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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 신도시 중소형 아파트 당첨자가 발표된 지난 2006년 5월 4일 오후 경기도 분당에 있는 주택공사 견본주택을 보러온 당첨자들이 당첨확인 절차를 거치기 위해 줄을 서있다.
 판교 신도시 중소형 아파트 당첨자가 발표된 지난 2006년 5월 4일 오후 경기도 분당에 있는 주택공사 견본주택을 보러온 당첨자들이 당첨확인 절차를 거치기 위해 줄을 서있다.
ⓒ 오마이뉴스 안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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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를 잘하려면 결혼과 동시에 종자돈 만들기에 매진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동산 투자를 할 수 있죠. 집 한 채는 있어야 재테크를 할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투자 기회라는 것이 찾아와요. 집 한 채 갖고 있으면 그건 또 하나의 종자돈이죠. 자산을 담보로 낮은 이자의 돈을 끌어 쓸 수 있으니까요. 40대만 되어도 아이들 교육비 때문에 종자돈 만들기가 어렵죠. 그러나 집 한 채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면 자금 융통의 여유가 생기니까 투자 밑천은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죠. 그렇게 해서 괜찮은 저평가 주식 한 종목만 잘 찍어도 인생 점프 업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 어느 투자 전문가의 맞벌이 부부 재테크 전략-

부채가 종자돈이다?

재테크 전략으로 자주 등장했던 이야기가 종자돈부터 만들라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예적금만으로는 수억이 필요한 노후나 유학까지 고려한 아이들 교육비 마련이 어렵기 때문에 종자돈을 불려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종자돈으로 부동산에 투자해 소위 대박을 터트린 사례들이 신문지상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자산 증식이 이뤄진 성공 사례들을 접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급해지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투자를 통해 돈을 불려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증까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종자돈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소비를 통제해 저축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투자 전문가의 조언에 따르면 종자돈은 저축이 아닌 어떻게든 빚을 잘 내는 가계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종자돈을 만들어 빚내서 집 사고 그 집의 자산 가치가 상승하면 새로 대출 한도가 늘어 새로운 투자 밑천을 확보할 수 있는데 그것이 또 하나의 종자돈이라는 것이다.

종자돈 만드는 사이 자산가치가 더 빨리 뛰어버린다

재테크가 유행하던 초기에는 종자돈을 만들기 위해 버는 돈의 대부분을 저축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미디어를 통해 자주 소개되었다. 그러나 부동산 자산 시장에 버블이 발생하면서 주택가격이 큰 폭으로 뛰기 시작했다.

허리띠를 졸라가며 종자돈을 만들어 집에 투자하려 했던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결국 부동산 투자를 위한 종자돈은 저축이 아닌 장기주택담보대출이 더 유효해 보이기 시작했다.

자산의 가치가 종자돈 형성보다 더 빨리 상승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뒤늦게 무리한 자산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자산의 가격이 상승하기 시작하는 시점에는 사람들이 집이나 주식에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심을 갖게 되고 그 맹목적인 기대심이 일반화되면서 투기 수요가 늘어 자산 가치가 급상승하면서 비이성적 과열 국면까지 가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행동경제학에서는 가격 간 피드백(Price - to-price feedback) 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자산의 본래 내재 가치로 가격이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가격이 올랐기 때문에 가격이 더 올라가는 것이다. 종자돈은 이제 빚을 내는 능력으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남보다 빨리 빚을 내서 투자해야 남보다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자라는 것이다.

그나마 소비를 적절히 통제해 저축을 하는 건전한 의미의 종자돈 바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의 소심함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재테크 척도인 종자돈 바람이 오히려 저축률 꼴찌 만들어

최근 미국의 저축률이 화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인들은 소비 중독 환자들과 같이 여겨지기도 했다. 미국 하면 떠오르는 것도 명품, 쇼핑센터, 신용카드와 같은 것들이었다. 미국인들의 보유 신용카드 수는 13억 장이라고 한다. 이는 미국의 모든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들이 4장 이상의 신용카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만큼 정신없이 소비하고 저축은 거의 마이너스 수준이었다. 그러던 미국이 저축을 하기 시작했다.

소득이 감소하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증가하다보니 소비의식이 위축되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저축률이 오르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소비의식의 위축이나 경제변수의 자극만이 미국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보다는 그동안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고 물질적 풍요를 성공의 잣대로 여기던 삶의 가치관이 변화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일부 중산층은 중산층의 여유로운 삶의 상징이었던 잔디밭을 갈아엎고 텃밭을 가꾸기도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계부를 쓰는 미국인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제 저축률 꼴찌 자리를 한국이 이어 받고 있다. 종자돈 바람으로 빚만 늘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은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수도 있다. 미국의 중산층처럼 여러 대의 차를 소유하고 정원 딸린 주택에 잔디밭과 수영장을 갖고 살면서 명품을 일상적으로 소비한 삶을 산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저 평범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곳에 소비를 했을 뿐이고 근본적으로 소득이 적기 때문에 저축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었다고 항변할 만하다.

그러나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공통점을 갖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첫 번째 공통점은 자신의 소득 수준을 따지지 않고 지출부터 하는 잘못된 경제관념이다. 지출의 종류가 무엇이었든 간에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의 균형을 맞춰 가정경제를 관리하려는 합리성이 부재했다는 것이 문제이다. 수입과 지출의 균형이 깨져도 신용카드와 마이너스 통장, 주택담보 대출의 추가여력 같은 것을 믿고 지출을 멈추지 않는 무모함이 공통점이다.

미국인들은 자동차와 명품 같은 것을 위해 빚을 냈기 때문에 천박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녀교육이나 주거비용 같은 것을 위해 빚을 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결국 자동차가 되었든 자녀 교육비가 되었든 자신의 소득 이상의 지출을 통제하지 못하는 비합리성이 문제인 것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부동산 자산이나 주식 같은 자산 가치가 상승하게 되면 부채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여긴 착각이었다. 심지어 그 빚이 종자돈이라고까지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더불어 정부의 정책이나 쏟아지는 전문가들의 전망이 시장 만능주의로 흘러 투기적 욕심마저도 전혀 통제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다.

투자를 통해 쉽게 부자되는 사람들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경제에 대한 왜곡된 사회적 통념이 무분별하게 자라도록 방치하고 심지어 부추겼다는 점에서 정부를 비롯해 일부 경제 전문가들 모두 사회적 비난이 되돌아갈 날이 있을 것이다.

'채무노예 사회'에서 벗어나자

어찌되었건 이제 미국의 변화를 보며 우리의 모습을 냉정히 돌아봐야 할 때이다. 이제 우리의 모습은 월급통장은 마이너스 통장, 생활비는 신용카드, 학자금 대출과 보험 약관대출, 주택 담보대출이 종자돈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빚 갚으며 사는 사람들이 사회의 허리 계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때 미국의 이와 비슷한 생활상을 폴 크루그먼은 '채무노예 사회'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채무노예 사회였던 미국은 결국 신이 내린 신용등급이라 할 만큼의 미국 경제 불패 신화를 뒤로 하고 언제 끝날지 모를 경제위기에 전 세계를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다.

빚은 절대 자산이 아니다. 부채는 어느 순간 경제환경 변수가 조금이라도 변하면 통제할 수 없는 폭탄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바로 미국인들의 물질지상주의 삶의 철학이 만들어낸 왜곡된 경제 마인드, 빚내서라도 쓰고 살아야 부자이며 빚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황당한 사회적 의식이 만들어낸 필연이다.

부동산 시장과 금융 시장 모두에 불확실성을 안고 사는 우리, 빚으로 인생을 점프업 시킬 수 있다는 황당한 믿음을 아프게 도려내야 할 때가 아닐까.



태그:#종자돈, #저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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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가계발 금융부실이 크게 우려된다. 채무자 보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수많은 채무자들을 빚독촉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채무자들 스스로도 이제 국가를 향해 의무만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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