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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란 무엇인가. "신 또는 초인간적·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인간이 경외·존숭·신앙하는 일의 총체적 체계"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그럼, 왜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하는가. 당연히 '신 또는 초인간적·초자연적인 힘에 대해 경외·존숭·신앙'을 통하여 마음의 안식을 얻고 신의 초자연적 도움을 간구하기 위해서다.

 

길게 종교학 강의를 할 생각은 없다. 그런 의도로 이 글을 시작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는 한 마디로 사람에게 위안과 힘을 줘야 한다. 위안이라고 한다고 무조건 신이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신에게 무엇을 함으로 스스로 위안을 받을 수도 있다. 대부분은 그것 자체를 '신앙함'이라고 한다.

 

어쨌든, 그러기 위해 교회나 성당, 사찰이 존재한다. 그 이유를 상실한다면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내가 목사다 보니 항상 교회(종교, 종교시설, 종교인)에 애정을 갖고 보려고 애쓰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때로, 아니 요샌 아주 자주, '이건 아니잖아' 하는 사태들이 일어난다.

 

최근 눈에 띤 두 기사는 왠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든다. 하나는 <뉴스앤조이>의 "33평 아파트 바쳐봤어요?" (이승균 기자)라는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오마이뉴스>의 "돈 없으면서 절에는 왜 왔어요?"(조정림 기자)라는 기사다.

 

교회에서 발언하려면 돈을 내라?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선배 목사로부터 들은 '세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충고가 새삼 생각난다. 그 첫째는 돈을 멀리하라, 둘째는 이성을 멀리하라, 셋째는 놀이를 멀리하라는 것이다. '놀이'란 놀음을 한다거나 손찌검을 한다거나 하면 목사에게 치명상이 된다는 뜻이다.

 

근데 요새는 돈을 너무 가까이하는 종교인(시설)들이 많은 것 같다. '가까이하면 안 되는 당신'인 돈이 너무 가까이 종교의 품으로 파고 들다 보니 무수한 부작용들을 낳고 있다. 이번에 신문을 장식한 목동의 제자교회 정삼지 목사(56세)의 경우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 목사는 2억원의 선교헌금을 자신의 계좌로 이체시킨 후 안수집사회(회장 이봉진)로부터 거센 해명요구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해명 대신, 교회 중직자 200여 명이 모인 '목장개강예배'에서 "헌금 나만큼 한 사람 있어요? 33평 아파트 바쳐봤어요?"라며, "바치지도 않았으면서 자기주장만 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헌금 2억1000만원의 투명성 논란이 제자교회의 문제인 듯하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논의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은 33평 아파트도 헌금했는데 그만큼의 헌금을 안 한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하면 안 된다는 정 목사의 말에 있다. 헌금을 안 한 사람은 교회에 대하여 아무런 요구도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헌금(돈)에 의해 교회의 발언권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교회나 사찰, 성당에서, 돈이나 여타의 유형적인 것들에 의해 신자 된 권리가 상실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로마 교황청이 베드로 성당을 지을 때 면죄부를 팔던 때로 돌아간 것과 같다. 돈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아니다. 헌금을 많이 바쳐야만 신자의 권리를 누리는가? 아니다.

 

정 목사의 발언은 단적으로 황금만능이 판치는 교회의 단면을 보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어느 결에 교회가 가난한 이들(헌금을 못하는 이들, 같지 않을 수도 있다)에게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돼 버린 느낌이다. 돈 없으면 교회에서도 설움을 받는다면 더 이상 교회가 안식처가 아니다.

 

절에서 기도 받으려면 돈을 내라?

 

돈에 관한 한 사찰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S시에 위치한 TV에 몇 차례 방영되기도 했던 사찰에서 일어난 해프닝 또한 그곳을 안식처로 여길 만하지 않다. '촛불 켜는데 5천 원!' 신심을 부처에게 바치려면 초 하나쯤은 켜야 하는데 그 촛불 하나 켜놓는 값이 5천원이나 한다.

 

시중에서 초 한 자루가 얼마나 하는데 그리 비싼 촛불을 켜야 하는 것인가.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유대인들이 성전에 들어가려면 성전세 반 세겔을 내야 한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돈과는 다르기에 그 돈을 바꿔주면서 이문을 떼먹는 성전 장사치들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제사를 드리려면 양이나 염소 등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흠이 있으면 안 된다는 성경구절을 교묘히 이용하여 백성들이 가져오는 양이나 염소는 흠이 있다며 성전에서 제물을 비싼 값에 팔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제물을 살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이런 이들의 좌판을 들러 엎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며.

 

'5천원짜리 초'는 성경의 '성전 제물'과 다를 바 없다. 사찰의 건물마다 들러 절을 하고, 절을 할 때마다 불전함에 돈을 넣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분위기. 어찌 가난한 사람이 마음의 안식을 위해 절을 찾을 수 있겠는가. 포대화상, 약사와불 등을 거치면서 "가족이 다 같이 왔으니 3만원이면 된다"고 노골적으로 액수까지 제시하는 승려.

 

TV에 반영된 '산신할머니 복돌' 앞에서 "백일기도에 10만원"이라며 기도해주는데 돈을 내야 한다고 당당히 말하는 보살. 돈이 없다니까, "돈도 없으면서 뭐 하러 여기 왔어요?"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기겁을 할 정도다. 이쯤에서 종교란 무엇인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돈 없이 위안 받을 수 있는 안식처여야

 

언급한 두 가지 예는 그저 일부분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다. 왜 굳이 개신교와 불교만을 이야기하느냐고 불만을 터뜨리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어느 종교를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아니다. 어느 종교는 괜찮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종교는 종교다워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세계 종교사를 볼 때, 모든 종교는 돈과 결탁할 때 망했다. 우리가 고등종교라고 말하는 현대의 종교들이 살아남은 것은 윤리라는 잣대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가장 앞에 놓인 게 물질이다. 한 마디로 돈이다. 돈이라는 잣대를 무사히 통과할 때 비로소 종교는 가치를 가지게 된다.

 

돈이 없는 자들이 얼마든지 종교를 통하여 안위를 얻어야 한다. 자본주의 논리를 끌어들임으로 종교가 종교답지 못할 때 그렇지 않아도 물질도 마음도 가난에 처한 이들이 어디다 하소연을 할 수 있겠는가. 요즘 같은 불경기에 돈 없어도 당당히 갈 수 있는 곳, 거기가 교회요, 성당이요, 사찰이어야 하지 않을까.

 

'돈이 없으면 종교생활도 못해' 혹시 그게 어떤 종교시설이든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면,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이 황금만능주의로 뒤덮인다고 해도 종교만은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 불경기의 골이 깊으면 길을수록 교회(사찰, 성당)는 교회(사찰, 성당)다워야 한다. 그 '-다움'의 맨 앞에 돈 문제가 걸린다.

 

어느 곳에 가든지 돈 문제로 야단인 불경기에 종교기관에서조차 황금만능의 가치관이 넘실댄다면 더 이상 종교는 안식처가 아니다. 안식처이기는커녕 피해야 할 곳이 돼버릴 수 있다. 황금만능에 찌든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당당뉴스, 뉴스앤조이에도 송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종교, #헌금, #불전함, #황금만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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