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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법정 밖 로비 한켠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50대 중후반의 한 여성이었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지지자들은 벌금형의 의미에 대해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그나마 다행 아니냐고 서로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슬피 우는 그 여성은 이날 중형을 선고받은 박명기 교수와 관련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가슴 아픈 일이다. 인물 번듯하고 예의 바르고 호방한, 서울시 교육위원을 3번이나 역임한 현직 교수가 명예도, 재산도, 사람도 모두 잃게 된 것이다. 3년 징역형도 가혹하지만 선거빚에 쪼들려 카드 돌려막기까지 해야 했고 급기야 "산에서 뛰어 내릴 생각까지 했다"는 그와 그의 가족에게 추징금 2억 원은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다. 

중벌받은 박명기 교수... 왜 돈 받은 사람이 중용이냐고?

그에게 중형이 떨어질 것 같다는 예상은 이미 있었다.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 부장판사 김형두)가 12월 30일 결심공판에서 "사전매수죄는 사퇴시키는 사람(돈을 준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만 이 사건에 적용된 사후매수죄는 사퇴한 사람(돈을 받은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고 특히 강조한 것은 의미심장했다.

재판부는 19일 선고에서 "박 피고인이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거액을 요구한 끝에 자신의 선대본부장을 통해 5억 원을 받기로 했고, 이후 단일화 과정에 대한 녹취록과 (폭로) 문건을 작성했으며 곽 교육감이 돈을 주고 받기로 한 합의를 몰랐다는 것을 안 후에도 계속 폭로위협을 가했고 2억 원을 받고도 추가로 더 돈을 요구한 점" 등을 들어 그에게 중형이 불가피함을 설명했다.

기묘한 것은 그동안 공판 내내 그가 보인 모습이다. 왜 그는 "합의사실을 곽 교육감이 몰랐다는 것을 알고서도 내 형편이 너무 어려워 돈을 좀 부탁했고 대가성이 없는 돈을 받아 썼다"는 식으로 진술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곽 교육감의 '진실'에 걸맞은 것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유리한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대신 그는 자신이 얼마나 교육행정가로서 경륜이 있으며, 곽 교육감은 자신이 사퇴했기 때문에 당선된 것이고, 그렇게 당선된 곽 교육감이 자신을 따돌리는 데 화가 났었다는 식의 진술에 더 치중하는 듯했다.

그의 말 속에는 나름대로 진보진영에서 교육문제에 천착해 온 자기를 버리고 곽 교육감을 택한 진영에 대한 섭섭함이 짙게 배여 있었다. 이를테면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냈다는 인식이었다. 자신은 교육문제에 대해 곽 교육감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곽 교육감 당선에 일등공신이므로 마땅히 시교육청 정책은 물론 인사문제까지도 개입할 자격이 있다는 자기확신같은 것도 엿보였다. 

대가로 돈을 받은 것이 범죄라는 인식보다는, 억울하게 사퇴한 자기가 선거비용 정도를 보전받은 것이나 자리를 요구한 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느냐는 인식이 더 강한 것 아닌가하는 느낌까지 줄 정도였다. 자승자박이었다. 누군가는 그가 당초 10억 원이나 7억 원을 요구한 사실에서 '욕심'을 보았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의 사고방식을 해독하는 코드는 '분노'가 더 적합할 듯싶다. 후보 단일화과정에서 부당하게 밀려났다는, 자신의 자리를 엉뚱한 사람이 빼앗아 갔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분노가, 대가를 요구하는 과정뿐 아니라 법정에서까지 그를 사로 잡았던 것이다.

물론 박 교수는 "화해가 이루어 진 12월 이후에는 명시적으로 먼저 돈을 요구한 적이 없다"며 뒤늦게 방어에 나섰지만 이미 너무 많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 놓은 후였다. 재판부는 그가 돈을 받으면서 "아, 이건 사퇴의 대가지"하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는 심증을 굳힌 터였다. 그리고 그것을 곽 교육감 역시 대가성이 있음을 알았다고 판단한 근거의 하나로 삼았다.

"받는 사람이 대가로 알고 받았으면 거기엔 대가성이 있는 것"

재판부는 이밖에도 "대가성 판단여부는 주관적 동기가 아닌 두 사람의 관계, 2억 원 지급 경위 등 객관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되고 재판부는 이미 발생한 일이 어떤 결과를 빚었느냐에 대해 규범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전제 아래 ▲두 사람 사이에 돈을 주고 받을 만큼 친밀성이 없었다는 점  ▲박 교수의 사퇴로 교육감에 당선됐다는 이익이 있었다는 점 ▲사회 통념상 의례적인 범위를 벗어난 거액을 줬다는 점 ▲돈을 전달한 시기와 경위에 범죄은폐 의도가 있다는 점 등을 따져 볼 때 곽 교육감에게도 대가성 인식이 있었다고 본다고 밝혔다.

그래서 "사퇴 이후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선거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지키려는 입법취지에 따라" 당선무효형인 벌금 3000만 원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엄중한 판결에도 조중동을 앞세운 수구세력은 "돈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준 사람보다 더 중한 형을 받을 수 있느냐"며 아우성이다. 그것이 박 교수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일 리는 없다. 곽 교육감에게도 인신구속형을 때려 그의 사퇴를 강제함으로써 어떻게든 교육개혁을 막아야 한다는 검은 속마음일 터다.

하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곽 교육감에 대한 재판부의 유죄판결은 납득하기 어렵다. 재판부는 법적으로 대가성을 판단할 때 동기를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재판부 스스로 파악한 동기들, 즉 ▲수십년 지기 이보훈과 최갑수가 저지른 일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책임감  ▲자신은 교육감이 됐는데 다른 한 사람은 파락호가 됐다는 사실에 대한 부담감  ▲어려운 박명기에게 돈을 주고 진정으로 화해해야 한다는 절친 강경선의 충고 ▲박명기를 포용하고 협조를 받는 것이 좋겠다는 대의명분 등을 진정으로 받아 들인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대가성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 먼저  ▲법적으로 공소시효가 넘어가 돈을 안 줘도 당선무효가 될 위험성이 없어졌고 ▲당시 박명기는 서울교대 총장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폭로를 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김윤태 등 주변 측근들이 돈을 주지 말라고 말렸고 ▲화해가 이루어 진 12월부터는 돈 달라는 명시적 요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액을 줬다는 점에서 재판부가 곽 교육감의 '선의'를 인정했다면, 그런 선의를 가진 인물에게 어떻게 유죄를 내릴 수 있을까.

재판부는 이밖에 정상참작 사유로 ▲일은 최갑수, 이보훈 등이 저질렀는데(이들이 기소됐다면 더 중죄를 받아야 했다) 그 책임까지 질 이유가 없다는 점 ▲돈을 주고 받는 단일화를 일관되게 거절했다는 점 ▲추후 사실을 알고서도 합의 이행이라는 모양새를 취하지 않으려 한 점 ▲거액을 주기로 결심한 것이 강경선을 통해 박명기의 어려움을 알았고, 인생관 자체가 종교적 화해지향형인 강경선이 "돈을 주되 통 크게 많이 주라"는 권고가 있었다는 점 등을 들었거니와 이 역시 그 하나하나가 정상참작 사유 정도가 아니라 무죄소견의 근거로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재판부 스스로 밝힌 많고 많은 무죄의 근거들

그동안 재판부는 3개월여에 걸친 공판 과정에서 공판중심주의를 충실히 구현해 왔다. 변호인들은 물론 피고인들로부터도 "이런 재판을 받을 수 있어서 영광"이라는 칭송까지 받았다. 많은 방청객들이 판사를 'Judge'가 아니라 검찰·변호인·피고인들로부터 제각각 불거져 나오는 불협화음을 조율해 진실탐구의 목표로 끌어가는 'conductor'의 모습을 연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장중하고도 때론 유쾌하기도 했던 오케스트라의 결론이 과연 곽노현의 유죄여야 했을까. 재판장은 "'진영이 해야 할 선의의 보조 책임을 윤리적 책무감으로 자신이 맡았다'는 곽 교육감의 진술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본인의 마음이 진실이더라도 (그런 곽 교육감과), 법적으로 대가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판사들과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곽 교육감의 진실을 믿으면서도 유죄를 내린 재판장이 수구세력들의 눈치를 봤다고도 볼 수 없다. 다만 사회통념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그럼에도 검찰의 누군가가 이번 판결을 두고 '화성인 판결'이라고 했다 한다.

지구에는 너무나 선량한 나머지 사회통념을 뛰어 넘어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뇌물 준 사람이 뇌물 받은 사람보다 더 중한 형을 받아야 한다는 단순무식한 논리가 횡행하고 있다. 더구나 곽노현 교육감이 박명기 교수에게 준 돈은 뇌물이 아니라 선의의 부조임을 법원도 인정했다. 그렇다면 무죄였어야 한다. 고심 끝에 나온 판결일지라도 몇 군데에 논리의 오류가 보인다.



태그:#곽노현, #벌금형, #대가성, #화성인, #박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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