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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로에서 흘러나오는 슬래그.
 용광로에서 흘러나오는 슬래그.
ⓒ 위키피디아 공공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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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지난번에 말씀 드렸듯 피츠버그는 큰 부자가 아닌 한, 별로 살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인구과잉, 환경오염, 계층격차 등 심각한 문제들이 오랫동안 산적해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피츠버그 시민들이 이 모든 문제를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저항의 역사였듯이, 피츠버그의 역사도 한편으로는 힘없는 사람들이 끈질기게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는 긴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현재의 피츠버그에도 거대자본의 유산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악덕 자본가들의 이름을 딴 공원, 도로, 건물, 대학과 같은 별로 해롭지 않은 유산도 있지만, 철강이라는 단일 산업에 의존하는 도시를 만들어놓고는 대책 없이 유기해 버려 영구적인 폐해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한때는 피츠버그의 생명줄이었던 중공업이 떠나가고 서비스산업 위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고, 융자금을 갚지 못해서 살던 집을 은행에 뺏기고, 의료보험을 잃고, 자존감과 안정된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재산과 인권을 지키려고 싸웠지만 악덕 자본가들 앞에서 계란으로 바위치기로 끝난 경우가 많았습니다.

취약한 노동조합 : 똘똘 뭉친 자본가, 민족별로 갈라진 노동자

피츠버그는 제철산업과 함께 흥하고 망한 도시입니다. 피츠버그의 강, 토양, 나무, 물고기, 기타 야생동물들은 한 세기 동안 지독한 매연과 황산을 비롯한 온갖 독성 화학물질 쓰레기의 무단 방류와 투기에 시달렸습니다. 자본가들은 무자비하게 환경을 파괴하는 한편 이민 온 노동자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하여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홈스테드 전투에서 보듯이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 맞서 힘겨운 저항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카네기, 멜론, 프릭 등 대자본가들에 비해 수적으로 5만 배가 넘었던 노동자들은 결국 지고 맙니다. 이유는 복잡하지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공장 소유주들은 똘똘 뭉쳐있었으며, 돈이 한없이 많았고, 시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데 반하여, 노동자들은 흩어져있었고, 가난했으며, 지방자치단체에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통일된 목표도 없고 조직되지 않았고 자원도 없는 노동자들이 숫자가 아무리 많은들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식민정부가 한국인들을 분열시켜 통치했던 것처럼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다스렸습니다. 노동자들의 단 한 가지 무기인 머릿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이유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1870년에서 1920년 사이, 피츠버그의 인구는 8만 6천명에서 거의 58만 8천명으로 급증했는데 이는 유럽에서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1800년대 말에는 주로 아일랜드, 영국, 독일에서 이민을 왔고 1900년에서 1920년까지는 폴란드, 이탈리아, 슬로바키아에서 주로 왔습니다. 이민자들로 인해 노동시장은 공급과잉이 되었고 공장주들은 싼 임금에 마음껏 노동자들을 부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민자들은 미국의 사정을 잘 몰랐고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각 집단이 서로 동일시하기보다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타민족들로 인식했습니다.

피츠버그의 제철노동자 가족(1935년 사진).
 피츠버그의 제철노동자 가족(1935년 사진).
ⓒ 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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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중국인들과 특별히 가깝게 느낄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 사람들은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까지 독일인들과 동일시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민을 온 후 각 민족 집단들은 생존을 위해 가까이 살면서 서로 돕고 뭉쳤고, 다른 민족 집단과는 제한된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상대로 인식하고 경계했습니다. 공장주들은 각 집단의 분열과 경쟁을 이용하여 낮은 임금을 유지했습니다.

예를 들어, 1880년대에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고용하지 않는 공장이 많았고 심지어는 "아일랜드인들은 지원할 필요 없음"이라는 표지를 내걸기도 했습니다. 독일계와 영국계 이민자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이런 차별에 가담했습니다.

이민자들의 분열은 시간이 흐르면서 특정 민족집단의 특정 직업 집중현상 때문에 더욱 공고해지기도 했습니다. 1900년 당시 폴란드인 이민자들의 48%가 노동계층에 속했고 30%는 제철노동자였습니다. 이탈리아인 이민자들은 61%가 노동계층이었지만 제철노동자는 2%에 불과했습니다. 특정 직업 분야에 한 이민집단이 발을 들여놓으면 같은 공장 또는 같은 산업분야에 같은 민족 계열만을 고용하고 타민족은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폴란드인 제철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같은 공장에서도 폴란드인들은 용광로에서 일했고, 슬로바니아인은 평로에서 작업을 했으며, 이탈리아인들은 공사나 건설을 했다고 합니다.

피츠버그의 동네들이 "폴란드 언덕"이니 "작은 이탈리아" 또는 "아일랜드 타운" 등의 이름이 붙은 빈민굴로 나뉘어 있었던 것도 이민집단 간의 분열을 심화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직장에서도 따로 일을 하고, 출신 민족별로 각기 따로 떨어진 동네에서 살면서 그 동네의 교회를 다니고 다른 집단을 불신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질적인 집단을 한데 끌어 모아 노동조합이란 이름으로 단결을 이루기란 너무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일상생활까지 뻗쳐온 자본의 손길... 목표는 '고분고분한 노동자 만들기'

대니얼 체스터 프렌치의 책 읽는 노동자상. 1907년 작품. 이 작품은 노동자들을 위해 도서관을 지은 카네기의 "숭고한" 뜻을 기리려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니얼 체스터 프렌치의 책 읽는 노동자상. 1907년 작품. 이 작품은 노동자들을 위해 도서관을 지은 카네기의 "숭고한" 뜻을 기리려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 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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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이 실패하자 자본의 힘은 일터를 넘어서 공동체에까지 뻗쳐왔습니다. 프릭과 같은 신흥 산업부호들은 노동자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고용, 임금, 작업조건 뿐만 아니라 노동자 계층 주거단지의 생활조건까지도 좌지우지했습니다. 1930년까지는 산업부호들이 피츠버그를 완전히 장악하여 경제적인 독재체제를 이루었습니다.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이 집에 있는 시간과 생각조차도 통제하려 했습니다. 카네기 같은 사람들이 도서관을 지은 것은 노동자들이 여가 시간에 노름을 하지 않도록 유도하려는 목적이었으며, 빈민굴에는 어린이 놀이터를 짓고, 사회복지사를 두고 팀 스포츠를 가르쳐 어린이들이 비뚤어지지 않고 "건전한 노동자"로 자라나도록 했습니다.

공장주들이 금주운동(禁酒運動)을 적극 지지한 것도 역시 노동자 통제의 일환이었습니다. 심지어 피츠버그 시 내외에 공원과 유원지를 만들어 놓은 것도 노동자 가족을 관리하는 한 방법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의 불만이 축적되면 저항이 일어나므로 적당히 스트레스를 풀면서 온순한 노동자로 남아있게 하자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 공장주들이 사용했던 명분은 술 마시고 노름하고 패싸움을 하던 노동자들을, 열심히 일하고 고분고분한 '윤리적인' 준법시민으로 개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공황이 닥치면서 피츠버그의 노조는 더욱 무기력해졌습니다. 처음부터 취약했던 노동기준은 더욱 유명무실해졌고 노동자들이 약간이나마 축적해놓은 경제력도 탕진이 되었습니다. 노조가 해체되거나 무력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살인적인 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을 착취하는 공장들이 되살아났습니다.

갈수록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전체 인구의 절반이 비참한 빈곤의 수렁에 빠지자 정치인들도 노동자들이 조직화되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습니다.

상원의원 로버트 와그너는 "단순히 경제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사회적, 경제적인 붕괴를 막기 위해 필사적인 투쟁을 하고 있는 중이다"고 했는데 이는 정치인들이 노동자 혁명을 두려워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미국 정부는 실업자들과 저소득층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점점 인기를 얻게 되자 1917년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이 이제 미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피츠버그의 케니우드 유원지. 1930년대에 탈것을 많이 만들어 놀이공원을 만들었습니다.
 피츠버그의 케니우드 유원지. 1930년대에 탈것을 많이 만들어 놀이공원을 만들었습니다.
ⓒ 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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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의 신화... 한쪽에선 굶고, 다른 쪽에선 먹을거리 파기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로 미국 정부는 일련의 정책을 채택했습니다.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국립공원과 도로 등을 건설하면서 이를 위해 많은 저임금 노동직을 창출했는데, 여기에 동원된 노동자들은 하루에 고작 10센트를 벌었고 국가경제 규모에 비하여 새로 창출된 고용의 규모는 미미했습니다.

그럼에도 공익광고, 신문, 라디오 등을 동원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 고용되어 국가경제가 되살아나고 있다고 줄기차게 떠들어대어 결국 많은 사람들이 뉴딜정책이 성공했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어 국민을 안심시켰습니다(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훌륭한 제도이지만 아마 10년 정도 후면 바닥이 날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일체 보도하지 않았던 더욱 중요한 정책변화는 대기업에 대한 거액의 지원금 지급, 기업의 이윤추구의 철저한 보호, 물가 하락을 방지하기 위한 식료품과 곡물의 대량 파기(당시 미국 국민의 25%가 실업상태였고 수많은 시민들이 굶주리고 있었는데도) 등 파렴치한 기업친화적인 방향전환이었고 이는 대공황 이후 몇 세대가 지나도록 계속됩니다.

피츠버그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단합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이후 이민이 크게 줄어들었고 2차 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입니다. 펜실베이니아 주 서남부의 노동계층이 대거 군에 입대하면서, 일차적으로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군에 입대하지 않은 노동자들(주로 여성들)은 공장과 탄광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며 적을 물리칠 무기를 함께 생산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서로 동지애를 느꼈다고 합니다.

피츠버그를 장악했던 자본가들의 영향력은 노동자들의 연대의식 증가와 철강산업의 쇠퇴로 많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거대 자본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피츠버그 지역의 대중문화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거대 쇼핑몰이 된 과거 홈스테드 제철공장터에 남아있는 굴뚝.
 지금은 거대 쇼핑몰이 된 과거 홈스테드 제철공장터에 남아있는 굴뚝.
ⓒ flick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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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노예가 떠안긴 '동네 코앞 독극물 산'.... 스위스헬름 파크의 저항

피츠버그 시민들이 자본의 힘에 저항했던 역사적인 실례는 많이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진행 중인 용산 철거민의 저항과 평택의 쌍용자동차 투쟁을 연상시키는 홈스테드 전투가 그중의 하나이고, 현재 제가 살고 있는 "스위스헬름 파크"라는 동네에도 긴 저항의 역사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철강은 엄청난 양의 독성 쓰레기가 발생하는 산업입니다. 제철 쓰레기 중에서도 독성이 심한 것으로, 철광석을 용광로에서 가열할 때 나오는 액화 칼슘과 이산화규소 등을 포함한 불순물 찌꺼기를 슬래그(slag)라 합니다. 

1930~50년대에 거대 제철소에서 독성 쓰레기를 실어내 와서 버려주는 사업으로 큰돈을 번 "듀케인 슬래그(Duquesne Slag)"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듀케인 슬래그는 다른 회사보다 월등히 싼 요금으로 쓰레기를 처리해 주었는데 이 회사가 요금을 낮출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슬래그를 멀리 싣고 갈수록 기차 운송비와 인건비 등은 증가하고 또 매립장 사용료도 따로 내야했는데, 듀케인 슬래그는 피츠버그 시내 경계 안에 있는 땅을 사서 슬래그를 거기다 쏟아부었기 때문입니다. 운송비용도 훨씬 덜 들었고 자회사 땅이니 매립장 사용료도 들지 않았습니다.

듀케인 슬래그가 독성쓰레기 하치장으로 사용한 지역은 환경오염으로 망가지기 전에는 시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했던 "나인 마일 런"이란 곳이며 스위스헬름 파크에서 불과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자연 지대였습니다.

이곳이 슬래그 하치장이 되자 스위스헬름 파크 주민들은 바로 코앞에서 화물열차가 밤낮으로 뜨거운 용액 상태의 쓰레기를 쏟아붓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슬래그를 버릴 때마다 밤하늘이 훤하게 밝아질 정도로 제철 쓰레기는 시뻘겋게 달아있었으며 마치 뒷마당에서 화산이 계속 폭발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슬래그에서 나오는 재와 먼지는 당연히 가정집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의 건강을 해쳤고 산더미처럼 쌓여만 가는 쓰레기 더미는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로 흉했습니다. 비가 오면 슬래그 사태가 나서 토양과 강물을 오염시켰고 나인 마일 런을 길게 흐르던 시냇물은 결국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1955년 더 이상 참지 못한 스위스헬름 파크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유해물질 버리기를 중단하라고 듀케인 슬래그에 소송을 걸었습니다. 당시 주민들은 소박하나마 집을 한 채씩 갖고 있던 비교적 안정된 노동계층이었습니다. 주민들이 힘들여 갹출한 돈으로 "쏘오프, 리드, 앤드 암스트롱"이란 법률사무소를 고용했지만, 같은 법률회사가 수년간 듀케인 슬래그를 변호해왔던 것이 1956년에 들통이 났습니다. 

이에 주민들은 다른 법률사무소로 바꾸었지만 이 사건이 심리가 되기 전에 듀케인 슬래그는 피츠버그 시의회를 설득하여 나인 마일 런에 쓰레기를 하치하는 것이 합법적이 되도록 법규를 바꾸게 했습니다.

결국 재판도 해보지 못하고 주민들이 참패를 당한 셈이 되었습니다. 시의회는 듀케인 슬래그가 쓰레기를 더 이상 버리지 못하게 되거나 독성 쓰레기를 청소해야 한다면 기업의 이윤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이를 합법화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사람의 생명과 자연보다 기업의 이윤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회전 화물칸에서 슬래그를 하치하는 기차.
 회전 화물칸에서 슬래그를 하치하는 기차.
ⓒ Nine Mile Run W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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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렴치한 자본, 무책임한 시정부-의회... "생명보다 이윤"

스위스헬름 파크 주민들은 그로부터 20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슬래그를 감시했으며 불법행위를 고발하고 끊임없이 민원을 넣었습니다. 시정부와 의회는 무반응으로 일관했으며 듀케인 슬래그 역시 주민들을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힘없는 주민들의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았던 그 가슴 아픈 투쟁을 기억하며 저는 그들의 인내심과 불굴의 의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날에도 스위스헬름 파크는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어있는 동네로 유명합니다. 집 주인들은 소박한 집과 꽃밭과 잔디밭을 정성을 다해 가꾸며, 안전하고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지역운동가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슬래그 하치는 197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때까지 1천 7백만(17,000,000) 세제곱미터, 무게로는 2천만(20,000,000) 톤에 달하는 제철쓰레기기 주거지 바로 옆에 쌓였고 그 자리에 있던 시내가 흐르던 계곡은 완전히 메워졌습니다. 슬래그 하치를 중단한 이유는 환경이나 주민의 건강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수지가 더 이상 맞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슬래그 더미가 피츠버그 시민들의 노력으로 조금은 청소가 되었고 나인 마일 런에는 별로 맑은 물은 아니지만 다시 시내가 흐르고 있습니다. 슬래그 더미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현재 그 더미 위에서 "서머셋 단지"라는 주택개발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슬래그 더미 꼭대기에 새로 주거용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독성 쓰레기 더미 위에 지은 집을 사겠느냐고요? 서머셋 단지의 새집을 분양하는 회사는 구매자들에게 이 집들이 슬래그 언덕 위에 지은 집이라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슬래그 언덕의 표면에는 잔디를 심었고, 구멍을 뚫어 나무도 심었지만 나무는 몇 년이 지나도 거의 자라지 않고 잔디는 뿌리를 내리지 못해 시들시들하고 군데군데 사태가 일어나 흉하게 벗겨져 있기도 합니다.

저는 매일 학교로 출근하면서 슬래그 언덕을 지나가는데 서머셋 단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서서히 암이나 다른 질병에 걸리는 것이 아닌지 미심쩍은 생각이 듭니다. 이웃에 사는 은퇴한 제철 노동자인 할아버지는 옛날에 슬래그 더미 근처에 주차를 해놓곤 했더니 얼마 안 가서 차 바닥이 다 삭아버렸다고 하면서, 제철 쓰레기뿐만 아니라 온갖 화학쓰레기들이 아무런 규제도 받지 않고 버려졌는데 거기 사는 사람들이 온전하겠느냐고 걱정하십니다.

슬래그 언덕. 오른쪽 위쪽이 서머셋 단지.
 슬래그 언덕. 오른쪽 위쪽이 서머셋 단지.
ⓒ Dennis H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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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자본이 남긴 유산

1970년대 한국에서 포항제철이 건립되면서 한국이 제철산업의 세계적 선두로 떠오른 것을 아실 겁니다. 한국과 일본이 더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철강을 생산하게 되면서 피츠버그의 제철산업은 기울게 됩니다. 이윤이 감소하자, 미국의 제철회사들은 미국의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공장을 국내 혹은 외국의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으로 대처했습니다. 그리하여 피츠버그는 유명한 경제 침체기를 겪었습니다.

피츠버그는 이른바 러스트 벨트(녹슨 지대, 즉 쇠락한 공장지대)의 전형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단기적인 이윤 창출에만 몰입하여 장기적인 투자를 하는 데 인색했던 정치인들과 산업 지도자들이 남긴 유산입니다. 요즘도 아스팔트는 곳곳이 깨져있거나 10~15센티미터씩 푹 꺼져있는 곳이 유난히 많고, 전봇대나 신호등 같은 시설물들도 가능한 한 저렴하게만 만들어서 보기에 흉하고, 또 툭하면 망가지거나 고장이 나는데 그러면 최소의 비용으로 땜질하여 고쳐놓는 식이 많습니다. 처음부터 투자를 해서 무엇이든 견고하고 내구력이 있게 만들어 놓기보다는 당장 비용을 절감하기에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피츠버그 시민들은 공공시설의 끊임없는 보수를 감당하기 위해 지방세를 많이 내야만 합니다. 피츠버그 시민들은 연방정부와 주정부에 내는 세금 외에도 지방세로 총소득의 3%를 따로 더 내야 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피츠버그의 문화와 현재 모습에 대해서는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제철공장이 있던 홈스테드와 브래독 지역을 연결하는 노후한 랜킨 다리.
 제철공장이 있던 홈스테드와 브래독 지역을 연결하는 노후한 랜킨 다리.
ⓒ Dennis H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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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 문헌>

Devastation and Renewal, by Joel Tarr.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2003


Lives of Their Own: Blacks, Italians, and Poles in Pittsburgh, 1900-1960, by John Bodnar, Roger Simon, and Michael Weber.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83.


Remaking of Pittsburgh: Class and Culture in an Industrializing City, 1877-1919, by Francis Couvares. SUNY Press, 1985.


The Shadow of the Mills: Working-Class Families in Puttsburgh, 1870-1907, by S. J. Kleinberg.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1989.


http://www.nytimes.com/2001/01/28/realestate/houses-are-to-replace-a-pittsburgh-slag-heap.html

http://www.reason.com/news/show/119998.html

http://www.post-gazette.com/pg/07116/781162-53.stm

http://www.post-gazette.com/pg/09137/970757-53.stm

http://www.pittsburghdiary.com/June/not/nothere.html



태그:#피츠버그, #제철, #슬래그, #카네기, #스위스헬름 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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