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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삶을 유지하는데 아니 정확히 연명해나가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분명히 의식주이다. 그래서 그것이 갖춰지는 삶이 마지막 노선이라고 할 정도이다. 마지노선, 그렇다면 정신을 유지하는 것에 있어서 마지노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적어도 내가 사랑받는다는 자각이 있는 상태 일 것이다. 누군가 한 사람은 날 사랑하고 있다.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자각이 정신의 마지노선이다. 사람이란 매우 복잡하고 예민한 동물이라서 때로는 정신을 지탱해주는 마지노선을 유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생존의 마지노선이 무너지더라도 정신의 마지노선이 지탱된다면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당신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합니다라는 공익광고가 소위 말해 먹히고 또 널리널리 퍼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때때로 전투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동일한 인물의 사랑을 받고 싶을 때 혹은 삐뚤어져 버린 사랑에서 탈출하고 싶을 때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 혹은 사랑해주는 존재와 전투를 벌인다. 그래서 사랑을 주고받는 행위는 가장 말랑말랑한 행위이면서 동시에 가장 치열한 행위가 되기도 한다.

야마다 에이미의 <풍장의 교실>은 이런 전투사를 보여주고 있다. 단 세편의 단편이 실린 사실 단편집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두툼한 소설들이 실려 있는 이 책에는 전투와 전투상황의 관계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돋보인다. 더욱이 그 전투들이 "이 전투를 통해서 우리의 사랑은 더욱 도톰해지고 밀착되어졌습니다."라는 교훈적인 내용으로만 끝나지 않는 것 역시 매력적이다.

이 단편집의 특성은 세 편이 순서대로 여성의 성장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에서 소녀로 그리고 성인 여성으로 세편의 단편소설 속 화자들은 성장해나간다. 그로인해 전투장도 그리고 대상도 더불어 그 방식까지도 바뀌는 것이다.

그런고로 첫 번째 단편 <풍장의 교실>은 막 전학을 온 한 여자아이의 이야기이다. 관심의 대상이 되고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끼고 남자가 가지는 관심에 대처하는 법에 눈떠가는 한 소녀가 그 관심으로 인해서 따돌림을 당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순수의 세계라고 생각했던 초등학교 교실에 집단적 광기를 입힘으로서 그 속에 읽는 얽히고 얽힌 관계들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집단적 광기를 물고기가 헤엄치듯 조류에 휩쓸려가는 것과 습성에 묘사하여 표현한 부분은 탁월한 묘사력이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더불어 따돌림을 당하던 아이가 그 따돌림을 극복하는 과정은 가슴 한켠을 서늘하게 만들어 줄 정도로 위협적이기도 하다.

이제 아이는 자라서 사춘기 소녀가 되었다. <나비의 전족>의 화자이다. <나비의 전족>은 보다 작은 관계를 보여준다. 교실의 일원으로서 사랑받고자 했던 혹은 그저 존재를 인정받고자 했던 아이의 삶을 <풍장의 교실>이 보여줬다면 <나비의 전족>은 좀 더 미묘하게 사춘기 소녀의 삶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는 친구와의 우정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더불어 처음 성(性)에 눈 뜨게 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이 성(性) 역시 친구와의 우정이라는 전투에 미묘하게 이용된다는 것이다. 여자아이들의 우정이란 사실 순수한 우정이라기보다는 권력 암투에 가깝다. 누가 누구와 가까운지 혹은 가까운 사이에서는 어떻게 미묘한 권력이 형성되는지 이런 것들은 우정이란 이름으로 쉽게 둔갑하여 소녀들을 잠식시킨다. <나비의 전족>은 바로 이를 드러내고 더불어 전족이라는 표현으로 우정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속성을 비유적으로 나타내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도 한다.

집단에서 그리고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투쟁하던 아이가 이제 성인이 되었다. <제시의 등뼈>화자이다. 아이가 있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는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야 하고 아이는 어느 날 자신의 삶에 침입해 아버지의 사랑을 공유해야 하는 여자와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는 앞서의 전투보다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직접적이다. 결국 이 직접적인 전투가 두 사람에게는 보다 긍정적인 관계로 나아가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은밀하고 은폐된 전투는 관계를 부정적으로 혹은 종결시켜버리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난 전투는 어찌되었건 관계를 지속시켜줌으로서 야마다 에이미의 독특한 관계론을 접할 수 있는 것이 이 단편의 매력이라고 할 것이다.

3편의 단편이 이처럼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단편 속 화자들도 겹쳐 보인다. 마치 한 아이의 성장을 보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이 단편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주제 때문에 비롯되는 일이다. 사랑을 얻기 위한 혹은 벗어나기 위한 전투 그리고 거기에 따른 미묘한 관계형성과 관계의 변동, 사실 관계라는 것은 쉬운 것처럼 보인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유명한 장면처럼 매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만들어가는 혹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때때로 관계는 만들어진다. 그러나 사실 관계 맺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그것을 유지시키는 것은 맺는 것보다 배의 인내심과 배의 노력이 드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정말 물밑전투를 유발하기도 한다. <어린왕자>처럼 풋풋하고 달짝지근한 관계맺기는 이 책에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 현실적이고 적나라하고 때로는 책 속으로 뛰어들어 그만해라고 소리치고 싶은 잡힐 듯한 관계가 여기에 있다. 사랑 때문에 늘 전투중인 우리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을 소설이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에 수정후 게재됩니다.



태그:#풍장의 교실, #야마다 에이미, #서평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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