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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 꽃구경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장수를 지나게 되었다. 여기저기 사과 과수원이 보였고 사과 상징물들이 눈에 띈다. 며칠 전 앙케트를 조사하는 기관의 메일이 와 예산사과나 대구사과, 문경사과 등과 함께 무주사과나 장수사과, 청주사과에 대한 인지도나 맛 등에 대한 조사에 응한 적이 있다.

예산사과니 대구사과 등은 나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산지 이름이다. 하지만 조사에서 무주사과와 장수사과는 첨 들어봤다. 조사에 응하면서 혹시 이 조사가 인지도가 떨어지는 사과 산지에 대한 홍보가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장수사과 주산지를 지나게 된 것이다.

주인의 선심, 그게 상술이었던 것

사 온 사과를 반을 갈라 봤습니다. 한 가운데가 빈 게 뭔가 이상합니다.
 사 온 사과를 반을 갈라 봤습니다. 한 가운데가 빈 게 뭔가 이상합니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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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길을 내려오는데, '장수사과 직거래장터'라는 대형 간판이 도로변에 서 있다. 아내가 "저기 사과 직거래 장터가 있네요" 한다. 그 말은 '사과 사 가지고 가죠'란 말과 다르지 않은 말이다. 아침에 늘 사과 한 알씩 먹는 터라 둬 달에 한 번씩 사과를 사러 멀리 농수산시장까지 간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지나는 길에 좋은 사과(?)를 살 기회니 잘 되었다 싶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직판장으로 들어섰다. 이미 한 손님이 사과 맛을 보고 맛있다며 한 판을 주문하고 있었다. 주인은 우리에게도 사과를 맛보라고 권한다. 마음대로 깎아먹을 수 있도록 칼과 사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친절한 주인의 안내에 따라 맛이 조금 덜한 사과로부터 맛이 좋다는 사과까지 깎아 먹어보았다.

주인의 말대로 먼저 먹은 사과는 달콤하나 좀 싱거웠고, 다음에 먹은 사과는 달콤하면서도 약간의 신맛이 도는 게 맛이 아주 좋았다. 물론 두 종류 다 사각사각 그 씹는 입맛도 그만이다. 막 냉장고에서 나왔는지 적당히 찬 맛 또한 일품이다. 둘이 합창하듯 말했다.

"참 맛있어요."
"더 깎아 잡숴보세요. 거기 있는 것 다 깎아 잡수셔도 돼요."
"예? 이거 다요?"

둘이는 열심히 깎아 먹었다. 거의 두 알을 다 깎아 먹고 말았다. 주인은 괘념치 않는다는 듯 다른 손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각사각'과 '푸석푸석'의 차이

장수의 직거래장터에서 사온 사과 박스입니다.
 장수의 직거래장터에서 사온 사과 박스입니다.
ⓒ 김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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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판을 사들고 그 손님이 떠나자 그때야 주인의 관심이 우리에게로 왔다. 우리는 대뜸 두 번째 것을 주문했다. 그것도 한 판이 아니라 한 상자를. 아내가 먼저 주인에게 또 말을 건다.

"어떻게 이렇게 사과가 사각사각 하니 맛있어요? 요즘 사과는 푸석푸석 한 게 맛이 없던데."
"저장이 문제죠. 우린 냉장 보관해요. 요즘은 웬만한 농가에는 다 저온창고가 있어서요. 그 속에 들어가면 아무리 오래 가도 생산할 때 그대로죠."

"근데 가을에 사과 딸 때 사 보면 속에 꿀잼이 있던데, 이건 없네요. 저온창고에 들어가면 잼이 없어진다면서요?"
"꿀잼이 있는 게 좋다고 보통 아시는데, 그 반대죠. 꿀잼이 없어도 우리 사과는 맛이 있잖아요."
"그러게요. 이건 꿀잼이 없는데 맛있네요?"

"장수사과의 특징이죠. 저온창고에 들어갔다고 있는 게 없어지겠어요? 꿀잼은 그냥 사탕발림 같은 거예요. 거 상관없으니까 담부턴 그거 따지지 마시고 사세요."
"그렇군요."

주인이 웬만하면 앞에 손님처럼 한 판들이 상자만 샀을 건데 주인이 하도 친절하고 상냥하여 그만 두 판들이 한 상자를 샀다. 그것도 주인이 한 판에 15개가 아니라 16개를 넣어주었으니, 집에 오는 내내 우리 부부는 사과 잘 샀다는 대화를 나눴다.

"참 맛있는 사과 싸게 샀네."
"그러게요. 이 정도면 적어도 6만 원은 줘야 할 텐데. 4만 6000원이면 싼 거예요. 난 6만 원 정도 생각했는데…."

집에 와 먹은 사과 맛, "어? 이게 아닌데"

장수군의 장수사과 마스코트 중 하나인 '아삭이'입니다.
 장수군의 장수사과 마스코트 중 하나인 '아삭이'입니다.
ⓒ 장수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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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 잔뜩 부푼 마음으로 사과 박스를 풀었다. 사과 한 알을 잽싸게 깎아 입에 물었다. 아내와 내가 동시에 한 말, "어? 이게 아닌데" 한 입 물고는 다시 다른 사과를 깎았다. 역시 직판장에서 먹은 사과 맛이 아니다. 푸석푸석한 게 영 아니었다. 먼저 먹은 사과 맛도 아니고, 나중 먹은 사과 맛도 아니다.

직판장에서 '먹은 사과'와 집에 '사 온 사과'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옛날에 "하늘과 땅 사이에는 무엇이 있게?"라고 친구가 물으면, 난 "글쎄?"라고 대답했고, 그러면 친구는 "그것도 몰라? '과'가 있지" 하며 깔깔거렸었다. 왜 그때 생각이 나는 건지.

정말 그런 건가. '먹은 사과'와 '사 온 사과' 사이엔 '와'가 있는 건가? '와(訛)'는 '속이다, 거짓' 등의 뜻이 있다. 장수의 직거래매장에서 사 온 맛없는 사과를 아침마다 먹는 아직도 실감이 안 나지만, 우리가 그때 깎아먹은 사과와 집에 가지고 온 사과는 다른 종류가 분명하다.

하도 화가 나 가져 온 명함으로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봐야 "잘못했으니 보내십시오. 다른 맛있는 걸 보내겠습니다." 할 것 같지 않아 그만두었다. 하지만 영 마음이 개운하질 않다. 장수군청 홈페이지엘 들어가 봤더니, 장수군에 특산물 중 하나가 사과였다.

사과 홍보가 아주 잘 돼 있었다. 장수군에는 사과 마스코트가 있을 정도다. 사과축제는 물론 사과를 중심으로 한 농촌체험 코스도 개발되어 있었다. 장수군의 한 농부(아니면 상인)의 '거짓(와)'을 경험한 나로서는 그런 장수군의 찬란한 홍보가 더 마음을 상하게 한다. 소위 농부나 상인들의 '과일 알박기(겉과 속이 다르게 포장하는 것)'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건 해도 너무한다 싶다.

먹으라고 내주는 과일과 포장해주는 과일이 다르다니? 이제는 포장할 때 상자 속으로 들어가는 바로 그 과일 맛을 봐야겠구나, 생각하게 만든 씁쓸한 경험이다.

장수의 주산물인 오미자와 사과의 모습이 탐스럽습니다.
 장수의 주산물인 오미자와 사과의 모습이 탐스럽습니다.
ⓒ 장수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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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저의 경험이지 장수사과 재배 농민이나 장수군, 혹은 상인 전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기사로 장수사과 전체를 흠집 낼 의도는 전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태그:#장수사과, #알박기, #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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