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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 <알 자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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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르 알 아사드(46). 그가 태어난 1965년,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는 시리아의 국방부 장관이 됐다. 하페즈는 단순한 임명직 장관이 아니었다. 1963년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 '하나의 아랍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쿠데타에 성공한 바트당의 핵심 인물이었다.

하페즈는 1970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을 몰아내고, 그 이듬해(1971년)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하페즈는 2000년 6월 10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통령 자리를 지켰다. 

집권 기간 동안 하페즈는 대외적으로 이스라엘에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한편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아랍에서 시리아의 위상을 높이며 '아랍의 비스마르크'로 불렸다. 대내적으로는 1946년 독립 이후 쿠데타가 끊이지 않던 시리아의 정국을 안정시켰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그 안정은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유혈 진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하페즈는 철권통치를 했다. 1963년 선포된 국가비상사태법(이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을 적용해 반대파 인사 수천 명을 감옥에 가뒀고, 1982년엔 무슬림형제단을 유혈 진압했다(이때 하마 시에서는 2만여 명이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에 관심 없던 바샤르, 형의 죽음으로 인생이 바뀌다

하페즈는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애초 그 자리는 바샤르의 몫이 아니었다. 후계자 수업을 받은 건 바샤르의 형 바실이었다. 바샤르는 안과의사가 되고자 했다. 1988년 다마스쿠스 대학에서 안과 학위를 받은 바샤르는 1992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영국 런던으로 떠났다.

<알 자지라>에 따르면, 바샤르는 정치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바샤르의 인생은 1994년 180도 바뀌었다. 유력한 후계자로 여겨지던 형 바실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바샤르는 다마스쿠스로 돌아와야 했다. <가디언>은 이에 대해 "바샤르가 후계자 수업을 받기 위해 소환됐다"고 전했다. 안과의사의 길은 멀어졌고, 바샤르는 아버지에게서 권력을 물려받기 위한 수순을 밟았다. 1994년 탱크부대 지휘관이 된 바샤르는 아버지 하페즈가 사망한 2000년에는 군과 바트당의 지도자로 부상해 있었다.

그러나 바샤르가 하페즈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장애물'을 한 가지 치워야 했다. 만 40세 미만은 대통령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한 헌법이었다. 시리아 의회는 바샤르를 위해 나이 제한 조항을 뺀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 후 바샤르는 투표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돼(찬성률이 97%가 넘었다) 2000년 7월 11일 취임했다.

시리아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해 보도한 <가디언>.
 시리아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해 보도한 <가디언>.
ⓒ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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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의 봄'은 오래가지 못했다

<알 자지라>는 당시 시리아 사람 중 상당수가 바샤르를 환영했다고 전했다. 대통령 경호실장으로서 종종 공식 행사에 군복을 갖춰 입고 나타났던 바실이 아버지 하페즈처럼 철권통치를 할 것이라고 예상됐던 것과 달리, 바샤르는 유학파로서 개혁적인 인상을 줬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바샤르가 통치하는 시리아가 하페즈 집권기와는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다. 바샤르도 자유를 확대하고 경제를 개방하겠다고 약속했다. 바샤르는 대통령이 된 후 약 700명의 정치범을 풀어줬고, 이는 시리아의 인권 상황이 상당히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의 봄'으로 알려진 바샤르표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하페즈 체제를 지탱해온 구세력이 바샤르의 개혁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구세력은 바샤르가 더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택하도록 압박했다.

<알 자지라>는 "운신의 폭이 좁았던 바샤르는 오래지 않아 '정치 개혁에 앞서 경제 개혁'이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시민들이 바란 정치 개혁은 미뤄졌다고 보도했다. <알 자지라>는 정치 경험이 부족했던 바샤르가 집권 이후 아버지 하페즈처럼 국내외 위기 상황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다마스쿠스에 주재하는 한 유럽 외교관은 "시리아가 독재자 없는 독재 체제가 됐다"고 말했다.

시리아는 2009년 인권 단체인 '휴먼 라이트 워치'로부터 인권 부문에서 세계 최악의 국가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았다. '휴먼 라이트 워치'는 시리아의 인권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평가했다. 이와 관련, <알 자지라>는 "시리아 당국이 인권 운동가 등을 계속 체포하고, 웹사이트를 검열하며, 반체제 성향의 블로거들을 구금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리아 시민들의 시위를 보도한 <알 자지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리아 시민들의 시위를 보도한 <알 자지라>.
ⓒ <알 자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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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없는 독재 체제' 시리아에 불어온 민주화 바람

이처럼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권력이 이어지며 자유가 제한됐던 시리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아랍을 뒤흔들고 있는 민주화 바람이 시리아에도 불어온 것이다. 바샤르는 튀니지와 이집트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시민 봉기가 시리아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민주화 바람은 시리아를 비껴가지 않았다.

3월 16일(현지 시각) 남부 지역에서 시작된 시위는 시리아 곳곳으로 확산됐다. 반정부 시위대는 "혁명", "부패 근절",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고 있다. 시위가 번지자 시리아 정부는 이를 힘으로 누르는 한편, 24일(현지 시각) 국가비상사태법 폐지를 검토하고 정치 참여 기회를 확대하겠다는 등의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시위 규모는 줄어들지 않았다.

시위대가 '존엄의 날'로 선포한 25일(현지 시각),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외신을 종합하면 금요예배(이슬람권에서는 금요일이 공휴일이다)가 있던 이날, 이번 시위의 중심지인 남부 도시 다라에서는 5만 명이 모였고, 다라 인근 지역에서도 시위가 벌어졌으며, 다마스쿠스에서조차 200여 명이 반정부 시위를 했다.

시리아 정부는 군을 동원해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리아 보안군이 발포해 다라 인근 지역의 시민 20여 명이 숨졌으며 다마스쿠스의 시위대는 보안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리아 정부는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후 34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국제앰네스티는 적어도 55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했고 현지의 인권 단체들은 100명 이상 희생됐다고 보고 있다.

'존엄의 날'은 피로 물들었지만, 시리아의 민주화 시위가 잦아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정부가 24일 발표한 개혁안도 시위대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취임 초기 '다마스쿠스의 봄'을 가져왔던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태그:#시리아, #아랍 민주화, #바샤르 알 아사드, #하페즈 알 아사드, #부자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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