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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곳곳에는 '의총(義塚)'이라 불리는 이름 없는 분묘들이 널려 있다. 외적의 침략에 맞서 의롭게 싸우다 목숨을 바친 선조들의 거룩한 뼈가 묻혀 있는 무덤들이다.

일제는 36년 지배기간 동안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고 민족혼을 없애기 위해 민족문화 말살 정책을 집요하게 펼쳐 왔다. 민족의 자부심을 일깨울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발자취를 지우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우리 조상들의 거룩한 발자취인 '의총'을 거의 다 파헤쳐 흩어 버렸다.

남원에 있는 만인의총(萬人義塚)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에서 왜군과 싸우다 밀려온 의병들과 관군들 그리고 전라도에서 몰려든 의병들과 근방의 전주민이 합세해 한 덩이가 되어 싸우다가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마친 민족의 넋이 서려 있는 성스러운 무덤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파헤쳐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유골들은 광복 이후 다시 모여 분묘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그 위대한 정신을 발굴하고 후대에 이으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 조상의 거룩한 정신은 아직도 복구되지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되어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스라엘에서는 군의 모든 간부들이 임관하기 전에 반드시, 로마군단에 의한 점령을 앞두고 모두가 자결했던 '마사다' 요새에 들려 참배를 하고 그들의 핏속에 조상들의 거룩한 정신과 혼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들이 전투 중에 적으로부터 포위되었거나 곤경에 처했을 때는 '마사다!'라고 함성을 크게 지르며 용기를 북돋는다.

우리나라에도 선조들이 남긴 위대한 넋을 이어받아 민족을 위해 나를 불태우는 희생의 각오를 다질 수 있는 유서 깊은 곳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런 민족의식을 드높이고 역사의식을 제고하는 교육은 일본 식민사관에 세뇌된 친일세력들과 그들로부터 교육받은 사람들이 주도했던 독재정권에 의해 거의 고의적으로 차단되었다. 사관생도 교육에서조차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통치 하는데 앞장서 왔던 일본군 출신 친일분자들이 조국 광복 후 우리 군을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철저히 장악한 데서 비롯된 비극적 결과다. 우리 국군정신사의 가장 핵심부분인 항일 독립전쟁의 내용을 모조리 삭제해 버린 것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조국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쳐 순국한 선조들의 유골을 조국의 품안으로 모셔와 국립묘지에 안장한 바 있다. 사실 이런 일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위대한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작업이다.

이는 그 성과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고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히 추진되어야 할 일이어서 확고한 역사의식의 진정성이 없는 정치인들은 관심이 없다. 총독부 건물을 허무는 것처럼 외형적인 것을 없애는 것보다 우리 의식 속에 일제가 심어준 독소화 된 문화와 정신을 씻어 내는 작업이 더 중요할 것이다.

1983년 가을, 대구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안 시간을 내어 '만인의총'을 참배했다. 두 손으로 분묘를 쓰다듬으며 눈물보가 터졌다. 못난 후배들이 위대한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너무나 슬펐다. "선배님들이시여!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를 울부짖으며 선배들의 거룩한 희생 정신을 어떤 형태로든 구현해 올리겠다는 약속을 드렸다.

내가 정훈감이 된 후, 당시 연극협회장이었던 김의경씨의 도움을 받아 국군의 정신적 모체요 발원인 의병들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의미로 '만인의총'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했다. 연극 대본은 만인의총이 소재한 남원 출신의 작가 노경식씨에게 부탁했다.

첫 공연은 남원시에서 열었다. 잊혀가고 있는 조상의 위대한 넋을 기리게 하고 자부심을 일깨워 주어 고맙다며 남원 시민들은 감사패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군생활 동안 수많은 기념패를 받았지만 지금은 모두 버려 버리고 없다. 그러나 광복군 선배님들이 특별히 내 이름을 새겨 주신 도자기와 연극협회에서 준 감사패 그리고 이 감사패만은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아직도 만인의총에서 의병님들에게 고해 올렸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음에 죄스러울 뿐이다. 아니, 점점 더 민족의식을 잃고 사대주의적으로 나갈 것 같아 심히 우려된다.

덧붙이는 글 | 표명렬 기자는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태그:#만인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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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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