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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문순태 선생이 어머니를 기리고자 세운 시비
 작가 문순태 선생이 어머니를 기리고자 세운 시비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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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갑게 맞아주는 호남사람들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하더니, 나는 일흔이 가까운 이즈음이 한철인 양 몹시 바쁘다. 그도 그럴 것이 올 여름 전후로 두어 권이 책이 나올 예정이다. 거기다가 지난해에 펴낸 <영웅 안중근> 2쇄 개정 작업까지 하다 보니 입술이 터졌다. 이렇게 바쁘게 지낸 줄도 모르고 연초부터 호남 의병 후손들이 한번 다녀가라고 마냥 성화다.

사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TK'의 원조인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서 중학교까지 다닌 토종 골수 영남사람이다. 그런데 이즈음 나를 초대해 주고 살갑게 맞아주는 곳은 영남사람들이 아닌 호남사람들이다. 이는 아마도 내 평생 지역을 초월해서 인연을 맺으며 살았던 탓일 거다. 군대에서도 교단에서도 소대원이나 학생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자의 자녀보다 사형수의 아들을 입에 발린 말로 아닌. 몸이나 마음으로 더 사랑했다.

이후 작가로 의로운 사람을 찾아갈 때도 영남보다 호남부터 먼저 살폈다. 나는 이것이 이 시대 먹물이 든 사람의 최소한 양식이라는 신념 때문이다.

"어따메 아무리 바빠도 잠깐 쉬어가랑께. 얼른 쌔기 와 창평 장국밥 한 그릇 먹고 가라고."

연초부터 전남 담양군 창평에 사는 고광순 의병장 후손 고영준 선생이 여러 차례 초대했다. 더 이상 거절하다가는 "사람이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욕먹을지도 모르겠다. 담양에 사는 장흥 고씨들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제봉 고경명 의병장 후손으로, 400년을 이어 한말에 녹천 고광순 의병장으로 맥을 잇는, 우리나라 제일의 항일 명문가가 아닌가. 몇 해 전, 그분은 나의 호남의병 답사 길안내를 맡았다. 그래서 지난 4월 20일, 하던 일을 접고 1박 2일로 남도여행을 떠났다.

생오지 '문학의 집'
 생오지 '문학의 집'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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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오지 마을의 문순태

공교롭게도 광주로 떠나는 날 아침, 광주 엠비시(MBC) 제작국 윤행석 차장에게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내가 쓴 호남 벌에 휘날리는 창의의 깃발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를 바탕으로, 고장을 빛낸 의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작하고자 기획 중이라고 했다. 마침 오늘 내가 광주로 간다니까 터미널로 마중을 나오겠단다.

담양 대밭에서 호영남 작가의 만남(오른쪽 문순태, 왼쪽 필자)
 담양 대밭에서 호영남 작가의 만남(오른쪽 문순태, 왼쪽 필자)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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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서 광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데, 내 카페 '박도글방' 매니저인 프라우고 선생님이 터미널로 마중을 나오겠다고 전화가 왔기에 깜짝 놀라 물었더니, 당신도 장흥 고씨로, 제봉 녹천의 후손인데 집안 어른을 통해 나의 광주행을 알았다는 것이다.

광주와 창평에서 이분들을 모두 만나 맛난 남도 음식을 즐기면서 방송 업무도 얘기하고 회포도 풀었다. 그날 밤 사미인곡의 고장 창평에서 일박을 했다.

이튿날 창평 장터에서 담백한 장국밥을 먹은 뒤 나그네 옷깃을 부여잡는 녹천 후손 고영준 선생의 손길을 뿌리치고 곧장 길을 나섰다. 예로부터 "손은 떠나는 뒷모습이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 길로 작가 문순태 선생의 생오지 마을을 찾았다.    

나는 작가 문순태 선생을 진작부터 알았다. 1970년 무렵 한 문예지에서 장편소설을 공모하기에 응모했으나 내 작품은 예심에도 들지 못한 채 낙방이었다. 당선작은 전남 담양 출신의 문순태로, 나는 부러운 마음과 함께 내심으로는 적의를 품었다.

그 뒤 그분의 여러 작품을 읽으면서, 그분은 나보다는 몇 수 위인 고수라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당신의 작품에 흠뻑 빠져들면서 젊은 날에 품었던 나의 적의에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그런 가운데 몇 해 전, 한 출판사에서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이라는 책을 같이 엮은 데다가, 그분의 산문집 <생오지 가는 길>을 읽고서는 마냥 감탄했다. 그분은 여전히 나보다 몇 수 더 위인지라, 꼬리를 내리고 경의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동차도 더 갈 수 없고, 손 전화도 잘 터지지 않는다는 무등산 뒷자락 생오지 마을에서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이래 처음으로 반갑게 만났다. 골수 호남인과 토종 영남인의 만남이었다. 나는 호남의 예술과 음식과 멋을 예찬했고, 그분은 영남의 산세와 작가와 학문을 예찬했다. 한참동안 생오지 문학의 집 서재에서 상대 지역을 예찬하는 차담을 나눈 뒤, 뜰로 나왔다. "봄꽃 찢어지게 아름다운(문순태의 말)" 뜰에는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어머니의 향기

어머니의 향기
보채는 강아지를 안아주는 문순태
 보채는 강아지를 안아주는 문순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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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생각하면
청국장 냄새가 난다
세월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쓰디 쓴 삶의 발효
사무치게 보고 싶은 오늘
그 향기 더욱 푸르고
빛이 바랠수록 그립다

- 문순태 짓고 쓰다

몇 해 전, 어머니가 아흔여섯 나이로 돌아가시기 직전, 병원에 가는 길에 어머니는 당신이 저승 가는 길인 줄 아시고는 아들에게 저금통장을 주더라고 했다.

그동안 딸 아들 손자손녀들이 준 돈을 꼬깃꼬깃 모아 통장에 담아 둔, 어머니가 맏아들에게 준 마지막 유산은 사백여만 원이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아들은 그 돈을 어디에다 쓸까 고민하다가 그 돈으로 어머니를 그리는 '사모의 시비'를 세웠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지아비를 잃은 어머니가 딸 아들 여러 자식을 몸으로 키운 그 노고를 어찌 짧은 글로 다 쓸 수 있겠는가. 더욱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지렁이 산골 아낙네가.

원주 내 집으로 돌아온 뒤, 다시 내 일상에 빠져 지내는데 책꽂이에서 참고도서를 찾다가 문순태 산문집 <생오지 가는 길>이 눈에 띄어 펼쳤다.

조선의 어머니

대학에 다니는 손자를 위해 어머니는 한동안 서울에 계셨다. 내가 전화를 할 때마다 어머니는 집안일보다는 "올 농사 어쩌냐?" 하고 물으시기 일쑤였다. 농사도 안 짓는데 웬 농사 걱정을 하시느냐고 자증을 토하면 "농사가 잘되어야 세상이 편타. 농사가 어디 내 것 늬 것이 따로 있다냐, 농사는 우리 것이제"하셨다. ………

,생오지 가는 길> 표지
 ,생오지 가는 길> 표지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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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오 년 전 쯤의 일이다. 그 무렵 만해도 냉장고가 귀한 시절이었다. 드물게 냉장고를 갖고 있는 집에서는 대부분 한옥의 경우 마루에 놓아두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께서는 갑자기 마루에 놓아둔 냉장고를 골방으로 치우라고 성화였다. 그 무거운 것을 왜 하필이면 골방으로 옮겨야 하냐면서 나는 어머니의 명을 거역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화를 내시며 이불보로 냉장고를 덮어씌우고, 그것도 부족하여 냉장고가 보이지 않도록 뒤주를 옮겨 가려버리는 것이었다.

"오늘이 고조부님 제삿날인께 친척들이 올 것 아니냐. 친척들 중에는 전셋집도 못 들고 사글셋방에서 사는 사람도 많은듸, 보태 주도 못험시로 저 비싼 냉장고를 자랑이나 허드끼 마루에 떠억 세워 놓으면 뭣이 좋겄냐. 가난한 친척들헌티 부끄러운 줄도 알아사제."

나는 그때서야 어머니가 이불보로 냉장고를 덮어씌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한테 회초리로 종아리를 얻어맞은 것보다 더 부끄럽고 마음이 아렸다.
- 문순태 산문집 <생오지 가는 길> 99-103쪽 '흙냄새 나는 어머니'에서 뽑음

문순태 형의 어머니가 바로 내 어머니요, 조선의 어머니였다. 조상대대로 그 조선의 어머니들이 이 겨레의 명줄을 이어왔다.

어버이날을 맞으면서 이 세상 모든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인다.

지역도, 높고 낮음도 없는 무등산
▲ 무등산 지역도, 높고 낮음도 없는 무등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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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문순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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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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