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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지리산

 

산골짝 마을의 봄 풍경이 정겹다. 오전 8시 50분. 산골짜기 깊은 곳에 자리한 작은 마을, 거림. 계곡 물소리가 환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계곡 물소리 콸콸한 계곡을 끼고 등산길에 오른다. 9시 20분, 거림공원 지킴터에서 본격등산을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선물처럼 주어진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우린 지리산으로 든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집에서 출발했던 길이다.

 

거림에서 세석대피소까지는 6km라 이정표에 적혀 있다. 6km라는 거리 표시를 보기만 해도 벌써부터 '언제 닿을까' 깜깜해진다. 부담스러운 거리다. 산이 좋아서, 특히 지리산이 좋아서 모처럼 지리산을 만나러 왔건만, 발걸음 내딛기도 전에 마음 먼저 목적지에 이미 가 있다.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에 산길은 덥기까지 하다. 땀이 삐질삐질 햇볕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릴 듯 하다. 무더운 날씨지만 계곡 물 소리 노래삼아 완경사 오르막길을 이어서 간다. 어느새 2.4km 왔다. 세석대피소까지는 앞으로 3.6km 남았다. 10시 40분, 느린 걸음으로 한발 한발 내딛는다.

 

등산은 한 걸음씩이다. 출발 전에 6km라는 것을 보고 앞이 깜깜했지만 일단 시작하고 걸음 옮기다 보니 점점 거리는 좁혀진다. 정말 시작이 반이다. 계곡 물소리 들으며 후덥지근한 오르막길을 한걸음 또 한걸음 내딛는다. 천팔교(11:10)를 지난다. 물소리는 등산길에 계속 따라붙는다. 계곡엔 하산 길에 쉬고 있는 사람들 이따금 보인다.

 

얼마쯤 지나 다시 다리가 나온다. 이번엔 북해도교(11:25)라 이름 되어 있다. 바윗길 완경사 오르막길 계속되는데 끊임없이 계곡 물소리 다정히 옆에 따른다. 이제 주 계곡에서 계속 완경사길 오던 길 버리고 북해도교를 건너서 오른쪽 방향으로 꺾어 위로 난 급경사 길로 올라야 한다. 우리 눈앞에 엎드린 길, 가파른 길로 계속 이어질 듯하다.

 

북해도교에서 세석대피소까지는 2.8km, 올라온 거림까지는 3.2km다. 거림에서 세석까지 6km인 것을 보고 어떻게, 언제가나 깜깜했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오다 보니, 반을 넘어섰다. 북해도교 건너 계곡 멀어지고 급경사 오르막을 거북이걸음으로 오래오래 걷는다. 너무 힘들어서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하기도 하면서 오르막 길 계속된다.

 

엊그제 그 가파른 얼음골 직벽 코스로 천황산까지 등산하고 이어서 지리산에 올랐으니 몸이 반응한다. 지친다고. 이정표가 보인다. 12시 15분. 세석대피소까지 2.1km 남았다. 어느새 많이 왔다. '아직도'와 '그래도' 많이 왔다가 내 마음에 교차한다. 가끔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찬물 한 모금 마신 듯 상쾌해진다. 시원하다.

 

급경사길, 오르막길 반복되고 이름 없는 무명교(12:35)를 만난다. 다리를 이어서 또 다리가 있다. 무명교가 세 개 연이어 있다. 다리 건너서부터는 급경사길 끝나고 완경사 평지길 걷 듯하다. 갑자기 계곡 물소리 커지고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 바람소리 상쾌하다. 세석교 앞에 도착, 12시 50분이다.

 

세석대피소까지는 1.3km 남았다. 끊어질 듯하던 계곡, 힘찬 물소리와 함께 다시 만났다. 세석교 아래 힘차게 바위를 타고 흘러간다. 잠시 계곡 바위에 앉았다가 다시 간다. 나무들이 비가 올 때, 물을 흡수했다가 내 보내는 물... 계곡을 이루고 흘러 흘러간다.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흘러도 다함없는 물, 자연은 얼마나 신비로운가.

 

 

다시 힘을 내 오르는 길에 아침에 거림에서 등산길 접어 들 때 같은 시간에 산행길 올랐던 단독산행 온 사람과 다시 맞닥뜨린다. 부럽다 부러워. 세석대피소까지만 갔다가 오시는 분이다. 우린 이제 낑낑대며 올라가는데 그는 세석까지 갔다가 다시 하산하는 길이다. 다시 만난 반가움에 인사하고 우린 또 가던 길마저 간다. 하산하는 젊은 두 남녀와 맞닥뜨린다.

 

"여기까지 몇 시간 걸렸어요?!"

우리를 향해 묻는 청년,

"우린 좀 천천히 걷는 편이라, 아침 9시 15분에 출발했어요!"

했더니

"예? 9시 15분요? (웃으면서) 많이 놀다 오셨네요!"

한바탕 웃음.

"우리가 너무 심했나?!"

 

낮 1시 25분, 삼거리다. 여기서 청학동까지 9.5km, 의신마을까지는 8.8km, 세석대피소까지는 0.5km 남았다. 이제 500m만 더 가면 세석이다. 도랑물 흐르는 오솔길 호젓하게 걷는다. 마음도 여유롭다. 몸은 지쳤다. 1시 35분, 세석대피소 도착. 지리산, 정말 오랜만이야, 야~세석대피소야 얼마만이니?!

 

세석대피소에 당도하자 많은 사람들이 야외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고 휴식하며 두런두런 모여 있다. 힘들게 올라온 산, 대피소에선 땀 흘려 올라온 사람들의 쉼터가 있어 좋고 힘들게 오라온 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라면 끓여먹고 커피 한 잔 끓여 마시고 출발한다.

 

장터목 대피소에는 사람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오늘 최종 목적지는 장터목대피소까지다. 어느새 오후 2시 55분이다. 세석대피소에서 장터목까지는 3.4km, 거림 6.0km, 백무동은 6.5km 거리다. 쉬었다 걷는 길이라 오르막길에 뭉친 다리가 버겁다. 세석평전의 진달래는 아직도 피지 않고 꽃봉오리 겨우 맺혔다.

 

3시 15분, 촛대봉에 선다. 천왕산, 백무동, 반야봉, 노고단 등이 두루 조망된다. 촛대봉에서 보는 천왕봉은 만져질 듯 가깝게 보이다. 오르락내리락 촛대봉에서 목적지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을 앞에 보며 걷는 길이라 위로가 된다. 조망바위에서 잠시 휴식, 바위봉우리에서 만나 스쳐지나가는 젊은 외국인, 완전 패잔병 같다.

 

이 바위에 쉬어가기라도 했더라면 남은 간식이라도 좀 줄 텐데, 그는 벌써 보이지 않는다. 오는 길에 간간이 스쳐지나갔던 청년, 여기서 만난다. 계속 혼자 걷고 있던 청년이다. 알고 보니 혼자서 1년에 두 번은 지리산과 설악산을 등산한단다. 친구들과 함께 올 때도 있지만, 시간 맞추기가 힘들다보니 자꾸 혼자서 오게 된다고 한다.

 

집은 인천, 기차 타고 지리산 진입로까지 4시간 걸리고, 집에서 오는 시간 등을 다 포함하면 7, 8시간 정도 걸린단다. 회사에 며칠 일이 없다고 해서 생긴 시간, 지리산에 온 것이란다. 대단하다. 혼자서 지리산에 오면 단독 산행하는 사람끼리 또 만나서 함께 산행하기도 한단다.

 

연하봉(1,730m/4:55)을 지난다. 장터목까지는 800m 남았다. 연하봉을 지나서 언덕길 끙끙대 걷다보니 아래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든다. 바로 밑에 장터목대피소가 있다. 장터목대피소(5:20)에 도착. 먼저 도착한 많은 사람들이 장터목을 가득 채우고 있다.

 

장터목대피소 야외 테라스에 마련된 나무탁자와 나무의자들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저녁을 짓고 커피를 마시고 고기를 굽는 냄새가 정겹다. 해는 어느새 반야봉 위로 붉은 노을로 물들면서 서서히 그 빛이 사위어 간다. 반야봉 낙조를 배경으로 마주 앉은 사람들의 얼굴빛이 발그래 물든다.

 

주고받는 대화들 속에 버너 위에 올린 쌀이 더운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며 밥이 다 되어간다. 고기를 뒤집고 커피 물이 끓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위하여!를 외치며 고기와 맥주 캔 사이로 대화가 무르익어 간다. '위하여'는 한 번만으로 아쉬웠나 보다. 간간이 음식 사이로 대화가 오가다가 소주잔을 높이 들고 '위하여'를 외친다. 친구와 친구, 둘 셋 함께 올라온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 모처럼 가족과 함께 올라온 사람들의 가족애, 뜨거운 핏줄의 끈끈한 유대와 부부끼리 온 사람들의 애정도 익어간다.

 

장터목에는 이 저녁, 장터목까지 올라온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힘든 산행 뒤의 여유로움과 이야기가 있다. 우린 이 저녁 장터목 풍경 속에 합류한다. 마침 한 테이블에 여분의 자리가 있어 옆에 앉은 어르신께 양해를 구하고 옆자리에 앉았다.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어르신은 친구 분들과 함께 올라오셨다. 취사장에서 밥을 지어 두 분의 친구 분이 탁자 앞에 앉았다. 옆에 앉으니 이야기가 절로 펼쳐진다.

 

어르신은 "지리산에 반해서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아들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했고 지금은 건강하게 자랐다고 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아들이 학교에 입학하는데 왜 시골로 가느냐고 말들이 많았지만 오히려 아들한테는 좋은 추억과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10년간 시골에서 살다가 지금은 도회지로 나가 산다고 한다.

 

산이 좋아서 70년도부터 지리산에 왔었는데 그 당시엔 교통편이 안 좋아서 지리산 한 번 오려면 7박8일 정도 잡아야 했다고 들려준다. 10년 넘게 안 오다가 88년도에 지리산 자락에 이사를 와서 살았다는 어르신은 지금까지 지리산을 15번 종주했고 500번 정도 지리산에 왔으며 천왕봉은 150번 정도 올랐다고 한다. 술에도 미쳐보고 경마에... 안 미쳐 본 것 없이 다 미쳐봤지만 산에 미친 것이 제일 좋았다고 한다.

 

우리 옆에 앉은 어르신 세 분은 참 점잖으신 분들이다. 삶을 잘 살아오신 분들의 얼굴이라 쓰여 있다. 세분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 유머가 있고 예의바른 말이 있고 편안함과 오랜 지기들의 보이지 않는 끈끈한 유대가 보인다. 어르신들의 유쾌한 유머에 옆에 앉은 우리도 덩달아 웃음꽃 핀다.

 

주먹밥을 맛있게 만들어서 우리한테 한 개 건네주었다. 참기름 병까지 챙겨 오신 분들이다. 주먹밥은 아주 고소하고 맛있다. 남편이 주먹밥의 비결을 묻자, 마주 앉으신 어르신 하시는 말, "그야, 비밀이지요!"한다. 또 한바탕 웃음. 아내한테 전화를 하는가 싶더니 통화를 끝내면서 핸드폰에 입을 대고 뽀뽀 소리를 내서 또 한번 웃는다.

 

식사 후 맛있게 누룽지를 끓여먹으며 하시는 말씀, "참 좋다. 이 풍경... 아주 건강한 풍경이다. 우리가 여기 편입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며 나직이 주고받는 대화... 그 분들 또한 아름다웠다. 함께 있어도 편안한 그분들의 풍경, 참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 저녁 장터목대피소의 풍경... 건강하고 아름답다. 힘들지만 땀 흘려 한 걸음씩 올라와 이곳까지 온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 큰 즐거움과 여유로움, 이 건강한 풍경 속에 편입되어 있는 내 마음도 여유롭다.

 

아까 바위봉우리에서 쉴 때 얘기 나눴던 나 홀로 등산 온 청년도 옆 테이블에서 홀로 밥을 짓고 식사를 하는데도 여유롭고 느긋하다. 혼자 와서 심심하다는 표정 같은 것 없다.

 

지리산에 오면 이야기가 있다. 지리산에 오면 사람이 있다. 지리산에 오면 산 꾼들의 사연 사연을 만날 수 있고 고수들의 이야기가 있다. 누가 그랬던가. 처음엔 산이 좋아 풍경이 좋아 지리산에 올랐지만 나중에는 사람이 보이고 사람이 좋아 지리산을 찾게 되더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이제 나도 지리산에 오면 산 꾼들의 사연이 보이고 사람이 보이고 지리산 이야기가 들려온다.

 

오늘 이 하루, 높고 높은 지리산 꼭대기까지 올라와 누리는 이 저녁의 여유로운 풍경... 고즈넉하면서도 호젓하고 다정하고 이야기꽃 피어나고 음식냄새, 이야기 향기... 계속된다.

 

반야봉 낙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빛이 발그레 물든다. 붉게 물들어가던 저녁 놀, 점점 옅어지고 짙은 회색빛으로 사위어 가면서 어둠이 점점 찾아든다. 해가 지면서 점점 더 추워지고 한 사람 두 사람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도 늦도록 테라스에 앉아 이야기를 도란도란 주고받기도 하고 늦게까지 자리를 뜰 줄 모르는 이들도 있다. 대피소 주변을 산책하는 사람들도 있다. 밤이 찾아오면서 장터목산장 불빛이 환해진다.

 

어둠이 서서히 찾아 들면서 자리는 하나 둘씩 비어간다. 저 아래 중산리 마을 불빛이 지상에 내려온 은하수 같다.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연 사연이 모락모락 이 저녁에도 피어난다. 이 고즈넉하고 아늑한 풍경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만나러 온 지리산, 예약을 하지 못하고 왔지만, 다행히 우리들을 위한 자리가 있어 장터목대피소 방에서 이 밤을 지내게 되었다. 밤 9시 소등. 모두가 잠든 시간, 늦도록 뒤척이다가 겨우 잠이 든다.

 

산행수첩

1.일시:2010년 5월 4일(화)~5일(수): 1박 2일

2.산행: 남편과 나

3.정상에서의 조망:탁월함

4.산행기점: 거림마을

5.산행시간: 14시간 55분

6.코스: 거림-세석대피소-천왕봉-로터리대피소-중산리

 <2010년 5월 4일(화)맑음.8시간 15분>

거림마을(09:05)-거리공원지킴터(9:20)-천팔교(11:10)-북해도교(11:25)-무명교(12:35)=연속 3개,세석교(12:50)-의신마을.청학동 갈리길(1:25)-세석대피소(1:35)-점심식사 후 출발(2:55)-촛대봉(1,703m, 3:15)-연하봉(1,730m, 4:55)-장터목대피소(5:20)


태그:#지리산, #장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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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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