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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로 나누는 '입맞춤(The Kiss)'에는 어떤 의미가 담길까요. 인간 내면에 담긴 감정 에는 설렘과 불안, 도취, 공포, 기쁨, 그리움 등 인생에 있어서 겪게되는 다양한 감정들이 공존합니다. 이렇듯 심리적이고 추상적인 감정들을 그림이라는 예술 작품에 포착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입맞춤(The Kiss)'이 가리키는 인간의 행동 양식에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표출됩니다. 연인들 사이의 입맞춤은 환희에 찬 즐거운 의식'이 될 것이며, 가족들 사이에서는 '기쁜 소식을 나누는 행동'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상황에서는 배신과 불안, 고통을 의미하는 비극적인 몸짓이 되기도 합니다.

하층민의 쾌락 속에 존재하는 애잔한 '입맞춤(The Kiss)'

그런데 그런 입맞춤들과는 또 다르게, '쾌락 속에 담겨있는 애잔한 입맞춤(The Kiss)'을 포착한 앙리-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로트렉 몽파(Henri-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Montfa, 프랑스, 1864-1901)의 그림을 오늘 소개하려고 합니다. 후기 인상주의(impressionism) 화가로 활동했으며, 아래에 첨부한 로트렉의 '세탁부(1886-7)'라는 작품은, 서울경제 외신에 따르면, 200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작품 가운데 최고가인 2240만달러(약 232억원)에 낙찰되기도 합니다.

1889, Oil on canvas, 93 x 75 cm,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 세탁부(The Laundress) 1889, Oil on canvas, 93 x 75 cm,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 Toulouse-Rautr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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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오늘 그림의 작가인 툴루즈-로트렉의 약력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화가로, 상징주의 화가(Symbolists)들과는 밀접한 연합을 결성하여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로트렉 자신만의 독특하면서도 유일한 화풍을 창조해 냈으며, 파리 사람들의 사회 생활과 밤의 생생하고 솔직하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 묘사한 그의 그림들은 지역과 시대를 대표하는 창작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 로트렉과 같은 화가의 삶은 낭만적인 해석의 창작 활동에 영감을 불어넣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1864년 11월, 툴루즈-로트렉은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알비(Albi)라는 도회지에서 귀족 가문 대부호의 외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15살인 1878년, 의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졌으며, 이 때부터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며 지냈습니다. 뼈가 잘 부러지는 희귀병(osteogenesis imperfecta)으로 1년 뒤 오른쪽 다리마저 부러져 영구 발육부전(發育不全)이라는 진단을 받습니다. 

1882-83. Oil on cardboard. 40.5 x 32.5 cm. 툴루즈-로트렉 박물관(Musee Toulouse-Lautrec), Albi, France
▲ 자화상(Self-Portrait) 1882-83. Oil on cardboard. 40.5 x 32.5 cm. 툴루즈-로트렉 박물관(Musee Toulouse-Lautrec), Albi, France
ⓒ Toulouse-Rautr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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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52cm 정도의 키로 평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이런 운명에 대해 귀족 가문의 사촌이었던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근친 결혼에서 비롯된 발생학적 유전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는 일생동안 병명이 밝혀지지 않은 채, 전문의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아마추어 데생 작가였던 아버지와 삼촌들을 따라 일찍 그림을 익혔는데 그가 선호한 주인공은 사냥과 말, 주변 인물인 가족들이었습니다. 1868년에 그의 부모가 이혼을 한 뒤 거의 대부분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1872년, 9살 때에 가족과 함께 파리에 정착했으며,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파리와 가족 소유지에서 보냈습니다. 이 때 프랑스 리세 퐁타네(Lycee Fontanes) 국립학교에 입학해서 3년을 수학하였으나 1875년 건강을 이유로 되돌아 옵니다.

그는 화려한 장비를 갖춘 욕심 많은 운동 애호가이자 사냥꾼이었는데, 아버지의 친구이자 운동-화가로 잘 알려진 프린스토(Rene Princeteau)에게 처음 미술 교육을 받았으며, 어린 시절을 셀레라(Celeyran)에 있는 대저택에서 지냈습니다. 

1880년까지 기법과 화풍이 다양한 2500여 점 정도의 창작품을 생산한 그는 1881년 바칼로레아(대학합격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1882년 훗날 파리예술학교(Paris Academy of Art)의 교수가 된 보나(Leon Bonnat, 프랑스, 1833-1922)의 화실에 들어가서 짧은 기간이지만 그림 공부를 시작합니다.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 프랑스, 1845–1924)의 화실로 옮긴 뒤, 이때 사귄 젊은 예술가인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 프랑스, 상징주의, 1868-1941)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네덜란드, 1853-1890) 등과 함께 조형적인 관점을  연구합니다.

왜소발육증 환자로 뒷골목의 애환을 공유했던 툴루즈-로트렉

이 시기에 화실 동기들과 가족, 전문 모델 등을 대상으로 초상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얼굴과 심상(心象)에 대한 로트렉의 열정은 대단하였는데, 마치 인문 관찰자가 된 듯 날카롭게 심리를 분석한 다음, 인류의 문화와 인물의 마음 속에 내포된 비밀까지 해부했으며, 데생이나 회화, 석판화 등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여러 화풍의 영향을 받았으며, 1890년까지 인상파(Impressionism)의 영향을 받아 밝은 색채를 주로 활용하였습니다.

1885, Pen and ink,  30.4 x 12.7 cm, 
툴루즈-로트렉 박물관(Musee Toulouse-Lautrec), Albi, France
▲ 자화상 캐리커처Self-Portrait, Caricature) 1885, Pen and ink, 30.4 x 12.7 cm, 툴루즈-로트렉 박물관(Musee Toulouse-Lautrec), Albi, France
ⓒ Toulouse-Rautr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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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하류 계급의 삶에 빠져 살며 풍경화에는 무관심했던 로트렉은 도시 생활과 공연, 창녀촌을 주요 주제로 작업하였으며, 1884년에는 그가 가장 좋아한 거리 몽마르뜨(Montmartre)에 정착해서 회화와 일러스트에 몰두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함께 활동하던 에드가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gas, 프랑스, 1834-1917)의 영향을 받아 화면을 분할하고 주제의 중심을 이동시키며, 주변 상황을 연상하게 만드는 기법을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로트렉의 예술이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1887년부터 각종 전시회에 참가하였는데, 부당한 명성에 저항하며 고흐와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1888년과 1890년, 툴루즈-로트렉은 '브뤼셀 살롱(Brussels Salon, 브뤼셀 미술전)'에 프랑스 작가로 초대를 받아 자신의 창작품들을 전시하게 됩니다. 1889년에는 '앙데팡당전(Salon des Independants, 독립전)'에 쇠라(Georges Pierre Seurat, 프랑스, 신인상주의, 1859-1891), 반 고흐, 루소(Pierre Etienne Theodore Rousseau, 프랑스, 1812-1867) 등과 함께 참여하였으며, 종종 전시회로 기부도 하였습니다.

툴루즈-로트렉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1891년 파리 몽마르트에 붙여진 공연장(cabaret) '물랭루즈(Moulin Rouge)'의 홍보 포스터였습니다. 카바레(공연장) '물랭루즈'의 배경과 연예인들은 로트렉에게 있어서 작품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었으며, 1891년에는 첫 판화를 창작하였고, 1893년에는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갖고 헌신하면서 1896년에 첫 개인전을 가졌습니다. 1894-7년 사이에는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시작합니다.

이 때 런던(London)과 스페인의 마드리드(Madrid)와 톨레도(Toledo), 브뤼셀(Brussels), 네덜란드의 할렘(Haarlem)과 암스테르담(Amsterdam) 등을 돌며 고야(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프랑스, 1746-1828), 렘브란트(Harmenszoon van Rijn Rembrandt, 네덜란드, 1606-1669), 브뤠헬(Jan the Elder Brueghel, 네덜란드, 1568-1625),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프랑스, 1848-1903), 고흐 등과 교류하였고, 그 창작품들로 함께 전시회를 갖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1897년의 휴가 여행 도중에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키고 1899년에는 알코올 중독과 불규칙하고 문란한 생활로 정신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릅니다. 폐쇄된 병동에서도 작업을 지속하였으며, 1901년 9월, 37세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숨을 거둡니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로 고귀하기보다는 일상과 현실 속의 쾌락을 화폭에 옮겼으며, 카페와 대중 무도회, 카바레, 서커스 단원 등 속세의 본능과 인간의 애수(哀愁)를 그렸으며 있는 현실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1892, Cardboard, 39 x 58 cm.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 입맞춤(Le Baiser, The Kiss) 1892, Cardboard, 39 x 58 cm. 개인소장(Private collection)
ⓒ Toulouse-Rautr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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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트렉은 우리에게 영화로 먼저 알려졌습니다. 2001년에 상영되었던 <물랭루주(Moulin Rouge)>라는 영화의 이 제목은 19세기 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파리에 실존하는 공연장의 이름이며, '붉은 풍차'를 뜻하는 물랭루주를 배경으로 합니다. 성공을 꿈꾸는 아름다운 뮤지컬 가수이자 창녀인 샤틴(Nicole Kidman, 니콜 키드만의 역할)과 그녀에게 매료된 젊고 가난한 작가 크리스티앙(Ewan McGregor, 이완 맥그리거의 역할)의 사랑을 그린 뮤지컬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서 툴루즈-로트렉은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의 예술가로 잠깐 등장하는데, 당시 로트렉과 물랭루주가 그만큼 밀접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으며 시사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 곳은 낭만과 사랑, 마약, 매춘 등 환락 산업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현재 이곳 물랭루주가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된 데에는, 영화보다는 오늘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툴루즈-로트렉의 공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는 이 곳 무희들의 모습과 애환을 많이 그렸습니다.

두 남녀 사이의 애틋하고 애잔한 느낌의 키스(The Kiss)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에 출판된 로트렉과 관련한 책도 볼 수 있는데, <시골개 서울개>란 제목의 그림 동화책입니다. 이 내용은 고흐와 툴루즈-로트렉, 두 화가를 앙리 티 발바리와 빈센트 반 삽사리로 이름을 붙였으며, 두 사람이 주고받았던 편지와 우정을 바탕으로 꾸민 우화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와 더불어 두 화가의 유명한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고난했던 그의 삶이 고흐와도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검은 양복에 검은 모자를 눌러 쓴 툴루즈-로트렉이 의자 깊숙이 거만하게 앉아서 머리 숱이 없는 뚱뚱한 술 손님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요염하게 꼬인 자세로 교태를 부리며 남자를 안고 있으며, 몸에 꼭 맞는 붉은 옷에 이마 위로 몇 가닥 내려뜨린 애교 머리, 선명한 붉은 입술과 유혹적으로 살짝 내리 뜬 눈의 예사롭지 않은 여성을 지켜봅니다. 이들은 무슨 관계일가요? 서로에게 유익한 관계일가요? 아니면 즐거움을 나누는 사이일까요? 19세기 말 파리의 밤과 향락의 세계를 탐색합니다.

위 작품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냉혹한 관찰자로서 주인공들의 개성과 특징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그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합니다. 결코 미화하거나 희망으로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을 간파하려고 노력했으며, 깊은 이해와 날카로운 관찰로 한 인간의 고유한 모습을 그립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신체적인 운명의 탈출구라도 찾는 것처럼, 파리의 밤 문화와 쾌락의 세계에 광적으로 도취하면서 그 곳 무용수와 광대, 매춘부 등 파리 사회에서 하층민에 속하는 여성들의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담아냅니다.

위 '키스(The Kiss)'와 같은 유화 작품에서 보면, 그들의 삶에 동화된 듯, 마치 위 화폭 속의 일부라도 되어 있는 듯, 연인으로 보이는 둘 사이의 무척 내밀하고 애틋하며 애잔한 느낌까지도 전해줍니다. 그들과 함께 사창가에 머물면서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었기 때문에 표현이 가능했던 그림이며, 서로 사랑을 나누며 다정하게 위로하는 정겨움이 베어 있는 광경입니다. 포스터와 같은 석판화에서의 대비된 색채가 아닌, 각각의 색감 안에서 미묘한 색상의 변화와 농담의 온화한 효과를 극대화한 작품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 그림과 설명, 로트렉의 약력은 "키스를 부르는 그림(안현신 지음, 2010, 눈과마음)"과 "위대한 미술가의 얼굴 시리즈(앙리드 툴루즈 로트렉, 편집부편, 열화당)",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이영철 옮김, 중앙일보사)"이란 책들과 "툴루즈 로트렉 미술관(http://enjoyart.wo.to/)", "어린이 화랑, 툴루즈 로트렉(http://gallerykids.com/index1.htm)", "Olga's Gallery(http://www.abcgallery.com/T/toulouse-lautrec/toulouse-lautrec.html)", 그리고 T-Shirtfan(http://www.tshirtfan.com/search-48-lautrec.html)"에서 참조, 발췌, 번역한 것이며, 종합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직접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태그:#앙리, #후기 인상주의, #쾌락, #키스, #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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