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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성산 돌아 민애왕릉 가는 길

 

 

삼릉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는 식당 주인의 설명에 따라 기린천을 건넌다. 그리고는 경부고속도로 밑을 지나 망(성)산을 따라 내남면 망성리를 찾아간다. 망성리 가는 길은 지방도와 농로가 혼재되어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몇 번을 물어 물어 망성리에 도착했으나 민애왕릉과 희강왕릉의 위치를 시원하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 회관 앞에서 아주머니들을 만나 사과나무 밭을 따라 산쪽으로 가면 나온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표지판 하나 없으니 자신 있게 산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 고개를 넘으니 율동마을이 나온다. 다시 한 번 사람을 찾아 왕릉으로 가는 길을 물으니 이번에도 역시 산으로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 마을 사이 산 능선에 왕릉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산으로 약 200m쯤 올라가니 고갯마루에 희강왕릉 250m, 민애왕릉 150m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가까운 민애왕릉을 먼저 보기로 하고 오른쪽  능선으로 오른다. 민애왕릉 가는 길은 주위에 소나무가 심어져 있어 왕릉임을 실감케 한다.

 

이들 왕릉은 다른 왕릉과 달리 산 속에 있어 좀 특이하다. 통일신라 하대로 내려갈수록 왕릉이 산 속으로 들어간 것 같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민애왕과 희강왕의 관계

 

 

민애왕릉은 지금까지 본 왕릉과는 다른 모습이다. 원형봉토분에 3단의 둘레석이 있고 그 위에 1단의 상대석이 있다. 그리고 이들 둘레석을 받치는 육각형의 지주석이 있다. 중국의 국내성(집안)에 있는 장군총의 지주석 생각이 난다. 특이한 형태이다. 위에서 보니 발이 여러 개 달린 거북이 바다를 헤엄쳐가는 것 같다. 민애왕릉의 높이는 3.8m이고 지름은 12.6m이다.

 

민애왕릉은 1984년 수리를 하면서 일부가 발굴되었는데, 안에서 원화10년명(元和十年銘) 뼈단지(骨壺)가 발견되었다. 원화 10년이라면 815년으로 당시 신라왕은 헌덕왕이었다. 그렇다면 이 능의 주인공이 헌덕왕 앞의 소성왕이나 애장왕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원성왕(785~798) 이후 신라왕의 계승 관계가 하도 복잡해 쉽게 단언하긴 어렵다.

 

                                            38대 원성왕

                                            (785-798)

                                 ↓                                   ↓             ↘

                                인겸                               의영          예영

         ↙                   ↓               ↓          ↘                  ↙         ↘

 39대 소성왕,  41대 헌덕왕,  42대 흥덕왕,  충공               헌정       균정

         ↓                                                  ↓                   ↓           ↓

 40대 애장왕                                     44대 민애왕  43대 희강왕  45대 신무왕

                                                        (838-839)    (836-838)        ↓

                                                                                           46대 문성왕

 

 

<삼국사기>에 따르면 민애왕은 김씨로 이름은 명(明)이다. 원성왕의 증손자로 대아찬을 지낸 충공(忠恭)의 아들이다. 상대등으로 있으면서 희강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 민애왕의 손에 죽은 희강왕 역시 원성왕의 증손자로 42대 흥덕왕이 죽은 후 후사가 없자 숙부인 균정과 왕권 경쟁을 벌여 왕이 되었다. 이러한 갈등을 통해 왕이 되었기 때문인지 이후 상당 기간 왕권투쟁이 계속된다.

 

당시 희강왕이 왕권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시중이었던 김명이었으며, 균정을 왕으로 밀었던 사람이 김우징과 김양이다. 왕권 경쟁에서 진 김우징 일파는 청해진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곧 김명이 상대등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자 희강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로 인해 민심이 기울었고, 기회를 엿보던 김우징 일파는 이듬해 윤 정월 서라벌로 들어가 왕권을 탈취하였다. 이렇게 해서 즉위한 사람이 신무왕이다. 왕권 다툼으로 인해 이들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은 아주 단명으로 끝났다.

 

 

희강왕릉은 고갯마루에서 왼쪽 능선을 타고 250m를 가야 나온다.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오른 후 그곳을 지나 약간 내려가면 바로 찾을 수 있다. 희강왕릉은 신라왕릉 중 규모가 가장 작은 편인데, 높이가 2.8m, 둘레가 14m이다. 보통 무덤들에 비해 규모가 조금 클 뿐 별다른 특징이 없다. 묘표석과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정도다.

 

경덕왕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지명의 틀을 만든 사람이다

 

희강왕릉을 보고 우리 일행은 경덕왕릉을 찾아간다. 경덕왕릉은 내남면 부지리에 있는데 망성리에서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경부고속도로를 아래로 통과해 기린천을 따라 올라가다 다시 경부고속도로를 아래로 통과해 부지리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부지리 중심마을로 들어가면서 왼쪽으로 초등학교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경덕왕릉 안내 표지판이 있다. 여기서부터 경덕왕릉 입구까지는 농로이다.

 

 

경덕왕릉은 멀리서 봐도 왕릉임을 알 수 있다. 소나무가 울창하고 가는 길이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에서 왕릉으로 올라가는 길도 양 옆으로 소나무가 도열하고 있어 행사장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왕릉 앞에서 도착해 보니 봉분과 둘레석 그리고 난간석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 그러나 흥덕왕릉에서 본 것처럼 문인석과 무인석, 촛대석, 비석 등의 석물은 볼 수가 없다.

 

경덕왕릉은 구릉 경사면을 평평하게 깎아 그 위에 봉분을 만들었다. 봉분 아래에는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둘레석(護石)을 둘러 봉분을 보호하였다. 이들 둘레석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기를 든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들 12지신상은 왕릉을 보호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다른 능들과 마찬가지로 남쪽 앞에 말(午)이 있고 북쪽 뒤에 쥐(子)가 있다. 이곳 역시 해가 잘 드는 동서남의 동물 조각은 잘 보이는데 비해, 북쪽의 조각은 그림자가 지고 이끼가 끼어서인지 덜 보인다. 그럼에도 이곳 경덕왕릉은 12지신상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중요한 왕릉이다.

 

 

그리고 둘레석 밖으로는 난간석을 설치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했다. 난간석의 경우 세로 석주는 잘 보존되어 있는데 비해 가로 석주는 훼손되어 새로운 것으로 갖다 맞췄다. 그래서인지 색깔이 조금 다르다. 이곳에서도 역시 이처럼 새로 해놓아야 하는지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왕릉 앞에는 상석이 있는데 완벽한 형태로 1200여 년의 세월을 견뎌왔다. 상석에 새겨진 꽃모양의 조각 역시 단순하면서도 아름답다. 

 

경덕왕은 신라의 역사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왕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지명의 대부분이 경덕왕 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742년에 왕위에 오른 경덕왕은 국가의 제도를 중국식으로 개편하고 지방제도를 정비한다. 즉위 16년인 757년 전국을 9주5소경으로 정비하여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고, 그 밑에 군과 현을 두었다. 이때 만들어진 9주가 상주(현 상주: 사벌주), 양주(현 양산: 삽량주), 강주(현 진주: 청주), 한주(현 광주: 한산주), 삭주(현 춘천: 수약주), 웅주(현 공주: 웅천주), 명주(현 강릉: 하서주), 전주(현 전주: 완산주), 무주(현 광주: 무진주)이다.

 

경덕왕대는 진정 태평성대인가?

 

 

경덕왕은 대외관계도 중시하여 당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또한 불교도 장려하였는데 굴불사와 불국사 등이 이때 만들어졌고, 황룡사 종과 성덕대왕 신종도 이때 만들어졌다. 그래서인지 경덕왕 대에는 불교와 관련된 일화가 많다. 경덕왕 24년 ‘찬기파랑가’를 지은 승려 충담이 왕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 바쳤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은 은근한 아버지 같고                                        君隱父也

신하는 남몰래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 같다.                   臣隱愛賜尸母史也

백성이 어리석어 아이 같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民焉狂尸恨阿孩 

일찍이 이를 알아  백성에게 사랑을 내리셨다.              古爲賜尸知民是愛

이것은 옛날부터 아는 일이다.                                   尸知古如

[…]

군신이 더불어 바람 잘 날 없는 백성을 은근히 다스리면 君如臣多支民隱如爲

나라 안이 모두 태평해지고                                       內尸等焉

모든 악이 청산되어 한탄소리 없어지리라.                   國惡太平恨音叱如

 

경덕왕(742~764)은 23년간 나라를 통치하면서 통일 신라의 왕업을 튼튼히 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능은 현재도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능 뒤에 순찰함이 있어 확인해 보니 경주경찰서 건천지구대에서 하루 두 번 오전과 오후에 순찰을 돌고 있었다.

 

우리가 왕릉을 보고 다시 시내로 나오는데 경찰 순찰차가 부지리 쪽으로 간다. 그 순찰차가 지금 경덕왕릉으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문화재 보호라는 측면에서 관리와 감독은 꼭 필요한 것 같다.


태그:#민애왕릉, #희강왕릉, #망성산, #내남면, #경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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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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