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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을 기리는 동상과 비석
 신숭겸을 기리는 동상과 비석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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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은 아니지만 왕건(877~943)과 신숭겸(?~927)은 대구에 이름을 남겼다. 927년의 동수대전 때 견훤군에 대패하여 죽고(신숭겸) 도망친(왕건) 결과이다. 그 대표적 유적지가 바로 동구 지묘동 파군재 삼거리 뒤편, 왕산 아래의 '신숭겸장군 유적지'(대구시 기념물 1호)이다.

지묘동 신숭겸장군 유적지에는 '신숭겸 장군이 이곳에서 순절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 있다. 그리고 평광동 골짜기인 시량리 끝자락에 가면 사과밭 뒤 산비탈에 그의 유허비도 남아 있다. 시량리 복판에는 신숭겸 장군을 제사를 지내기 위해 근래 중건된 모영재도 있다.

동수(동화사)대전이 남긴 신숭겸장군유적지 일대의 '왕건' 관련 지명들

왕산 : '왕'건이 넘어서 도망을 친 '산'
지묘동 :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입고 왕인 척하는 절'묘'한 '지'를 내어  왕건을 살린 마을[洞]
독좌암 :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왕건이 넋을 잃고 혼자[獨] 앉아[坐] 있었던 바위[岩]
독암서당 : 독좌암 인근에 세워진 서당
파군재 : 견훤군이 왕건군(軍)을 부순[破] 재(고개)
시량리 : 동네[里]사람은 왕(王)을 사라졌다[失]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로동 : 전쟁통에 건장한 사람[老]들은 볼 수 없고[不] 아이들만 남은 마을[洞]
안심 : 왕건이 도망을 치다가 멀리 온 끝에 마음[心]을 놓은[安] 곳
반야월 : 안심에 닿았을 때는 달[月]이 반(半)쯤 뜬 밤[夜]이었다.
무태 : 게으른[怠] 사람이 없는[無] 마을, 또는 군사들이 게을러서는[怠] 안 된다[無]
연경동 : 선비들이 경(經)전을 열심히 공부하고[硏] 있는 마을[洞]
도덕산 : 연경동 바로 뒤에 있다고 해서 도덕(道德)산이라는 이름을 얻음
살내 : 전쟁을 하느라 화'살'이 '내'(강물)를 이루었다.


왕산, 독좌암, 독암서당, 불로동, 반야월, 안심 등 대구의 동구 지역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왕건은 앞산에도 여러 지명을 만들어내었다. 그가 숨어지냈던 안일암과 앞산 정상부 턱밑의 왕굴, 그리고 은적사와 또 다른 왕굴,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성주 방향으로 탈출하기 이전에 잠시 들렀던 임휴사 등이 바로 그곳이다.

앞산에 남은 왕건 관련 지명들

안일암 : 왕건이 '안'전하고 편하게[逸] 숨어 지낸 '암'자
왕굴 : '왕'건이 숨어 지냈던 동'굴'
은적사 : 왕건이 숨어[隱] 지낸 흔'적'이 남은 '사'찰
임휴사 : 왕건이 머물면서[臨] 쉰[休] '사'찰


물론 왕건과 신숭겸은 전통적 의미에서는 '대구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대구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가족과 함께 거주하지도 않았고, 무덤을 남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대구 사람'이다. 대구에 '큰'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왕건이 남긴 자취를 순서대로 따라가며 걸어보는 일은 충분히 '역사' 여행이 된다. 이순신이 남해 바닷가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그곳에 무덤을 남기지도 않았지만, '이순신' 하면 한산도가 연상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경상남도가 이순신 유적지를 발굴하고 보전하여 관광상품화 한다고 해서 누가 그것을 탓할 것인가.

역사 속 '대구의 인물', 왕건·신숭겸·박팽년...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사육신기념관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사육신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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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순으로 본다면, 왕건에 이어 '대구의 역사인물'로 추천할 만한 분은 사육신 박팽년(1417~1456)이다. 다른 사육신의 남자 혈육들은 모두 처참하게 죽지만, 박팽년의 손자는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던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다. 물론  태어난 뒤 세조가 살려준 것은 아니고, 며느리와 그녀의 몸종이 머리를 써서 왕을 속인 결과이다.

박팽년의 며느리는 고향인 성주 인근의 대구 관아에 종으로 와 있었다. 그녀의 몸종도 따라와서 같이 관청의 노비로 일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출산을 앞두고 있는 몸이었다. 몸종이 며느리에게 '만약 마님께서 아들을 낳고 제가 딸을 낳으면 아기들을 바꿔서 저들을 속이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계교를 낸다. 그렇게 하면 두 아기가 다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박팽년의 손자는 노비 신분이 되어 '박비'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박'씨 성을 가진 노'비'를 뜻하는 이름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몸종), 어머니의 상전(친어머니), 그리고 몇 명의 아주 가까운 친척만 제외하면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성종 때가 되어 사육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바뀌면서 박비는 신분을 공개하게 되고, 왕으로부터 '충신의 자손'이라는 칭찬을 듣는다. 그는 이름도 '박씨 가문의 하나뿐인 귀한 자손'이라는 뜻을 가진 '박일산'으로 바꾸고, 묘골로 들어와 살게 되는데 나중에는 99칸 기와집을 지을 정도로 자손이 번창하였다.

사육신의 남자 혈육이라고는 박비 단 한 사람만 살아 남았으니, 묘골의 육신사는 당연히 전국적으로 하나밖에 없는 사육신 자손 세거(世居) 답사지이다. 사육신기념관도 있고, 임진왜란 때에 왜군들이 불을 질러도 불타지 않았다는 '전설'을 가진 '국가 지정 보물' 태고정 건물도 볼 만하다.

빠뜨려서는 안 될 인물, '홍의장군' 곽재우   

김굉필을 기리는 은행나무와 도동서원
 김굉필을 기리는 은행나무와 도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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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현'의 한 사람인 김굉필(1454~1504)도 젊은날을 보낸 현풍 일원의 땅에 국가사적이자 보물인 도동서원이 설립되어 있고, 그의 외증손자인 정구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 거목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점에서 '대구의 역사 인물'이다. 게다가 김굉필에게는 처참한 사화의 슬픔이 깃들어 있으니 그는 '나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즉, 김굉필과 관련이 되는 도동서원, 다람재, 이노정, 김굉필나무, 그의 묘소 등은 '대구의 역사 여행지'로 추천해도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말이다.  

인물과 관련되는 대구의 역사여행지 거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바로 홍의장군 곽재우(1552~1617) 관련 유적지이다. 그의 무덤이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에 있고, 그를 기리는 기념관과 동상이 동구 망우당공원에 있다. 공원의 이름을 '망우당'으로 정한 것도 물론 그를 기리는 조치이다.

또 망우당공원에는 임란의병관도 건립되어 있어 당시의 역사를 생생하게 공부할 수 있는 조건도 갖추었다. 그를 기리는 예연서원이 남아 있는 것도 물론이다. '대구의 역사 인물'을 말할 때 홍의장군 곽재우를 빠뜨리는 실수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곽재우를 기리는 예연서원
 곽재우를 기리는 예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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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로 들어오면 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서상돈(1851~1913) 선생이 있다. 특히 시내 중심가 국채보상공원 안에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새로 문을 열어서 외지인들에게 자랑하기에도 좋다. 그의 집이 상화고택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고, 세계적 한약 유통의 거점인 대구약령시 골목과 붙어 있으므로 답사자에게는 일석삼조의 길이 된다. 그의 무덤도 수성구 범물동 천주교묘지 안에 있으므로 시내버스를 타고도 찾아갈 수 있다.  

현대로 들어오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시인 이상화(1901~1943)가 대표적인 '대구의 인물'이다. 그의 무덤은 달성군 화원읍에 있으며, 그를 기려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가 중구 달성공원 안에 있다. 그가 살았던 집도 작은 기념관으로 재단장되어 시내 한복판에 남아 있고, 달서구 두류공원 인물동산과 수성구 수성못둑에는 새로 건립된 시비도 우뚝 위용을 뽐내고 있다. 물론 그가 학생들을 가르쳤던 교남학교도 대륜고등학교로 바뀐 채 건재하고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무대인 들안길을 거닐면서 옛날의 아픔을 되새겨보는 여정도 역사여행의 교육과정으로 추천할 만하다. 특히 들안길은 지금 대구를 대표하는 먹거리골목으로 변해 있으므로, 외지에서 온 손님이라면 이곳에서 대접을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음식여행도 되니 일석이조인 것이다.

대구 찾아온 외지인 식사 대접은 '빼앗긴 들'에서

그런가 하면 대구에는,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에게 크게 소개할 만한 인물이 남긴 답사지도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장수로 조선에 왔다가 바로 귀화하여 도리어 왜군과 싸운 '역사의 인물' 김충선(1571~1642)을 기리는 녹동서원이다. 김충선은 부당한 전쟁에 반대하여 조선에 귀화한 것으로 열려진 인물이므로 '평화교육'의 교재가 될 수도 있고, 한일간의 우호를 다짐하는 국제교류의 전형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달성군 가창면의 녹동서원에 가면 바로 옆에 한일우호관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김충선을 기리는 녹동서원
 김충선을 기리는 녹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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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중국에서 귀화한 두사충 또한 '대구의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 장수였는데 조선에 귀화하여 대구에서 살았다. 그래서 대명동이라는 마을도 생겼고, 그를 기려 세워진 모명재라는 재실도 수성구 만촌동에 남아 있다. 또 그의 무덤이 모명재 바로 뒤 형제봉 기슭에 있다. 이만하면 누가 뭐래도 두사충은 '대구의 역사 인물'이다. 근래 중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모명재를 방문하였다는 기사가 언론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물론 모명재와 그의 묘소는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상태로 다듬어져야 할 필요성은 있다.

두사충의 재실인 모명재
 두사충의 재실인 모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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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경치만 구경하고 식당에서 음식만 사먹고 돌아오는 '단순'여행에서 이제는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체험'여행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 핵심은 사람이다.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남긴 주체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수대전의 왕건과 신숭겸, 사육신의 박팽년, 사화의 김굉필, 임진왜란의 곽재우, 국채보상운동의 서상돈, 항일의 이상화, 그리고 일본인 김충선과 중국인 두사충이 남긴 '역사 이야기'는 충분히 외지인들에게 대구가 내놓을 만한 관광 상품이다. 잘 다듬고 가꾸어 대구의 품격을 높이는 데 활용해야 마땅하다.


태그:#이상화, #곽재우, #왕건, #서상돈, #사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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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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