쌍분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큰 봉분이 두 기, 쌍분 너머 작은 봉분이 두 기 분포되어 있다. 나는 왼쪽 방향으로 능을 한 바퀴 돌기로 한다.


왼쪽으로 큰 봉분 두 기가 나타나는데 이들은 신라고분의 전형적인 특징인 원형봉토분 형식이다. 그리고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왼쪽에는 비석과 석등이 서 있다. 비석에는 4단으로 나눠 다음과 같은 글씨가 쓰여 있다. “신라, 시조왕 시조왕비,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 오릉” 처음과 끝의 신라와 오릉 두 글자는 횡(가로)으로 쓰여 있고, 나머지 글자들은 종(세로)으로 쓰여 있다.

 

오릉을 한 바퀴 돌며 이들 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 거서간은 큰 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알이 박과 같다 하여 박(朴)으로 성을 삼았다. 여기서 거서간은 왕이란 뜻이다.

 

혁거세 거서간 5년 정월에 용이 알영 우물에 나타나 그의 오른쪽 갈빗대에서 한 계집아이를 낳았다. 늙은 할멈이 이 아이를 알영우물에서 낳다 하여 알영이라 이름 짓고 데려다 길렀다. 그 아이가 덕이 있어 나중에 혁거세가 비로 맞으니, 현명한 행동으로 내조를 잘 하였다고 한다.


시조 혁거세 거서간이 죽어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이 사릉이 현재의 오릉으로 여겨진다. 왕의 사후 혁거세와 알영의 적자(嫡子)인 남해가 차차웅이 되었다. 그는 몸이 장대하고 성정이 깊고 온화했으며 지략이 뛰어났다. 3대 유리 이사금은 남해의 태자로 어머니는 운제 부인이었다.

 

4대 임금은 잠깐 남해왕의 사위인 탈해 이사금에게 넘어갔다가 5대 임금은 다시 유리 이사금의 아들인 파사이사금에게로 돌아온다. 그리하여 탈해를 뺀 박씨 네 임금과 알영 부인이 이곳 오릉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이곳 오릉을 보고 나서 우리는 혁거세의 비가 된 알영이 태어난 우물로 간다. 대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비각이 있고 그 앞에 신라 시조왕비 탄강지 알영정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비각 바깥으로는 담을 쌓고 문을 만들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니 비각이 있고 그 뒤에 알영이 태어난 우물터가 있다. 우물은 보이지 않고 그 위를 세 개의 돌이 덮고 있다. 이곳을 나와 숭덕전 안을 들여다보니 연못까지 만들어져 있다.


오릉을 다 보고 나서 밖으로 나오니 저녁 5시다. 외국인들이 오릉을 보러 왔다가 너무 늦어 들어가지 못한다. 최운철 선생이 오늘 저녁은 포항으로 나가 저녁을 먹는 게 좋겠다고 제안을 한다. 포항까지 그렇게 멀지도 않고 그곳에 가면 좋은 집으로 안내할 수 있다고 하면서. 우리는 최 선생을 따라 7번 국도를 타고 포항까지 가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게 포항공대 캠퍼스 내에 있는 통나무집으로 가서 맥주도 한잔 마실 수 있었다. 통나무집의 벽에는 포항공대 학생들의 낙서가 가득하다. 학생들은 이곳을 영어로 통텍(Tongtech)이라고 부르기도 하나보다.

 

그 바람에 우리는 다음 날 아침 경주 남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안강읍과 강동면 지역의 문화유산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또 이런 생각지도 않은 가외 소득을 올리게 된다. 미리 얘기하지만 다음날 우리가 본 양동마을, 옥산서원과 독락당, 정혜사지 13층 석탑, 흥덕왕릉은 정말 남산 주변의 문화재 못지않게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태그:#금오산, #천년 왕업, #오릉, #혁거세 거서간, #알영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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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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