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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계교
 죽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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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에서 죽계천에 놓인 죽계교를 건너면 선비촌이 나온다. 선비촌은 죽계천의 지류인 옥계천 동쪽 산자락에 조성한 고가촌이다. 인동장씨 화기리종택, 두암고택, 해우당고택, 김세기가, 만죽재 등 기와집이 여덟 가구가 있고, 장휘덕가, 김규진가 등 초가가 다섯 가구가 있다. 선비촌은 '이곳에 살았던 선비들의 정신을 본받자'는 목적으로 2004년 문을 열었다.

이들 선비정신의 핵심은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구무안(居求無安),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이다. 수신제가와 입신양명은 '몸을 닦고 집안을 잘 다스린 다음 출세를 해서 이름을 드높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거구무안은 '살면서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 마지막으로 우도불우빈은 '도를 걱정하지 가난을 걱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선비촌이라고요? 이젠 숙박시설입니다

짚풀공예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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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장씨 화기리 종택
 인동장씨 화기리 종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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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북쪽으로 나 있는 비교적 넓은 마당 길을 따라 선비촌을 둘러본다. 마당에는 돌로 만든 12지신 상이 서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쥐, 소, 호랑이 등이 서 있다. 이들을 지나면 떡집, 대장간, 짚 공예 체험장이 나온다. 떡집에서는 인절미를 만들어 팔고 있다.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떡을 사서 하나씩 돌린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금방 만든 인절미는 목이 메질 않는다. 정말 맛있다. 대장간은 배점리에 살면서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가 된 배순을 기리는 의미에서 '배순 대장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짚 공예 체험장에는 짚을 이용해 만든 짚신, 삼태기, 주루막, 닭둥우리 등이 전시돼 있다.

이제 기와집과 초가집을 구경할 차례다. 우리는 두암고택과 인동장씨 화기리종택을 자세히 살펴본다. 이들 두 기와집은 ㅁ자형의 사대부집으로 크기와 웅장함에서 보는 이를 압도한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마당이 있고, 그 안에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ㅁ자형의 안채가 있다. 안채의 바깥쪽으로 약간 돌출돼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내외의 구분을 뚜렷이 하던 풍속의 소산이다. 사랑채는 마당 쪽으로 마루와 난간을 만들어 외부인과 바로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품위 있는 전통기와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들 고택이 지금은 숙박시설로 쓰이고 있다. 선비정신이 퇴색되는 것은 아쉽기는 하지만, 한옥에서의 숙식을 통해 전통문화를 체험한다는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 같다. 숙박비는 2인이 사용할 수 있는 작은 방이 5만 원, 4인이 사용할 수 있는 큰방이 10만 원이라고 한다. 나는 인동장씨 종택에서 묵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에게 고택 숙박이 어떠한지 물으니, "방도 따뜻하고 환경도 쾌적해 괜찮았다"고 답한다.

선비촌 주변에는 소수박물관이 있지만, 우리의 목적이 소백산 자락길 걷기인지라 옥계교를 건너 저자거리로 나간다. 저자거리에는 죽계루를 중심으로 음식점, 주막, 찻집, 기념품점이 자리 잡고 있다. 죽계루 앞에는 무슨 행사가 있는지 준비하는 손길이 바쁘다. 저자거리를 나온 우리는 선비상 앞에 선다. 영주시가 강조하는 그 '선비'다.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학자 또는 유생으로, 유교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선비는 사(士)에서 왔다고도 하고, 선(善)에서 왔다고도 한다. 선비는 안동에서 강조하는 양반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버려진 아이들 때문에 유명해진 제월교

청다리옛집의 냉면
 청다리옛집의 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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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상 앞으로 나오다 보니 소백산 자락길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기념 촬영을 한다. 소수서원과 선비촌을 구경했으니, 다음 행선지인 순흥향교로 가야 할 차례다. 순흥향교로 가려면 다시 죽계천에 놓인 제월교 옆으로 해서 상류로 올라가야 한다. 여기 있는 제월교의 다른 이름이 '청다리'인데, 이곳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바로 청다리에서 주워온 순희 이야기다. 순흥부사가 청다리에 버려진 아이를 주워 기른 다음 성인이 되자 다시 청다리로 돌려보냈다는 얘기다. 순희는 청다리에서 기생 출신의 생모를 다시 만났고, 결혼도 해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서원과 향교에서 공부하던 젊은이들이 기생과 어울리다 생겨난 사생아를 이곳 청다리 밑에 갖다 버렸던 데서 생겨난 이야기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지역 사람들은 아이들을 놀리는 말로 '청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곳 제월교 옆에는 '청다리 옛집'이라는 유명한 식당이 있다. 비로사 성공스님이 적극 추천하는 집인데, 냉면이 아주 맛있다.

금성대군 신단
 금성대군 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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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청다리 옛집' 가까운 곳에는 금성대군 신단이 있다. 금성대군은 세조가 된 수양대군의 동생으로 형의 왕위찬탈에 반대하다 이곳 순흥 땅에 유배됐다. 그리고 나중에 순흥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결국 세조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 후 순흥부는 폐부됐고, 상대적으로 풍기로 중심이 옮겨갔다. 200여 년이 지난 숙종 때에야 단종이 복위됐고, 순흥부도 그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숙종 45년(1719) 순흥 사람들은 금성대군의 대의와 절개를 기려 신단을 설치했다. 그리고 영조 14년(1738) 금성대군의 관작이 회복되고 정민공이라는 시호를 받게 됐다. 금성대군 신단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영조 18년(1741)이며, 그때부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中丁)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신단의 가운데는 금성대군이 있고, 금성대군의 왼쪽에는 이보흠 부사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의로운 사람들(義人)이 있다.

건물에는 사람이 살아야지... 요즘 향교 다 죽었어

순흥향교
 순흥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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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순흥향교로 간다. 향교로 가는 길은 청구리 향교촌을 지나 산쪽으로 나 있다. 순흥향교로 가려면 산쪽으로 난 길이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순흥향교는 숲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순흥향교가 처음 세워진 때는 고려 충렬왕 30년(1340)이다. 그러나 단종 복위운동으로 순흥 고을이 없어지면서 향교도 사라졌다. 200여 년이 지난 숙종 9년(1683) 순흥부가 회복되면서 향교도 다시 세워지게 됐다. 그 후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겼으며 정조 14년(1790) 현재의 위치에 오게 됐다.

향교 건물로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 교육 공간인 명륜당,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양반과 선비들의 계회 공간인 영귀루(詠歸樓) 등이 있다. 전체적인 구성은 명륜당을 앞에 두고, 대성전을 뒤로 배치한 전학후묘 방식이다. 향교의 중심을 이루는 명륜당과 대성전에는 단청을 했고, 나머지 건물과 누각에는 단청을 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관리는 잘 되고 있으나, 찾는 사람이 없어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요즘 향교는 정말 다 죽었다. 주택이나 건물에는 사람이 살아야 기운을 얻는 건데, 사람이 찾지 않으니 점점 퇴락할 수밖에 없다. 이제 향교의 교육기능과 지방 유지들의 사교공간으로서의 기능은 모두 사라졌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봄과 가을에 지내는 석전(釋奠)뿐이다. 대성전에서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 말이다. 제사 역시 젊은 사람들은 없고 노인들만 찾아 언제 그 전통이 끊어질지도 모른다. 이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당사자도 황당해할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정말 볼품 없어진 금성반석(제2곡)
 정말 볼품 없어진 금성반석(제2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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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자락길은 순흥향교에서 다시 죽계천을 따라 올라가다 금성교를 건너게 돼 있다. 금성교에서 보니 은행알을 씻는 사람이 보인다. 그로 인해 주변에 은행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 금성교에서 우리는 잠시 상류 쪽을 살펴본다. 그곳에 넓은 반석(磐石)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이 바로 죽계구곡의 제2곡에 해당하는 금성반석이다. 여기서 금성은 금성대군에서 나온 게 틀림없다.

<죽계지>와 <흥주지>에 나오는 죽계구곡은 제1곡 백운동 취한대, 제2곡 금성반석, 제3곡 백자담, 제4곡 이화동, 제5곡 목욕담, 제6곡 청련동애, 제7곡 용추비폭, 제8곡 금당반석, 제9곡 중봉합류다. 우리가 답사할 소백산 자락길은 이 죽계구곡을 따라 나 있다. 금성반석을 지나니 이번에는 금성대군 위리안치지가 나온다. 위리안치(圍籬安置)란 죄인을 유배지에 가두고 그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를 치는 일을 말한다.

믿을 수 없는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믿을 수 없는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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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위리안치지에 대해 말이 많다. 실제로 금성대군은 현재 신단이 있는 곳에 유배됐다가 죽었는데, 최근에 고증도 없이 위리안치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요즘 지방자치단체에서 하는 일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지나친 경쟁과 과장, 그리고 밀어붙이기다. 비슷한 사업을 경쟁적으로 하고, 없는 것을 만들며, 작은 것은 크게 하고, 경제성도 없는 일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들은 복원이라고 하는데, 어디에 그런 기록이 있으며, 어디에 그런 모습이 있단 말인가!

논둑 밭둑을 지나 순흥저수지로

단풍나무 가로수길의 우리 회원
 단풍나무 가로수길의 우리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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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리안치지를 지나면 길은 논 사이로 이어진다. 늦가을 들판은 추수가 끝난 상태다. 중간에 이정표를 보니 순흥저수지까지 0.8㎞라고 적혀있다. 이곳에서 논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니 밭둑 위에 돌방무덤이 하나가 보인다. 돌방무덤은 한자로 표현하면 석실묘(石室墓)가 된다. 무덤의 앞쪽 문이 열린 것으로 보아 굴식(횡혈식·橫穴式)으로 보인다. 비교적 지위가 높았던 이 지역 유지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밭에는 겨울농사 준비하는 사람들의 밭갈이가 한창이다.

이곳에서 순흥저수지로 가려면 논둑 밭둑길을 지나 배점리로 가는 차도로 나가야 한다. 차도에 이르니 단풍나무 가로수길에 단풍이 한창이다. 우리처럼 걸어가는 사람들이 가끔 보인다. 저수지에 이르니 멀리 소백의 연봉이 물속에 그 모습을 드리우고 있다. 이곳 순흥저수지 안에는 죽계구곡 중 제3곡인 백자담(柏子潭)이 있다. 백자담이란 잣나무 그림자가 드리우는 못이라는 뜻이다.

순흥저수지와 소백산
 순흥저수지와 소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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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저수지는 죽계저수지, 배점저수지로도 불린다. 그것은 이 저수지가 순흥면에 있고, 죽계천에 있고, 배점리에 있기 때문이다. 순흥저수지는 농어촌공사에서 부르는 공식적인 명칭이다. 요즘 농어촌공사는 농지조성 사업, 새만금 방조제 조성 같은 간척사업, 저수지 개설 및 둑 높이기 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순흥저수지 옆 휴게소에는 안축의 '죽계별곡' 시비가 세워져 있다. 죽계별곡은 계절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즐기려는 선비의 호연지기를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 선비촌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면 http://www.sunbichon.net 을 클릭하면 된다.



태그:#선비촌, #제월교(청다리), #순흥향교, #금성대군 신단, #순흥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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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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