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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회]

 

3.

엄마 방으로 돌아온 사피나는 침대 위에 있던 아빠의 빈 가죽가방을 서랍장에 집어넣었다. 내용물들은 엄마의 유품들을 정리할 때 함께 소각했다.

 

더 이상 남은 것도, 남길 것도 없다. 벽은 원상태로 복구시켰다. 소파가 있던 자리에는 화장대를 가져다 놓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람들은 드라마틱한 반전을 기다린다. 그것은 어느 날 불쑥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기 남아서 인간 먼지와 사회의 쓰레기가 되거나, 뼛속 깊은 원한과 증오를 품은 채 궤멸되는 삶을 반복할 수는 없다.

 

저들이 원하는 대로, 먼지처럼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블루스에 작은 거처를 마련했다. 이모 집 반대편이다. 총을 들어도 그곳에 가서 들고, 자살폭탄저항으로 순교하더라도 거기에서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엄마의 추모의례가 끝난 다음날이었다. 사피나는 하마스 나블루스지역위원회 간부를 찾아갔다. 그는 뒤늦은 애도를 표시했지만 저항투쟁 역할을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다. '존경하는 알-파와즈의 딸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어머니로서의 여성 지위는 남성의 것보다 명백히 우월하다는,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신중하게 생각하자고 했을 때, 그와의 대화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예언자는 독신을 금했다. 결혼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모든 무슬림들이 맺어야 하는 신성한 계약이다. 결혼한 사람은 그의 종교의 반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언행록에 적혀있다. 그렇지만 결혼제도 속에서 그 말을 믿으며 사는 것은 지금 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아랍여성들의 자궁'이라고 주장하는 아라파트의 패배주의적이고 기회주의적 태도에도 신물이 난다. 이번에도 그는, 점령에 저항하는 동족들을 제거하겠다고 약속하면 이스라엘군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미국의 휴전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그 사이 이스라엘 정부는 700km에 달하는 수용소 담장을 콘크리트장벽과 전기철조망으로 둘러치는 작업을 재개했다. '테러'를 막는다는 구실로 설치되는 분리장벽이 완성되면 서안지구의 절반이 이스라엘 영토가 된다. 대부분의 비용은 미국의 원조금으로 충당되고 있다.

 

공사가 끝나면 우리들은 십여 개로 완전히 고립된 게토에 수용된다.   

 

어제 오후 만났던 지역투쟁조직의 고위책임자는 제안을 최종적으로 수락했다. 도피 중이었던 그는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연락해왔다.

 

희망은 분노와 용기라는 아름다운 두 딸을 낳았다고, 아우구스투스가 말했다.

 

어떤 임무를 맡던 성실하게 수행할 것이다. 구체적 역할이 결정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알릴 수가 없다. 임무에 따라서는 끝까지 비밀을 유지해야 할 수도 있다. 무엇을 하든 부끄럽지 않게 행동할 것이다.

 

사피나는 마지막으로 남편 사진이 담긴 금도금액자를 배낭에 집어넣었다.

 

이모로부터 사진을 전해 받았을 때, 지나간 시간을 모두 돌려받은 기분이었다. 그것을 간직했던 사진 속 남자도 죽었다고 했다. 그 또한 총을 들고 압제에 맞섰던 전사였다. 그의 사진은 남편 사진 뒤에 붙여놓았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사피나는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만일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엄마의 1주기 추모식을 위해 돌아올 것이다.

 

4.

미래는 남은 자들의 유서이다. 그리고 현재는, 죽은 자들의 전리품이다.

 

<끝>


태그:#팔레스타인, #아라파트, #분노와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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