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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출발 시간이 4시라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12번 일주도로를 따라 표선해수욕장에 들어섰다. 마침 썰물이라 백사장이 길게 뻗어 있다. 큰 호를 이루고 있는 아름다운 이곳이 바로 학살터였다.

1948년 11월에서 49년 초까지 마을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가 군경에 잡혀 백사장에서 학살되었다. 가시리 마을에서는 500명 이상이 죽었고, 토산1리에는 4·3 사건을 겪은 남자가 한 명만 생존했다고 한다. 인간의 탈을 쓰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도 토벌대는 저질렀다. 아버지를 죽이면서 그 자식들을 불러 모아 만세를 부르게 하였을 뿐 아니라, 시아버지와 며느리를 발가벗겨 놓고 말도 안 되는 짓을 강요했다고 한다. 하얀 백사장을 따라 멀리 바다를 바라보니 마치 그 때의 일이 눈앞에 어른거려 몸서리가 쳐진다.

성산 일출봉으로 갔다. 성산 일출봉 터진목은 메워져서 어딘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지형적으로 볼 때 절이 들어서 있는 곳 같았다.  본래 성산 일출봉은 제주의 본섬과 떨어져 있었으나 40년대 초에 완전히 이어 놓았다. 일출봉 거의 다 와서 좁아진 길목인 '터진목'에서 성산지역의 청년들이 서청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었다. 반대쪽인 '우묵개'에서도 오조리 청년 20여 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한국판 쉰들러 :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移行)

성산포에서는 잊어서는 안 되는 의인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이다. 그는 4·3 항쟁이 일어나던 1948년 당시에는 모슬포 경찰서장이었다. 이 때 군경은 "자수하면 살려준다"하며 주민들의 자수를 강요하였다. 군경을 피해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모두 다 부모 형제요 이웃이었기에 대부분의 주민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수하면 죽음뿐이었다. 조남수 목사와 김남원 민보단장이 나서 문서장에게 자수할테니 주민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하였다. 자수한 100여명의 주민이 경찰서로 갔으나 그들을 맞이한 사람은 서청 대원들이었다. 그러나 문형순 서장은 마을 서기에게 자수서를 받도록 하여 그들의 목숨을 구하였을 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을 함부로 잡아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소위 '자수사건'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검거하는 예비검속을 마을마다 수백 명씩 하였다. 붙잡히면 대부분 집단 총살을 당했다. 그러나 문형순 서장은 계엄사령부의 총살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문서에 '부당(不當)함으로 불이행(不移行)'이라는 서명을 하여 총살 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

읍면별로 수백 명씩 죽어간 예비검속에서 성산포 지역은 오직 6명만이 희생되었다. 문형순 서장은 만주에서 일제와 싸운 독립군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퇴직 후 극장 매표원으로 일하다 쓸쓸히 삶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주도민을 살려낸 그를 기리고 알리는 공덕비는 어디에도 없다.

유골조차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노태우 정권

가해자에게는 항의도 제대로 못하고 의인은 기리지도 않는 민심에 실망하며 12번 일주도로에서 다랑쉬 마을터로 가기 위하여 중산간으로 올라가는 길을 탔다. 비자림 못 미쳐 월랑봉이 나타났다. 이 산이 바로 다랑쉬오름이다. 다랑쉬 마을터와 동굴은 찾지 못했으나 다랑쉬오름은 그 때의 아픔을 기억하는지 우뚝 솟아 있다. 

입구가 콘크리트로 폐쇄된 다랑쉬 동굴이 있는 다랑쉬 오름
 입구가 콘크리트로 폐쇄된 다랑쉬 동굴이 있는 다랑쉬 오름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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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 동굴에는 군경을 피한 마을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1948년 12월 18일 9연대 2대대는 이 동굴 입구에 불을 피워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모두 질식시켜 죽였다. 박석내 학살처럼 연대 교체를 앞두고 9연대가 무리한 전과 올리기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다. 1992년 이곳에서 유골을 발굴했으나 노태우 정권은 이 유골들이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모두 화장하여 바다에 뿌리고 입구는 콘크리트로 막아 놓았다. 2002년 표석을 세웠으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비석을 또 파괴하였다.

동굴에서 피난 생활하는 주민을 학살하다

아직도 가해자는 반성은커녕 사실을 숨기려고만 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며 선흘로 향하였다. 가는 중에 목시물굴과 도틀굴이 있다. 목시물굴은 선흘 마을 사람들이 숨어살다가 대거 희생된 장소이다. 1948년 11월 25일~28일 사이 군인이 주변을 수색하다 노인을 발견하고 위협하여 도틀굴을 찾아냈다. 수류탄을 까 넣고 피난생활을 하던 주민들을 끌어내 15명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연행했다. 그들을 고문하여 알아낸 곳이 목시물굴이다. 현장에서 학살된 사람만 최소 70여명이나 된다. 또한 밴뱅디굴에 숨어 있는 사람도 찾아내 학살했다. 단지 해안마을로 이동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렇게 학살당한  주민이 120명이 넘는다고 한다.

선흘에 도착하여 물을 마시다 주변에 쉬고 있는 동네 사람과 말할 수 있었다. 낙선동 성터를 찾는다는 말에 '왜 그곳에 가느냐'고 묻는다. 이유를 말해주었더니 4·3 사건을 아느냐면서 설명해준다. 그는 예상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어보니 그 쪽 관련해 많이 쫓아다녀 귀동냥한 것이란다. 가끔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다. 4·3 사건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기 마을에서 일어난 일조차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 주민에게 "9연대장 박진경을 추도하는 비문이 아직도 있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당장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흥분하였다.

짐승만도 못한 함바 생활

낙선동 성터를 찾아가니 막 복원을 끝내 상태였다.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이 내린 초토화 명령은 학살의 시발점이었다. 중산간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정든 삶의 터전인 마을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희생되었다.

소개(疏開)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견벽청야(堅壁淸野)' 즉 '꼭 지켜야 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이 확보하며, 부득이 적에게 내놓게 되는 지역은 인적·물적 자원을 이동하고 건물을 파괴해 적으로 하여금 이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작전'에서 사용된 말이다. 그러나 인적·물적 자원을 이동한다는 기본 방침을 무시하고 무차별하게 주민을 학살해 버렸다. 전시에서도 허용될 수 없는 범죄행위가 과거 일본군 장교 출신들인 국군 장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소개 과정에서 선흘 주민이 최소 120명 정도 희생되었다. 하지만 대책 없이 해안마을로 간 주민은 굶주림 속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 1949년 봄 이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마을 주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선흘 아래에 전략촌인 석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바로 낙성동성이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짐승 우리와 같은 함바집에서 짐승처럼 삶을 유지했다.

짐승 같은 생활을 강요당한 낙성동성. 새로 복원되었으나 당시 비극적 상황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짐승 같은 생활을 강요당한 낙성동성. 새로 복원되었으나 당시 비극적 상황을 전혀 느낄 수 없다.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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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경험이 없는 사병들 사격 연습용으로 희생되다

12번 일주도로에 있는 북촌초등학교를 찾았다. 매우 평화스러워 보이는 이 학교에서 북촌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의 배경이 바로 이곳 북촌리이다. 1949년 1월 17일 2연대가 함덕으로 이동하던 중 유격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죽자 학살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음력 12월 18일은 온 동네 제삿날이 되었다.

군인들은 300여 채의 마을 가옥에 불을 질렀고, 군경 가족을 제외한 주민을 20명 단위로 옴팡밭으로 끌고 가 학살했다. 단 이틀만에 400여 명이 학살되어 '무남촌(無男村)'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실전 경험이 없는 사병들의 사격 연습용으로도 학살이 이뤄졌으며, 희생자 중에는 젖먹이 어린애를 안은 여인도 있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알기 위하여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인용해 본다.

"어떤 집에서는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지 사내 아이들을 다른 마을로 보내기도 했다. 그것도 큰놈은 읍네 이모네 집에, 가운데 아들은 함덕 외삼촌한테, 막내놈은 또 어디에 하는 식으로 사방에 뿔뿔이 흩어놓았다. 그건 아마도 한군데 모여 있다가 몰살되어 씨멸족하면 종자 하나 추리지 못할까봐 생각해 낸 궁리였으리라."

"도피자 아들을 찾아내라고 여든살 노인을 닥달하던 어떤 서청 순경은 대답 안 한다고 어린 손자를 총으로 위협해서 무릎 꿇고 앉은 제 할아버지의 따귀를 때리도록 강요했다. 그들은 또 여맹이 뭣 하는지도 모르는 무식한 촌 처녀들을 붙잡아다가 공연히 여맹에 가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발가벗겨놓고 눈요기를 일삼았다."

"그 무섭던 소까이. 온 섬을 뺑 돌아가며 중산간 부락이란 부락은 죄다 불태워 열흘이 넘도록 섬의 밤하늘을 훤히 밝혀 놓던 소까이. 통틀어 이백도 안 되는 무장폭도를 진압한다고 온 섬을 불 지르다니, 그야말로 모기를 향해 칼을 빼어든 격이었다. 그래서 이백을 훨씬 넘어 5만이 죽었다. 대부분 육지서 들어온 토벌군들의 혈기는 그렇게 철철 넘쳐흘렀다."

평화스러워 보이는 북촌초등학교. 주변이 학살터이다.
 평화스러워 보이는 북촌초등학교. 주변이 학살터이다.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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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가 뭔 죄가 있다고 : 너분숭이 애기무덤

북촌초등학교에서 함덕해수욕장 가는 길 언덕 위에 '너분숭이 애기무덤'이 있다. 유적지가 잘 마련되어 있는 이곳은 당시 죽은 아기들이 그냥 그 자리에 묻힌 곳이다. 아이들 영혼은 저승에 가지 않고 까마귀가 갖고 간다 해서 정식 무덤을 쓰지 않는 게 제주도의 풍습이다.

애기가 뭔 죄가 있다고 : 너분숭이 애기무덤
 애기가 뭔 죄가 있다고 : 너분숭이 애기무덤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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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북촌리 근처에 있는 함덕해수욕장을 찾았다. 맑은 백사장이 넓게 펼쳐진 평화스러운 곳이다. 고려시대 대몽항쟁기에 삼별초를 토벌하러 왔던 여몽연합군의 상륙지기도 한 이곳은 군 주둔지로 민간인 학살이 많이 자행된 곳이다. 9연대 2대대, 후에 2연대 3대대가 주둔하였다. 조천면 관내 사람들이 주로 희생되었으며, 유격대에 의해 죽은 군인 2명의 시신을 수습해 갔던 마을 유지들도 경찰가족 1명을 제외하고 8명 전원 이곳에서 학살되었다.

미래를 위해 제주 4·3 사건 유적지를 교육의 장으로 삼자

알베르 까뮈는 말한다.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 것, 그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이다." 단죄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복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는 그러한 잘못이 나오지 않도록 역사적 사실을 감추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제주 4·3 사건을 포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 학살을 우리는 그동안 숨겨 왔다. 4·19 혁명으로 밝힐 기회를 잡았으나 가해자인 군인들에 의해 다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실을 제대로 밝힐 수가 없었다.

한국전쟁을 전후 한 민간인 학살을 숨기고 오히려 정당성을 부여한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에 우리의 군인을 파견했다. 세계가 반전운동이 무르익을 때도 우리는 독재정권 아래에서 귀 막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 결과 우리가 우리에게 저지른 것과 같은 수법으로 우리 군인은 이민족인 베트남의 민간인을 또 학살하였다.

우리가 저지른 베트남의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거의 알지도 못했고 그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었기에 우리는 또 다시 같은 민족인 광주 사람을 빨갱이로 매도하며 학살하는 사건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도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학살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을 뿐더러, 원인과 과정을 정확하게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남의 일인 양 생각하며 명예회복은커녕 오히려 또 한 번 가해하려고 한다. 반성은커녕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가해자들을 유감스럽게도 정치적으로 용서해 주었다. 역사는 돌고 또 돈다. 언제 또 이런 학살을 우리가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 매우 염려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을 숨기려 하지 말고 사실 그대로 밝혀야 한다.

'제주 4·3 사건 유적지를 잘 보존하고 홍보하여 교육의 장으로 삼자'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염려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제주도민만의 일이 아니고 우리 전부의 일이다. 아렌트(H. Arendt)는 말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자비가 아니라 정의이다. 정의가 없는 동정은 악마의 가장 강력한 공범자의 하나이다." 반성이 없으면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선은 진실을 밝혀야 하고 가해자는 반성하고, 그때야 비로소 피해자는 용서하여 화해와 상생으로 가야 하는 것이다. 반성이 없는 그들을 정치적으로 용서하면 정치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획득할 수는 있겠으나 결국 미래의 범죄를 막을 수 없어 동시에 공범자가 되는 것과 같다.

하늘도 슬펐던지 유적지 방문을 모두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엄청나게 많은 비가 쏟아 내린다. 피해자들이 흘린 눈물이 이보다 더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해와 상생을 생각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오늘 주행은 공항까지 95km였다.

덧붙이는 글 | 주. '이 글을 쓰면서 이영권의 <제주역사기행>을 참고하였음'



태그:#제주4·3사건, #뷱촌리, #애기무덤, #다랑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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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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