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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어시장에 들어선 새우젓 직판장
 소래어시장에 들어선 새우젓 직판장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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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주문해 놨으니까 내일은 소래가서 생새우랑 새우젓을 사와야 한다."

지난 23일 아침. 며칠 전부터 마늘, 생강, 청각 등 김장용 양념을 사들이기 시작했다는 친정엄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무와 배추 등 김장용채소는 준비가 다 되었으니 생새우와 새우젓 등 양념에 들어갈 해물류를 사오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여든 앞둔 엄마의 연중행사 김장 담그기
용도에 따라 오젓,육젓,추젓을 골라서 구입할 수 있다
 용도에 따라 오젓,육젓,추젓을 골라서 구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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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직접 김치를 담가 먹는 가정이 줄고 있다는 요즘이지만 여든을 앞둔 친정엄마가 치는 최고의 반찬은 단연 손수 담근 김치입니다. 수시로 다양한 계절 김치를 담가 드시기도 하지만, 매년 초겨울 무렵 연중행사로 치르는 김장은 그 의미가 대단하지요.

김장 후 김치 항아리만 몇 개 땅 묻어 놓으면 아무리 혹독한 겨울이 와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는 엄마. 일 년을 별러 담는 김장이기에 김장에 들이는 정성 또한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대가족 시집살이를 했던 40~50년 전 만해도 100포기 200포기는 일도 아니었다지만 요즘 들어서는 시집간 세 딸들에게 나누어 줄 김치까지 담는다고 해도 50포기 이상 김장을 하는 가정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서구화되는 입맛에 김치에는 손도 대지 않는 아이들이 늘어가다 보니 김치 한 통을 가지고 한 달씩 먹는 가정도 적지 않기 때문이지요.

이래저래 엄마도 올해는 김장 배추 양을 확 줄였습니다. 먹는 양이 줄기도 했지만 가을 가뭄 탓에 배추가 예년에 비해 속이 덜 차고 웃자란 데다가 가격마저 올라 당신 마음에 썩 흡족하지 못하다는 이유지요.

일 년에 한번 당신의 멋진 음식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김장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엄마에게 바쁘다, 천천히 하자, 올해는 파는 김치가 싸니 사먹는 게 남는 것이 라는 등의 핑계는 먹히지 않습니다. 젓갈을 사러 내일 소래에 가자고 하면 무조건 가야하는 것이지요.  

전쟁 세대 어머니의 담담함 "전쟁 나믄 밥 안 먹냐?"
배에서 바로 내려 팔딱팔딱 뛰는 생새우
 배에서 바로 내려 팔딱팔딱 뛰는 생새우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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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날 오후 심상치 않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아시안게임 중계를 하던 텔레비전에서 굵은 자막과 함께 속보가 지나가더니 이내 다급한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겠지요.

"북한 개머리 해안포기지에서 포탄 발사. 연평도 포격"
"연평도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화면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지금 연평도 주민과 전화연결을 해 보겠습니다."
"여긴 불바다예요. 지금 방공호로 피신하고 있어요."

마치 중동 가자지구를 보는 듯한 화면을 보면서 며칠 전 아들을 입대시킨 후 울며 돌아왔다던 친구의 얼굴도 떠오르고,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들의 얼굴도 떠오르고 아직 어린 조카의 얼굴도 떠오르며 만감이 교차합니다.

'이러다 전쟁 나는 건 아니겠지? 아들 친구도 연평도 해병대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상상하지도 못했던 북한의 도발 뉴스에 잠시 넋이 나간듯 텔레비전만 망연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친정엄마와 했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혹시나 무슨 일이 날지도 모르는데 내일 소래가는 건 다음으로 미루자고 할 요량이었던 거지요. 전쟁의 참상에 대해 잘 알고 계신 노인들이기에 또 얼마나 놀라셨을까 걱정도 되고해서 전화를 드려보았습니다.

"뉴스 보셨어요? 이북에서 연평도에 포탄을 떨어뜨렸다네요."
"그러게 말이다. 그 놈들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우린 다 산 늙은이니까 전쟁이 나든 난리가 터지든 상관없다만 우리 손주들이 걱정이다."

"그래서요. 내일 소래가는 거 다음에 가야겠지요?"
"아~ 왜? 전쟁날까봐?"

"아니 그래도 혹시라도 새우젓 사러 갔다가 이산가족되면 어떡해요."
"애구~ 새가슴 같으니라고. 아무 걱정 말고 내일 아침에 차 대라. 전쟁 안 난다. 그리고 전쟁 나믄 밥 안 먹냐? 아무 일 없을 테니까 예정대로 낼 와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친정엄마는 의외로 담담하고 담대하십니다. 지난 시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건대 전쟁이 날 것 같지는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쟁이 날까 두려워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미루고 텔레비전 앞에만 앉아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냐시네요. 내일 전쟁이 나도 오늘 할 일은 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다음날 아침. 마음은 복잡했지만 역시 엄마 말씀대로 걱정하고 앉아 있다고 누가 김장을 대신 해줄 것도 아닌지라, 부모님을 모시고 젓갈을 사기 위해 소래로 향했습니다. 마음 한구석엔 이런 상황에 누가 장을 보러 올까 싶은 의구심을 가지고 말입니다.

어수선한 시국에도 열심히 하루를 사는 사람들

싱싱한 횟감 생선과 꽃게를 구입할 수 있는 소래어시장.
 싱싱한 횟감 생선과 꽃게를 구입할 수 있는 소래어시장.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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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소래에 도착하니 저의 걱정은 아침 햇살에 안개 걷히듯 사라져버렸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와 본 다른 날과 비교해 다소 덜 복잡한 편이긴 했지만 시장은 여전히 활기에 넘치고 있었던 거지요.

전쟁이 나든, 난리가 터지든 심지어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엄마의 말이 피부에 와 닿는 순간입니다.

"육젓도 등급에 따라서 값이 다 달라요. 고급은 kg당 4만 원 짜리도 있고. 김장 담기 적당한 추젓은 kg당 1만원이야. 육젓은 비싸니까 조금만 사다가 반찬으로 먹고 언니야. 김장은 추젓으로 해. 저울 잘 줄게."

"생새우 사세요. 지금 바로 배에서 내려서 통통하고 포실 포실해. 이거 봐 팔딱팔딱 뛰잖아. kg에 만원만 줘. 한말에 5만원 가는 거야. 값은 깎지 말고 사기만 하면 한 바가지 더 얹어줄게 이리 와봐. 언니야."

활기가 넘치는 삶의 현장에는 맛있는 것도 정말 많았습니다. 백화점이나 마트에 비해 30%이상 가격이 저렴하니 가져간 장바구니가 순식간에 터질듯 가득 차겠지요.

보기에도 싱싱해 보이는 생새우와 갓 잡아 올린 듯 펄떡이는 숭어, 맛깔난 낙지젓, 오징어젓, 명란젓과 제철을 맞은 홍합과 굴까지…. 값싸고 신선한 해산물을 가득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애 키우는 애미가 그렇게 간이 작아서 어따 써. 진짜 전쟁이 터져도 엄마는 침착해야 하는 거야. 애들 챙기고 살림 챙기고 먹 거리, 잘 거리, 살거리 챙기는 게 엄마지. 겁부터 집어먹고 걱정만 하면 애랑 다른 게 뭐있냐."

백번 맞는 말씀이지요.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는 상황이라면 최선을 다해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혹시 내일 전쟁이 난다해도 혹시 그보다 더한 위기가 닥친다고 해도 오늘 김장을 하려고 합니다.  


태그:#김장, #새우젓, #생새우, #젓갈, #소래어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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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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