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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국 드라마 전문 케이블 TV에서 <한무제> <정관의치>와 같은 정통 사극을 방영하는 것을 제법 흥미있게 봤습니다.

중국 역사물 하면 무술하는 사람들이 괴성을 지르고 훨훨 날아다니면서 한 사람이 수백명도 상대하는 활극을 생각하기 쉽지만 두 드라마는 이와 같은 무협요소가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 정통사극입니다.

한무제와 정관의치에 나오는 당태종은 강력한 중화코드를 나타내는 상징인물들입니다. 중국인들이 중화코드에 관한 드라마를 만들었으니 당연히 두 인물을 극도로 미화하는 내용입니다.

한무제와 당태종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즉위할 무렵 중국은 북방민족(흉노, 돌궐)에게 사실상 조공을 바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길러 북방민족을 물리치고 제국 영토를 크게 넓힙니다. 차이가 있다면 한무제는 앞선 효문 효경 두 황제의 문경지치에 크게 덕을 본 반면 당태종은 당대에 모든 것을 일으켜 세운 것입니다.

북방을 정벌한 두 사람은 이후 조선을 공격했다는 것이 또 하나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조선 침공 결과가 좋지 못했다는 점 또한 같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국사 교과서는 한무제가 조선을 정벌했으며 우리 민족 최초로 외세에 굴복했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상식을 동원해 그 당시 상황을 다시 살펴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입니다.

한무제가 정복한 것은 조선-중국 접경에 있는 위만조선 뿐이지 그 당시 한민족이 세운 다른 나라를 공략했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때 한민족 정세는 단군 조선을 비롯해 새로이 조선민족의 패권 국가로 떠오른 북부여 등 여러 강력한 국가들이 이미 존재할 때입니다.

막강한 군사력의 피해를 입고 얻은 것은 위만조선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격분했던지, 이 전쟁에 종군했던 장수들은 한무제에게 혹독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우리 민족과 악연이 있는 두 사람이지만 객관적으로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치에서도 업적이 많은 당태종에 비해 한무제는 한 제국의 쇠락을 함께 초래한 인물로 지적됩니다.

'한무제'에서는 미국 프로레슬러 존 시나와 거의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배우가 주인공 한무제 유철로 출연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유철이 황제가 돼서 잘 다스렸고 흉노도 토벌했다'는 뻔한 스토리가 재미있는 드라마가 된 것은 위청이란 캐릭터가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한무제의 황후 위씨의 남동생이지만 신분이 낮았던 그는 평생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일관한 인물입니다. 공으로 따지면 한고조 시대 한신과 흡사하지만 처신은 소하와 같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젊은 황제 유철에게 가장 믿을 사람은 처남인 위청뿐이었습니다. 이걸 두고 볼 유력가문 출신 관료들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반발은 위청에 대한 신임을 더욱 두텁게 했습니다.

하지만 황제가 중년의 나이로 넘어가자 긴 긴 세월 황제의 신임을 받아왔다는 자체가 새로운 의심의 출발이 됩니다.

그 무렵, 흉노의 황궁 습격 정보를 탐지한 위청이 다급한 나머지 황제 직속 우림군을 동원해 황궁 경호에 나선 일이 생겼습니다. 흉노의 습격부대는 오던 길을 되돌아가 황제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했는가를 알 길이 없는 가운데 위청이 무단으로 우림군을 동원한 일이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이 군대는 오직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군대였습니다.

어전에 엎드려 죄를 청하는 위청을 황제는 좋은 말로 위로하고 돌려보냅니다. 하지만 위청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한마디를 내뱉습니다.

"네 권력이 너무나 크단 말이냐."

얼마 후 황제와 위청은 바둑 한 판을 즐기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눕니다. 새로이 구상 중인 정책에 대한 의견을 묻는 황제에게 처남이 답합니다.

위청과 같이 권력 주변에서 장수하는 인물들의 단점이라면 할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그는 두루뭉실한 호평으로 일관합니다.

"이미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괜찮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황제의 손에 들렸던 바둑돌이 판 위에 튀면서 바둑판은 순식간에 엉망이 돼버렸습니다.

"이미 얘기를 들었다니, 너는 모르고 나는 아는 것이 무엇이냐."

사소한 꼬투리를 잡으면서 신경질을 부린 황제는 그 자리를 떠나고 얼마 후 위청의 모든 병권이 박탈됩니다.

처남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믿을 수 있었다는 점이 이제 가장 믿기 힘든 이유가 됐습니다. 이제는 태자의 외삼촌이라는 것입니다.

병권을 박탈당한 위청이 조용히 사저에서 세월을 낚는 동안 스무 살짜리 젊은 장군 곽거병은 흉노의 전선에서 펄펄 나는 맹활약을 떨칩니다.

시간이 흐르자 황제는 다시 위청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동안 시간은 황제에게 위청은 어느 선 이상으로 거역할 리가 없는 인물이란 확신을 줬습니다.

"사람들은 짐이 너를 홀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너를 찾지 않은 것은 너만이 나설 수 있는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위청에게 다시 병권을 부여해 흉노 전선의 총사령관으로 삼았습니다.

병권을 빼앗긴 이후의 시간은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으로 빠지느냐 새로운 공존의 길을 찾느냐는 갈림길이었을 겁니다.

수많은 공신들이 이 때 몸을 낮추기를 거부하고 역신으로 몰리는 파국으로 빠지는 반면 위청과 한고조 때의 소하와 같은 사람은 오로지 몸을 낮추는 것으로 일관해 생존했습니다.

드라마에 이렇게 소개되는 위청의 면모는 사마천의 기록에 크게 의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마천 사기의 '위장군표기열전'을 보면 사마천은 동시대의 명장 위청을 진심으로 존경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당대의 양대 명장 곽거병과 비교해 위청은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고 병사들과 동고동락을 할 줄 아는 장수였다고 사마천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서는 한무제의 명군으로서 면모만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화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니 이미 예상됐던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관들의 붓 끝에서 한무제는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합니다.

원나라 때 증선지가 <십팔사략>에서 소개한 한무제의 통치 비결입니다.

'무제 혼자서 독재했으므로 승상들은 차례로 사건에 연좌되어 주살당했다. 그래서 공손하는 승상에 임명되었을 때 울면서 사퇴를 했지만 무제가 노하여 그는 할 수 없이 승상이 되었다. 과연 공손하도 죄로 주살당했다.'

'장탕 조우 박주 의종 왕온서 등의 혹리들은 모두 형벌을 가혹하게 집행했다. 그 때문에 무제의 마음에 들어 중히 씌었다.'

어찌 보면 진시황같은 인물이 아니었나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진시황과 한무제는 왜 다른가를 잘 알려주는 인물이 급암입니다.

어느 날 조정에서 군신간의 대화입니다.

"나는 정치를 부흥시키고자 요순을 본받으려고 하는데 어떠하오?"

"폐하께서는 속으로 욕심이 많으시면서 겉으로만 인의를 행하려고 하시는데 어찌 요순의 정치를 본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무제는 그 자리에서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불쾌해서 회의를 끝내고 내전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측근들한테 무제는 "급암 꽉 막힌 건 알아줘야 해"라고 내뱉었습니다.

말이 씨가 돼서 사상을 일으키고 변란을 불러온다면서 온갖 책을 없애버린 진시황과는 확실히 다른 군주입니다. 그치지 않고 독한 말을 쏘아 붙이는 급암이지만 그가 정권을 위협하는 인물이 아닌 이상 무제는 그를 용납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서 무제는 급암의 직언에 짜증을 냈습니다. 급암은 후일 외직으로 발령을 받고 그 곳으로 부임해 생애를 마쳤습니다.

평생 동안 틈만 나면 불편한 직언을 마다않던 위징을 재상으로 중용한 당태종과 한무제가 여기서 차이가 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차이가 한무제와 당태종 자신들의 됨됨이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급암에게는 위징과 같은 재상의 그릇이 없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한 당태종이 "그가 살아 있었다면 이번 원정을 절대 말렸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그 위징 말입니다.


태그:#한무제, #위청, #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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