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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가 아내와 처가(妻家) 중심으로 되면서 장녀인 아내를 둔 남성일수록 결혼만족도가 낮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에 대해 성균관대 고지영 교수는 '최근 아내와 처가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남성들이 맏사위를 기피하는 현상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며 '장녀는 친정 부모와 형제들에 대한 책임감이 높은 데다 독립심도 강해 부부생활에서 리더십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동아일보> 2007년 12월 27일, <처가시대…"장녀 아내는 피곤해" 가운데>

대한민국에서 첫째(흔히 장남)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하게 형제 가운데 처음으로 태어났다는 것 이상의 많은 의미를 갖는다. 70·8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공순이'가 돼야했던 우리 '큰 언니'들이 그러했으며, 최근 종영한 드라마 <에덴의 동쪽>에서 동철(송승헌 분)이 겪은 파란만장한 인생도 결코 그가 장남이었다는 사실을 떼어놓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1남 3녀 가운데 맏딸로 살아가고 있는 최아영(24)씨 역시 마찬가지. 비록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저당 잡혀야 했던 옛날의 '첫째'들과는 다르지만, 최씨 역시 장녀라는 이유로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많다. 게다가 막내 남동생과의 나이 차이는 무려 17살. 동생과 함께 밖에 나가면 '애 엄마'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했던 그녀가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장녀로서 살아가는지 그 삶을  살짝 엿보기로 하자.

"엄마, 아빠, 제발 차별만은 말아줘"

아영 씨와 막내동생 성빈 군
 아영 씨와 막내동생 성빈 군
ⓒ 박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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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아영씨는 딸 셋, 아들 하나의 4남매 가운데 첫째다. 아래로 고3, 중3의 두 여동생이 있고, 끝으로 올해 유치원에 다니는 남동생이 있다. 막내 남동생과 그녀의 나이 차이는 무려 17살. TV 속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이미 딸 셋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씨의 부모가 막내 남동생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녀의 어머니가 바로 큰 며느리였기 때문이다.

"그냥 큰며느리로서의 자존심? 어머니에겐 이런 게 있었던 거 같아요. 아버지는 큰 아들이었지만 꼭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었거든요. 작은집에서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며느리가 딸만 셋을 낳으니 할머니 댁에서 들어오는 은근한 압박도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몸이 안 좋은데도 어머니가 막내 동생을 가지게 된 거죠."

최씨의 나이 18.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어느 날 어머니가 최씨에게 말을 건넸다.

"아영아, 엄마가 동생 하나 더 갖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아영 씨는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어머니는 임신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최 씨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달았다. 바로 막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기, 아들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기였다.

그렇게 최 씨에게는 18살의 나이에 막내 남동생이 생겼다. 부모님은 최 씨의 바람대로 아들이라고 해서 위의 딸들을 차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딸들이 차별 받는다고 느낄까봐 더 잘해주는 경우도 많았다고.

"언젠가 한번은 아버지가 막내 동생 선물을 사 온 적이 있었는데, 그게 괜히 신경 쓰이셨는지 딸들에게는 용돈을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일부러' 차별하지 않으시려고 노력하시는 태도를 보이셔서 남동생이 태어난 후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요."

"막내 동생 통해 부모 마음 느껴"

17살이라는 나이 탓에 그녀는 막내 동생과 함께 겪은 에피소드도 많다. 어느 날 동생과 같이 버스를 타고 카드를 찍었는데, 기계에서 "학생입니다"라는 멘트가 울린 것이다. 그러자 버스기사님이 "아니, 왜 애 엄마가 학생이냐"며 소리를 쳤다는 것. 뒤에 버스로 올라오던 '진짜' 어머니가 해명을 하셔서 겨우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마트와 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 동생을 데리고 가면 언제나 사람들 시선이 그들을 향한다. 특히, 부모님은 앞으로 막내 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학부모 총회에 최씨를 보낼 예정이라고. 아무래도 '젊은 엄마'라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녀는 당분간 더 받아야 할 운명인가 보다.

아닌 게 아니라 최 씨에게 막내 동생은 정말 자식 같은 존재다. 남동생에게 무조건 잘해주기만 하는 다른 여동생들과는 달리 최씨는 때로는 엄하고 때로는 잘해주는 '아버지'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다 보니 잘 따르던 동생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이제 7살이다) 점점 최씨를 멀리하기도 한다.

"잘하라고 타이르는 것인데도 동생이 '엄마나 아빠도 아니면서 뭐라고 한다'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면 마음이 아프죠. 정말 부모 마음을 느낀다니까요. 하하~" (최씨는 심지어 막내 동생이 짜증을 낼 때면 '억장이 무너진다'라는 표현까지 썼다.)

"장녀로서 느끼는 책임감 만만치 않다"

최아영 씨
 최아영 씨
ⓒ 박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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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인 아영씨는 요즘 들어 부쩍 첫째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는 중이다. 밑에 동생들이 고3, 중3, 유치원에 다니는 까닭에 앞으로 부모님의 힘만으로는 동생들을 키우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녀에게는 동생들을 키우고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이 돌아온다.

"제가 전주에서 대학을 다니는 것도 부모님 뜻이 큰데, 부모님은 제가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것을 원치 않으세요. 곧 졸업인데, 취업도 전주나 전북에서 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무엇을 하더라도 가족과 저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처지에요. 사실, 그 전까지는 제가 철부지여서 그런 생각을 못하고 부모님과 부딪히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런 첫째로서의 자각(?)을 하는 계기가 있었죠."

그녀가 첫째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게 된 건 바로 지난 해.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나면서였다. 가족과 떨어져 보낸 약 7개월간의 시간동안 그녀는 철부지 아이에서 가족을 생각하는 장녀로 거듭났다.

"가족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닌데 제가 호주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준 건 부모님의 투자라고 봐요. 동생들한테 써야 할 돈까지 저한테 쓴 거죠. 당연히 저로서는 부담감이 더 커지지만 어느 정도 제 희생을 통해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껴요. 요즘엔 성빈이(막내 동생)는 내가 키우겠다라고 말한다니까요. 하하~"

첫째라서 본 덕과 혜택이 있는 만큼 그걸 다시 동생들에게 베풀어야겠다는, 매우 첫째다운 생각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주위 친지어른들에게 "네가 잘돼야 밑에 동생들도 잘된다"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고 한다. 첫째치고 그런 말 듣지 않은 사람 없겠지만, 최근에는 나이가 나이인 만큼(이제 스물 넷이다) 결혼과 관련해서도 그런 비슷한 말을 듣는다. 바로 안정된 조건을 갖춘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부모님은 안정을 중요시 했어요. 교대를 가라고 요구하시거나 아니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한 것 등이 그랬죠. 결혼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안정적인 배경이나 조건을 많이 따지시는데, 전 그냥 결혼 만큼은 제 맘대로 하고 싶어요. 어쨌든 지금까지 나름대로 희생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내년 2월 대학졸업 예정인 그녀는 첫째로서 느끼는 부담감과 책임감을 자신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모습이었지만, 또 그 안에서 그녀 나름의 길을 개척해가고 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21세기형 첫째', '진화한 장녀'등이 될 수 있겠다. 분명, 무조건적인 희생이 강요되었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그만큼 시대가 변하기는 했다.)

"아, 그런데, 얼마 전 장녀 기피 현상이 기사로 나오던데, 저 어떡하죠?"
"네? 그거야, 잘 알아서…."

"언젠가는 동생들도, 특히 이제 7살 된 막내 동생도 첫째 누나의 이런 고민과 책임감을 알아 줄 날이 오지않을까요?" 인터뷰 말미,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줬다.

그러자 이어진 아영씨의 한마디.

"글쎄요, 한 10년 뒤쯤?"

요즘 같은 저출산이 보편화된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듣기 어려운, 그러나 재미있는 인터뷰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동생, #장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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