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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복용사 기념사업회 창립총회
 이희복용사 기념사업회 창립총회
ⓒ 군포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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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 10용사 중 경기 군포 출신인 이희복 용사를 추모하고 기리는 '이희복 용사 기념사업회'(이사장 이환봉. 이하 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그가 전사한 지 58년만인 지난 5일 시청 대회의실에서 노재영시장과 재향군인회 및 시민 4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이희복 용사는 군포시 속달동 출신으로 지난 1949년 5월 개성 송악산 일대 3개 고지를 탈환하는 전투에서 전우들의 희생을 줄이고, 진지를 북한군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폭탄을 안고 적진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바친 육탄 10용사 중 한사람이다.

군포시에 따르면 기념사업회는 창립총회에서 이환봉이사장과 보훈단체장 등 26명의 이사를 선임, 기념 추모비 건립과 백일장대회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할 계획을 밝히고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초청 '자유민주주의의 미래'란 주제로 안보강연회를 개최했다.

기념사업회는 국.도.시비 지원이 예산이 확보됨에 따라 육탄 10용사 이희복 상사의 추모비 건립을 추진하고 매년 6월 호국정신을 강조하는 백일장을 개최하는 등 본격적으로 기념사업에 나선다는 계획으로 군포시를 호국보훈의 모범도시를 만들겠다는 다짐이다.

이와관련 이희복 용사의 순국·희생정신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을 위해 국비 2천100만원, 도비 3천만원, 시비 3천만원 지원이 확정돼 2009년 1월부터 건립에 나설 예정이다.

앞서 군포시재향군인회(회장 유희열)는 지난 10월 14일 자랑스러운 군포인을 항시 떠올리고 애국심을 본받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사업이 필요하다는데 뜻을 모으고 군포시 각종 향군단체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이희복 용사 기념사업회 발기인 모임'을 가졌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는 등 지금도 군인의 표상으로 추앙받는 육탄 10인의 용사 가운데 한명인 故 이희복(李凞福) 용사의 고향이 군포시 속달동이나 오랫동안 간과해 오다가 지난 2005년 지역주간신문인 <군포신문>의 취재로 보도되면서 처음 밝혀졌다.

당시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전장에서 산화한 이희복 용사가 살았던 속달동 집에는 현재도 조카 이완기씨(69·농업)가 삼촌의 얼을 기리며 거주하고 있다.

현재 대야동에 거주중인 이희복 용사 조카 이완기(69)씨는 "삼촌이 전사한 지 58년 만에 삼촌의 고향에서 시민들이 나서 '이희복 용사 기념사업회'를 마련하고 추모비가 세워진다니 너무 감격스러운 일"이라며 애써준 재향군인회와 군포시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1949년 5월 개성 송악산에서 산화한 육탄 10용사

파주시 통일공원 내 육탄 10용사 충용탑
 파주시 통일공원 내 육탄 10용사 충용탑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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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 이 아닌가 생각하니, 숙연한 마음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 육탄 10용사! 님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육군소위 서부덕, 육군상사 황금재, 육군상사 윤승원, 육군상사 김중해, 육군상사 윤옥춘, 육군상사 이희복, 육군상사 오재용, 육군상사 박창근, 육군상사 박평서, 육군상사 양용순. 등 '육탄 10용사'를 기리는 글로 부사관의 상징이 되고 있다.

육탄 10용사는 6.25동란 발발 1년전인 49년 5월 4일 북한에게 점령당한 개성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스스로 포탄이 돼 적진에 뛰어들어 산화한 10명의 국군을 말한다.

국군 전사에 따르면 6.25가 발발하기 이전에 전면전을 예고하는 소규모의 전투가 38선 일대에서 수시로 일어났고 특히 6.25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49년에는 그 횟수가 잦았다.

1949년 4월 남천점(南川店)에 주둔하고 있던 북한군은 인민군 1사단 제3연대 병력 1천여명을 개성 송악산 후방에 집결시켰다가 5월 3일 새벽 송악산 능선을 따라 기습 남침, 38선 남방 일대의 고지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한국군은 빼앗긴 송악산 고지의 재탈환을 수십차례 시도했으나 피해만 늘어갔다. 결국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송악산 능선에 버티고 있는 북한군 토치카(지하 참호) 10개소를 파괴하는 것만이 38선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 적진에 폭탄을 안고 뛰어들 용사를 모집했다.

이에 서부덕 이등상사를 공격대장으로 하는 9명의 군인들이 용감하게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박격 포탄과 폭약을 안고 스스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하늘을 뒤덮는 폭음과 함께 적의 토치카는 박살나고 한국군은 송악산의 주요 고지를 무난히 탈환할 수 있었다.

앞서 낮 12시경 중화기 소대 분대장 박창근 하사가 토치카를 파괴하기 위해 단신으로 수류탄 7개를 들고 돌진하다 전사, 9용사에 박하사를 합해 '육탄 10용사'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20여일이 흐른 1949년 5월 말, 이희복 용사의 속달동 집에는 6개월 전 군대에 갔던 막내아들의 전사소식을 담은 전보 한 장과 하얀 보자기에 싸인 빈 오동나무 상자가 집으로 배달된다.

육군은 1949년 5월 송악산지구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서부덕 이등상사 등 10명의 용사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01년 전투부대 중,상급 모범 부사관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육탄 10용사상'을 제정해 참모총장 상장과 기념패 전달하며 희생정신을 추모하고 호국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태그:#군포, #이희복, #육탄10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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