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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산(440m) 에서 내려다 본 외암마을 전경.
 설화산(440m) 에서 내려다 본 외암마을 전경.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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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있어 고향이란 무엇일까. 고향이란 탯줄을 묻은 곳이다. 이 세상의 처음이다.
내게 영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인 몸을 주신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고향을 물속에 수장한 실향민인 난 육신의 고향 아닌 정신의 고향을 찾아다니고 있다. 절집 기행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5.23)은 왠지 육신의 고향이 그리워진다. 어디 고향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 없을까. 궁리 끝에 아산시 송학면 외암리 민속마을을 찾아가기로 한다. 외암마을은 온양에서 공주를 향해 가는 길목에 있다. 1988년 전통 건조물 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가 2000년 1월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된 마을이다.

외암마을은 다섯 개의 봉우리들이 붓끝처럼 생겼다 하여 문필봉이라고도 부르고 오봉산이라고도 부르는 설화산(440m) 아랫자리에 터잡고 있다.  약 500년 전, 이곳에 처음 정착한 것은  강 씨와 목 씨 등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기부터 예안 이씨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예안 이씨가 온양에 들어와 살게 된 지 이미 5세대가 되었다"라는 조선시대 후기 성리학자 외암 이간 선생(1667∼1727)이 쓴 <외암유고>의 글이 마을의 유래를 알게 해 준다.

마을 앞에서 바라본 풍경(동쪽). 우측 끝 솟을대문이 보이는 집이 참판댁이다.
 마을 앞에서 바라본 풍경(동쪽). 우측 끝 솟을대문이 보이는 집이 참판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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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 있는 무논. 아직 모내기를 하지 않은 논 물 위에 비친 산 그림자가 아름답다.
 가까이에 있는 무논. 아직 모내기를 하지 않은 논 물 위에 비친 산 그림자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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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보는 외암마을의 모양은 동서가 긴 타원형이다. 마을은 어귀인 서쪽이 낮고 동쪽과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동고서저(東高西低) 형상이다. 이러한 지형조건을 고려해서 지은 집들은 거의 서남향을 한 채 앉아 있다. 마을 앞으로는 꽤 너른 개천이 흘러가고 있다. 개천이 마을의 안과 밖을 가른다. 개천 다리를 건너가면 마을로 들어간 것이고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아직 마을 밖에 있다는 뜻이다.

마을 입구의 다리를 건너가자 가장 먼저 나그네를 맞이하는 것은 '巍岩洞天(외암동천)'과 '東華水石(동화수석)'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반석과 물방앗간이다. 외암(巍岩)이란 조선시대 후기 학자인 외암 이간(1667∼1727)의 호이다. 후에 외암(巍岩)이라는 한자가 외암(外巖)으로 바뀌어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동천이란 신선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동화란 동쪽의 으뜸이란 뜻이다.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들이 사는 마을에 대해 자부심을 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 고샅길.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 고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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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길로 들어설까 잠시 망설이다가 6백 년 된 정자나무가 서 있는 고샅으로 들어선다. 마을의 터줏대감답게 정자나무의 풍채가 매우 위풍당당하다. 정자나무 바로 위에는 새로 집을 고치는 공사가 한창이다.

길은 위·아래, 좌우 사방으로 샛길을 뻗치고 있다. 담장과 담장 사이로 난 아늑한 길이다. 흔히 고샅이라고 부르는 길이다. 돌담은 나그네에게 길의 끝을 쉽게 드러내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나그네의 궁금증을 유발해 발길을 이끄는 것이다.

돌담이 무척 아름답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돌담의 아름다움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한다. 하나같이 천편일률적인데다 무너진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돌담. 돌담들은 너무나 생생해서 전혀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다. 게다가 한 군데 허물어진 곳도 찾아볼 수 없어 이곳에 사는 개인의 영욕과 부침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없다. 내게 이 아름다움은 너무나 밋밋한 것이다.  

대문 굳게 잠근 기와집의 폐쇄성

참판댁 솟을대문 밖에서 견학온 아이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5~1950)이 살았던 집이라 해서 참판댁'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의 전형적인 기와집 가운데 하나다.
 참판댁 솟을대문 밖에서 견학온 아이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있다.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5~1950)이 살았던 집이라 해서 참판댁'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의 전형적인 기와집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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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댁. 가랍집에서 본댁 사이 공간에 펼쳐진 숲이 아름답다.
 송화댁. 가랍집에서 본댁 사이 공간에 펼쳐진 숲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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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60여 호가량이 모여 사는 이 마을에서 기와집은 10여 채가량이 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외암리를 대표하는 기와집은 건재댁이나 송화집이다.

건재고택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만난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건재고택을 향해 간다. 영암군수를 지낸 이상익(1848~1897)이 살던 집이어서 '영암집'이라고도 부르는 건재고택은 중요민속자료 제233호로 지정될 만큼 조경이 뛰어난 건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고택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엊그제 신문에서 건재고택이 작년에 외지인에게 넘어갔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까치발을 해서라도 안을 들여다 보려고 했지만 담장이 높아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건재고택을 들여다보지 못한 서운한 마음을 달래러 이번엔 송화댁을 향해간다. 처음 집을 지었던 이장현(1779~1841)이 송화군수를 지내 '송화댁'이라는 택호가 붙은 고택이다. 건재고택에 버금갈 만큼 조경이 아름답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송화댁 담장은 조금 낮아서 안이 살짝 들여다보였다. 하인들이 거처하던 가랍집에서 본채까지 이어지는 소나무숲이 매우 아름다웠다. 구부러진 노송이 한껏 멋을 부리며 서 있다.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초가집의 개방성

처마를 맞대고 있는 초가집. 공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처마를 맞대고 있는 초가집. 공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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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 외벽에 걸린 소쿠리·바구니·채반·들.
 초가집 외벽에 걸린 소쿠리·바구니·채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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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초가집 구경에 나선다. 어린 시절, 초가집에서 자란 나로선 아무래도 기와집보다는 초가집에 더 애착이 가는 게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초가집과 기와집의 차이는 지붕의 내구성에 있다. 기와지붕은 한 번 이어 놓으면 몇십 년은 가지만 초가지붕은 해마다 새로 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초가지붕이 품은 아름다움 속에는 노동집약적인 옛 농경사회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어렸을 적, 초가지붕 잇던 때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추수가 끝난 늦가을이면 집집마다 날을 잡아 지붕잇기를 시작한다. 마당 한켠에선 지붕에 얹을 용마름을 엮어 나가고 지붕 위에선 지붕의 썩은새를 걷어낸다. 썩은새를 걷어내고 나면 그 속에서 황갈색 굼벵이가 우글우글했다. 굼벵이는 그렇게 썩은 짚더미를 먹고 사는 유충이었다.

지붕을 이고 나면 이번엔 참새가 집을 삼고 들락거리면서 새끼를 낳기도 한다. 한겨울 지붕에다 살짝 사다리를 걸쳐놓고 지붕 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참새 새끼를 잡아서 구워먹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초가집과 기와집의 차이는 내구성에 있는 게 아니라 타 생명체와의 공존 여부에 있는지 모르겠다. 초가집은 평화지향적인 건축이다. 외관상으로도 그렇지만 내용상으로도 그렇다.

아름답지만 점점 병들어 가는 마을

마을 가운데 방치된 흉가.
 마을 가운데 방치된 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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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집 뒤뜰의 장독대.
 기와집 뒤뜰의 장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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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점점 제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초가집이나 기와집들조차도 찬찬히 안을 들여다보면 깊이 병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가구(架構)만 그대로일 뿐 집 안 곳곳은 살림에 편리하도록 현대적으로 고쳐져 있다. 겉무늬만 그럴싸하게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데 이 민속마을의 변신도 무죄일는지. 

마을 안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주인에게서 버림받은 지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흉가도 있다. 담장 너머로 바라다보이는 흉가 뒤뜰은 다북쑥만 수북하게 돋아나 쓸쓸함을 더하고 있다. 근래에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연자방아가 낯설게 느껴지는 고샅길에서 멀지 않은 곳엔 강원도 어디쯤에선가 본 적 있는 너와집 흉내를 낸 집이 있다.

또 새마을운동의 이력을 그대로 간직한 슬레이트 지붕 집 한 채가 독립군처럼 서서 'My Way'를 외치고 있다. 어쩌면 이 슬레이트 집은 독립군이 아니라 유마힐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픈 것은 중생이 아프기 때문"이라고 했던 유마힐 거사처럼 "마을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나도 병들어 있다"라고 슬레이트집은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 난 이곳에 관광온 사람이 아니라 병들어 가는 아름다운 마을에 문병하러 온 문병객인지도 모른다.

이 마을을 병들게 한 것은 무엇인가. 속도를 제일로 삼는 세상의 흐름 때문인가 아니면 조그만 불편함조차 견디지 못하는 우리들 몸이 지닌 타고난 경박성 때문인가. 세태 탓이든 우리 몸이 가진 경박성 때문이든지 간에 민속마을의 변화를 바라보는 내 감회는 쓸쓸할 수밖에 없다. 이 마을은 단지 충청도의 한 시골마을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고향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고향이란 공간은 전통을 간직한 곳이다. 고향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전통의 황혼을 넘어 전통의 캄캄한 밤중을 걸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전통과 변화는 상반된 가치이다. 전통이 방패라면 변화는 창이다. 창은 방패를 뚫으려 하고 방패는 창의 날카로움을 막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전통이라는 가치는 변화라는 창의 공세를 끝까지 견뎌내지 못한다.

변화라는 창에 속수무책으로 찔려버린 외암리 민속마을엔 무수한 생채기가 나 있다. 외암리 마을에 머문 세 시간은 그런 생채기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난 전통으로부터 혹은 고향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가. 무정한 저 세월이여. 

마음이 슬슬 아려오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마을 구경을 접고 마을 뒷산인 설화산으로 향한다. 길가에 있는 엘크 사슴목장 울타리엔 외암리에 현장학습차 온 아이들이 재잘거리고 있다. 마을 구경보다 엘크 사슴과 노는 게 더 재미있는지 장난이 한창이다. 나에게 산이 그렇듯이 아이들에겐 동물이야말로 또 다른 마음의 고향인지 모른다.

또 다른 고향을 찾아가는 내 발걸음이 가볍다. 고향의 모습을 마음껏 포식해서인지 모른다. 요즘 사람들은 끄떡하면 비움에 대해 말하지만 난 채움이라는 말에 훨씬 더 끌린다.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비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움과 채움은 변증법적으로 통일되는 말이다. 콧노래 대신 김영남의 시 '초가집이 보인다'를 흥얼거리면서 산길을 걸어간다.

지붕 위론 박넝쿨이 올라가고 있고,
울타리엔 개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집.
방에는 거미가 수없이 세들었지만
아직 향기로운 술독이 익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아랫목에까지 둥지를 틀어올 무렵이면
휘파람으로 달빛을 불러들이고
한 접시의 밤하늘을
술안주로 차려오는 집.
그를 열면, 그런 집이 보인다.
              - 김영남 시 '초가집이 보인다' 일부

사양하고 싶건만 한사코 동행해주겠다는 빗줄기. 빗줄기와 더불어 설화산 고개를 넘어간다.  아, 이 고개 어딘가에 주막이 있다면 막걸리 몇 잔에 칼칼해진 목을 축여도 좋으련만 ….

덧붙이는 글 | 지난 토요일(5.23)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충남 아산 , #외암마을 , #초가집 , #기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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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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