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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많이 내렸다. 도로가 미끄럽다. 눈이 녹은 구간과 눈이 녹지 않은 길을 달릴 때는 무척이나 신경이 쓰인다. 달리는 바퀴가 균형을 맞추지 못하고 한쪽 바퀴만 미끄러질 때가 가장 위험하다. 차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회전하기 때문이다. 이때는 운전대를 움직여 봐야 소용없다. 무던히 눈길에 미끄러졌다. 죽지 않고 이렇게 길 위에서 미끄러지고 다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택배기사님들 고생이 많으십니다)

 

4년 전, 시골에 들어와서 처음 큰 돈 들인 것이 차를 바꾸는 일이었다. 산골 비포장이나 눈 왔을 때를 생각해 4륜 구동이 되는 트럭으로 사야 한다고 해서 중고 승용차를 친구에게 넘기고 새로 구입했다. 만족스럽다. 산길 비포장도로와 다른 차들이 다닐 엄두조차 내기 힘든 눈길을 부자연스럽게라도 다닌다. 3년 넘게(할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타고 다니면서 어디 한군데 깨진 곳 없이 무사히 다닐 수 있던 것은 평소 신경을 많이 쓰고 운전하는 습관도 있겠지만 잔 고장 없고 튼튼한 차 덕택이라 생각한다.

 

작년부터 전북 완주군 대아수목원에 출근한다. 전북 진안 무릉마을 우리 집에서 가자면 주천면을 가로지르는 55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 대아저수지를 끼고 732번 지방도로 갈아타야 한다. 집에서 수목원까지 30킬로미터 거리이고 길이 구불거려서 평균 시속 50여킬로미터 정도로 달린다.


소요시간은 40분 정도. 봄이면 개나리, 벚꽃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푸른 녹음과 깎아지른 절벽이 겹치는 아래 푸른 물줄기가 굽이치는 곳을 지난다. 동상면에 걸쳐있는 물 맑은 계곡은 해마다 수만 명 피서객들이 찾는 곳이다. 가을이면 낙엽 지는 모습이 절경을 이루어 근교도시의 낭만적인 연인들이 드라이브 코스로 꼽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에 전국에서 운전 좀 한다는 이들이 자동차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즐겨 찾는 코스이기도 한데 이유는 급한 커브와 오르내리는 경사, 한쪽이 낭떠러지라는 점이 극한의 스포츠 정신을 고양한다는 이유에서이다.

 

결국 내 입장에서는 남들이 일부러 찾기도 힘든 드라이브코스를 매일 다닌다는 점이 큰 자부심이다. 게다가 비록 1톤 트럭을 몰고 다니긴 해도 반복되는 코스적응에 웬만한 드라이버 실력 못지 않은 코스주행능력을 겸비하게 되었다.


멀고 험한 출근길


이런 현실 속에서도 취약한 점이 있다. 1년 동안 250일 넘게 매일 60킬로, 일만오천킬로미터를 운행하다 보면 주변 경관은 증명사진 배경처럼 무의미해진다. 출퇴근 땐 무의식적으로 핸들과 가속페달을 반복 조작하게 된다. 작년 처음 벚꽃 필 무렵이 좋았고 그 이후로는 점점 지겨워졌다. 이 지겨움이 두려움으로 변하게 된 것은 작년 겨울부터 시작된 눈 때문이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피가 머리끝으로 오른다. 속도 빠른 입자들이 몸 구석구석을 훑는 느낌이다. 도로에 쌓인 눈길 위를 미끄러져 가는 데에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무력한 모습에 이어 난간이나 낭떠러지로 밀려 넘어가고 공중에 뜨거나 구르는 차체 안에서 이리 저리 부딪혀서 상하고 피가 나는 내 몸이 보인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내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장면이 바뀌면 눈이 내리고 망가진 차체 위에 소복이 쌓이는 눈이 있다.(이때 장중한 클래식이 배경음으로 깔린다) 어느 순간 한쪽에서 울리기 시작하는 전화벨은 수십 번을 울리고 끊어지지 않는다. 감긴 눈과 색이 바랜 입술. 찰나에 흘러가는 머릿속 영상과 함께 마치 종이에 손가락마디를 베인 듯한 느낌으로 깜짝 놀라게 된다.

 

강아지가 뛰어다니고 아이들은 한쪽에서 눈싸움을 하고, 일부는 언덕길에 비료푸대를 엉덩이 밑에 깔고 신나게 썰매를 탄다. 눈 쌓인 들판과 산은 온통 흰색으로 덮여 눈 오는 하늘과 눈 덮인 땅이 같은 색이다. 한번도 밟힌 적 없는 너른 들에 내 발자국을 찍어본 적 있는가. 뒤따르는 이 있을 터이니 함부로 걷지 말라던 그 스승의 가르침도 있었다. 순결, 배려의 따뜻함. 지금 나에게는 없다.

 

주천면 대불리를 지나 완주군 동상면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통행량이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여름에 계곡을 이용하는 피서 자가용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특히, 눈 오는 날에 그 길로 산을 오르는 차는 십중팔구 초행이거나 만용을 부리는 운전자임이 틀림없다.

 

낭만의 눈은 사라지고


나는 그 길을 이용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차를 운행해야 한다. 구불거리고 경사진 도로를 달리는 일은 항상 위험을 안고 있지만 눈이 내리거나 추위에 눈이 얼어붙은 때엔 가슴이 답답하고 상상력은 풍부해지기 마련이다. 나를 걱정해서 해주는 이야기겠지만 일부는 소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추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시간과 기름 값을 그렇게 들여가며(일당 4만1000원에 교통비로 만 오천 원을 지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출퇴근할 일은 아니다. 그러니 매번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20분의 살 떨리는 레이스를 견뎌내는 것이 하루일과가 되어버린 요즘. 눈이 설레고 기쁨을 가질 수 있었던 과거는 더 이상 내안에 존재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경황에 운전대를 딱 놓고 싶은 심정이 되게 하여 주는 사건이 있었다. 작년 1월에 시작된 내 기나긴 출퇴근 운행길을 그리는 화폭에 점 하나 찍어 완성된 작품을 제출하는 느낌이었다.


어제 퇴근길에 어둑해진 도로를 조심스레 달리고 있었다. 내리막이 끝나고 기다란 직선도로로 접어든다. 가속구간이다. 살며시 가속페달에 발을 얹었는데 멀리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도로 중앙이었다. 사람은 아닌데…….

 

어,…….어.

 

피해야 하는지 멈춰야 하는지 갈피도 못 잡고 있는 사이에 곧 그 물체의 정체가 헤드라이트 불빛에 드러났다.

 

멧돼지다. 크,크다. 송아지만하구나.

 

도로 중앙을 점거하고 있는 그 큰놈은 경적을 몇 번 울리고 라이트를 상하향으로 조절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었다. 미끄러웠을까. 아니면 다가오는 큰 불빛에 시력을 상실한 것일까. 겨우 피해갈 수 있을까 했던 나의 바람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갑자기 머리를 돌려 내 차 밑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쿠득쿵우르륵. 요란한 소리가 밑에서 느껴졌고 뒷바퀴가 살짝 들렸다가 내려앉는 느낌이 들자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예고없는 사고


승용차였다면 범퍼가 부서지고 옆으로 튕겨나가거나 앞 유리로 올라타거나 했을지 모른다. 내 차의 경우는 다른 트럭보다도 훨씬 차체가 높아서 차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겨우 속도를 줄여서 멈추게 된 순간은 사고지점에서 20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룸미러를 통해서 확인해보니 돼지는, 넘어져있다. 죽었을까. 아니, 일어선다. 일어서서 걷는다. 절뚝거린다. 어디로 갈거냐. 산으로 가라. 밭으로 가면 넌 죽은 목숨이다. 하긴, 지금 충격과 상처가 곧 널 죽게 만들지도 모른다.

 

창을 내려서 뒤돌아보았다. 움직이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려서 바라보았다. 경적을 몇 번 눌렀다. 움직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지? 동네 포수에게 연락해서 잡으라고 할까? 올해 이 지역은 정식 사냥 허가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역에서 농한기 주요 소득중 하나는 '사냥'이다. 개구리, 고라니, 꿩, 멧돼지 등이 모두 돈이 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많아서 피해를 준다는 여론이 앞서는 마당에 사냥을 동물학대의 시선으로 보는 눈은 그리 많지 않다.

 

순간의 갈등이 일어났지만 동네 사람에게 연락하는 것을 포기했다. (시간이 걸릴 것이고 내가 그 곁을 지키고 서있는 것은 끔찍했다.) 그렇다고 차를 돌려서 쫒아버릴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다시 차에 올랐다. 창문을 올리고 사이드미러로 그 놈의 존재와 움직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천천히 집으로 차를 몰았다. 마음은 복잡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누군가가 와서 취하게(?) 될 것이 뻔했다.

 

다치지 않았다면 산으로 도망가겠으나 많이 충격을 받은 상태이고 눈에 불 켜고 돼지 잡으려는 이들이 많아서 길 복판에 있는 그놈을 그냥 내버려둘 리 없다. 마음이 불안했다. 욕망과 측은지심이 교차하면서 크게 흔들어 놓는다. 속도는 평소의 절반 수준이다. 불안한 마음에 도로 곳곳의 어두운 곳을 살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태그:#눈길운전, #전북여행, #대아수목원, #운일암반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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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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