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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처음 가는 곳이든, 예전에 한 번 들렀던 곳이든, 자주 찾는 곳이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거기 기기묘묘하게 빼어난 산과 아득한 꿈처럼 깊은 계곡을 그린다. 거기 넉넉한 품을 활짝 펼치고 있는 들과 우리들 희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강과 끝없이 출렁이는 바다를 그린다.    

 

여행이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것은 아름다운 대자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 대자연이 품고 있는 삼라만상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 바위와 흙, 풀과 나무, 벌레와 짐승, 사람이 사는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저마다 독특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 있는 것들과 생명 없는 것들의 아름다운 조화! 이것이 여행이 주는 즐거움 아니겠는가.  

 

어디 그뿐이랴. 짙푸른 혹은 먹장구름, 비가 쏟아지는 함박눈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 오랜 세월이 꼼꼼하게 기워둔 역사의 그림자가 있어 좋다. 언제나 하늘을 머리에 이고 하늘 뜻에 따라 살아온 땅, 그 땅 곳곳에 옛 사람들이 찍어놓은 발자취가 있어 더욱 좋다. 거기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꺼번에 들여다볼 수 있어 차암 좋다.   

 

거기, 가없는 그리움이 있고 오랜 기다림이 있다. 거기 눈을 적시는 슬픔이 있고 마음을 환하게 밝히는 기쁨이 있다. 거기 쓸쓸한 외로움이 있고 모닥불 같은 포근함이 있다. 거기 내가 보이고 너가 보이고 우리들이 보인다. 거기 고산 윤선도가 은행나무로 우뚝 서 있고, 우암 송시열이 쪼그리고 앉아 있고, 우리 역사가 아픈 몸을 뒤채고 있다. 

 

 

노오란 은행잎 투둑 투둑 떨구고 있는 녹우단

 

낙엽이 툭툭 떨어지고, 무서리 내린 텅 빈 들판에 나란히 줄지어 선 벼 밑둥치가 을씨년스럽게 보이는 11월 중순. 땅끝마을을 품고 있는 해남으로 길을 떠난다. 이번 여행길은 사적 제167호(1968년 12월 19일)로 지정되어 있는 '해남윤씨녹우단'(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을 찬찬히 둘러보기 위해서다.   

 

사실, 나그네는 올 들어 녹우단을 두 차례나 다녀왔다. 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굽히지 않았던 고산 윤선도 선생의 꼿꼿한 선비정신과 탁월한 문학정신이 살아 숨 쉬는 녹우단을 제대로 깊이 있게 살펴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때 찍은 녹우단 사진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늘 아쉬웠다. 

 

"녹우단이야? 녹우당이야?"

"녹우단은 이곳 연동에 있는 녹우당과 가묘(家廟), 어초은사당(漁樵隱祠堂), 고산사당(孤山祠堂) 등 건물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녹우당은 녹우단 안에 있는 해남 윤씨 종가를 말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연동에 있는 이 건물 전체가 사적 제167호로 지정된 거라고 봐야지"

 

11월 9일(일) 아침 10시. 고산 윤선도 11대 직손인 윤재걸(61, 언론인) 시인을 앞세우고, 마지막 가는 늦가을을 안쓰럽게 붙잡고 있는 녹우단을 찾았다. 녹우단 저만치 녹우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오래 묵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노오란 잎사귀를 투둑 투둑 떨어뜨리고 있다. 이 은행나무가 고산 윤선도가 심었다는 그 은행나무다.

 

이 은행나무는 그러니까 나이가 400살이 훨씬 넘었다고 볼 수 있다. 멀찌감치 서서 한동안 고산이 어린 은행나무를 심는 모습을 떠올리며 황금빛에 물든 은행나무를 올려다본다. 바람이 살짝 부는가 싶더니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늦가을 햇살에 금빛을 반짝이며 떨어지는 은행잎이 마치 '어부사시사' 시구가 되어 허공을 수놓는 듯하다.

 

 

비자나무숲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비오는 소리 같다

 

"이 집은 고산 4대 조부인 효정(1476∼1543, 호 어초은) 할아버지가 이곳에 집터를 정하고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입니다. 집터 뒤에는 덕음산이, 집터 앞에는 벼루봉이, 벼루봉 오른쪽에는 필봉이 자리 잡고 있는 명당이지요.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에 행랑채가 갖추어져 있어 조선시대 상류 주택 양식을 잘 드러내고 있는 건물입니다."-윤형식

 

시가 된 노오란 은행잎 하나 입에 물고 윤재걸 시인을 따라 솟을대문을 지나 녹우당 안으로 들어선다. 녹우당이란 간판이 걸린 고택과 예쁘게 꾸며진 자그마한 정원, 빠알간 담쟁이 넝쿨이 예쁘게 붙어 있는 긴 돌담이 오랜 세월이 다녀간 흔적을 되살려준다. 이곳에는 지금 고산 윤선도 종손인 윤형식(75)씨가 살면서 건물을 관리하고 있다.

 

녹우당(綠雨堂)은 해남 윤씨 종가이다. 녹우당은 비자나무숲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비오는 소리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랑채는 효종(孝宗)이 스승인 고산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경기도 수원집을 현종(顯宗) 9년, 서기 1668년에 바닷길로 이곳으로 옮긴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녹우당이란 글씨는 동국진체의 원조로 이익의 형 이서가 썼다고 한다.  

 

윤형식씨는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인데, 앞면에 사랑채가 있고 서남쪽 담모퉁이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며 "사랑채 뒤 동쪽 대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ㄷ'자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당은 안채 뒤 동쪽 담장 안에 한 채가 있고 담장 밖에 고산사당과 어초은사당 등이 있다"고 설명했다.

 

 

고산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다 까닭이 있을 것이다

 

"고산 윤선도(남인) 할아버지가 우암 송시열(서인)보다 나이가 20살이나 더 많았지만 당대 최대 숙적이었지. 하지만 고산과 우암 사이에는 아주 재미있는 일화 하나가 내려오고 있다네. 물론 남인, 서인으로 갈라져 서로 으르렁거리는 두 집안을 화해시키기 위해 누군가 일부러 지어낸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지만." -윤재걸

 

윤재걸 시인 말에 따르면 하루는 우암이 병에 걸려 몹시 앓았다. 이때 우암은 아들에게 의학에 밝은 고산에게 가서 약을 지어오라는 심부름을 시킨다. 아들은 펄쩍 뛴다. 정치적으로 숙적이었던 고산이 행여 약재에 독을 탈 수도 있다는 까닭에서였다. 하지만 우암은 "고산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며 끝내 아들에게 약을 지어오게 만든다.

 

고산에게 가서 약을 지어온 아들은 행여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재를 샅샅이 살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약재 중에는 독이 들어있는 약재가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 우암에게 "보세요, 아버지! 독이 들어 있는 약재가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우암은 "다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며 그 약재를 달여 먹었다.

 

그렇게 고산이 지어준 약재를 달여 먹은 우암은 금세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지어낸 것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크게 깨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서로 아무리 원수 사이라 하더라도 서로 지켜야 할 사람의 도리는 반드시 깨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황토빛 돌담에 낙서를 하고 있는 어릴 때 내가 보인다

 

녹우당에서 나와 고산사당으로 가는 골목길은 고즈넉한 돌담길이다. 동백나무가 우거진 돌담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면 4백 년 이상 묵은 소나무 한 그루가 파수꾼처럼 우뚝 서서 고산사당을 가리고 있다. 고산사당은 앞면에 나무문이 3개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을 가진 건물이다. 하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어초은 사당은 담장을 둘렀으나 1칸 문에 정 측면(正側面)이 1칸으로 된 건물이다. 그 밖에 북동쪽으로는 어초은 제실(祭室)인 추원당(追遠堂)이 있고, 뒷산에는 오백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이 빼곡이 우거져 있다. 그 비자나무숲을 낀 산중턱에 어초은 가묘가 연동 들녘을 굽어보고 있다.

 

녹우단 곳곳에 길게 뻗어 있는 정겨운 황토빛 돌담을 따라 천천히 거닐며 어릴 때 추억을 떠올려 본다. 나그네가 어릴 때에도 이런 황토빛 돌담에 쪼그리고 앉아 낙서를 하며 햇살을 쬐다가 심심하면 구슬치기를 하고 자치기를 했었다. 그래서일까. 황토빛 돌담에 '분이는 바보! 멍청이!'라고 쓰고 있는 어릴 때 내가 보인다.  

 

녹우단 오른쪽, 고산유물관 들머리에도 작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고산유물관을 흘깃흘깃 쳐다보며 눈부신 금빛을 쏟아내고 있다. 이곳 유물관에는 공재 윤두서자화상(국보 제240호)과 해남 윤씨 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 윤고산 수적관계 문서(보물 제482호) 등 유물 4619점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공재 윤두서 대표적 작품인 '백마도'다. 

 

고산 윤선도의 대나무처럼 꼿꼿한 선비정신과 탁월한 문학정신이 오늘도 새록새록 숨 쉬고 있는 녹우단. 녹우단 앞에 서면 삼라만상이 '어부사시사' 시구가 되어 절로 읊조려진다. "자러 가는 까마귀가 몇 마리나 지나갔느냐 / 돛 내려라 돛 내려라 / 앞길이 어두운데 저녁눈이 꽉 차 있다 / 찌그덩 찌그덩 어야차~"('동사'(冬詞) 몇 토막)

 

일생을 유배지에서 보낸 대나무처럼 꼿꼿한 선비

송강 정철과 더불어 조선 시가 쌍벽 이룬 고산 윤선도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1587년, 선조 20년 6월 22일 한성부 동부(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아버지 유심과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 2남으로 태어났다. 고산은 8세 때 해남 종가에 아들이 없어 작은 아버지 유기의 양자로 입양돼 해남윤씨 대종(大宗)을 잇는다.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시호 충헌(忠憲), 자는 약이(約而).

 

1612년, 고산은 광해군 4년에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비난하는 '병진상소'를 올렸다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첫 유배를 당한다. 그 다음 해에는 경상도 기장으로 유배돼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1623년에는 인조반정이 일어나 유배에서 풀려나면서 의금부도사직을 맡지만 곧 사직하고 해남으로 돌아와 은둔생활에 젖는다.

 

1628년, 고산(42세)은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면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사부를 맡는다. 1629년에는 형조정랑을 거쳐 1632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낸다. 1633년에는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문학(文學)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아 성산현감으로 좌천되자 현감직을 내놓고 다시 해남으로 내려간다.

 

1636년에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또다시 은거에 들어간다. 1652년, 효종 3년에는 왕명으로 복직, 예조참의를 맡았으나  서인(西人)의 중상으로 사직했다가 1657년 중추부첨지사로 복직된다. 1658년 동부승지를 맡았을 때에는 서원 철폐를 놓고 서인 송시열 등과 논쟁하다가 탄핵을 받고 삭직 당한다.

 

1659년에는 효종의 장지문제와 자의대비의 복상문제(服喪問題)를 놓고 서인의 세력을 꺾으려다가 실패, 삼수(三水)에 유배당한다. 1665년 현종 6년에는 광양으로 유배되었다가 81세에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7년 4개월 동안의 긴 세월을 다시 유배생활로 보내게 된다. 그 뒤 유배에서 풀려나 보길도에서 은둔하다가 1671년 6월 1일 보길도 낙서재에서 향년 85세로 파란 많은 생을 마무리한다.

 

고산은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도 통했으며, 특히 시조에 뛰어났다. 한글로 쓴 고산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했으며,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고산 사후 1675년, 숙종 1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지은 책으로는 <고산유고>(孤山遺稿)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태그:#녹우단, #해남 연동, #윤재걸, #고산 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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