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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보면 "경주"는 참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도시 전체에 보물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는데, 사람들은 겉모습만 대충 휙 돌아보고는 경주를 다 본 것처럼 얘기하니 말이다.
 
경주남산도 마찬가지다. 한 번에 다 볼 수 있는 곳도 아니고, 외할머니의 속곳 주머니처럼 구석구석마다 매력을 숨겨두고 있는 곳이다.

 

첫 날 남산을 돌아본 뒤, 저녁에는 아름다운 야경으로 유명한 '임해전지(臨海殿址)'를 돌아보았다. 임해전지는 우리가 흔히 '안압지'라고 부르는 곳이다. 임해전은 각종 연회와 접대 등에 쓰인 별궁으로 알려져 있는데, 1980년의 안압지 발굴 조사에서 발견된 유물에서 '월지(月池)'라는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다.

 

안압지라는 이름은 세월이 흘러 폐허가 되어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모습을 본 후대의 시인 묵객이 지어부른 이름이 이제껏 전해지는 셈이다. 이제라도 '월지' 혹은 '임해전지'라는 제 이름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 든다.

 

경주남산을 오르던 둘째 날은 비가 간간이 흩뿌렸다. 솔숲의 향기가 감싸고 있는 삼릉을 지나 냉골 석조여래좌상을 만났다. 불두(佛頭)와 손의 형태는 잃었으되 법의의 매듭을 통해 아름다움은 고스란히 전해진다. 주장자를 짚고 사자후를 외치기 직전의 노스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위엄있는 모습이다.

 

선각육존불에 이르니, 적당하게 내린 비 덕분에 바위의 부처님이 더욱 선명하다. 비가 뿌려진 것이 고마울 지경이다. 이 곳은 바위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석가모니불과 좌우협시보살을 얕은 선각으로 새긴 곳이다. 두 개의 커다란 바위에 각각 삼존불을 그려넣으니 여섯 분이 나란히 경주를 내려다보고 계시는 형상이 되었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선각육존불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바위 위편의 배수로 때문이기도 하다. 빗물이 흘러갈 홈을 파서, 부처님의 머리 위로 빗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배려한 것이다.

 

삼릉에서 용장까지 이르는 길은 부처님의 인상도 다양하다. 어떤 분은 수더분한 얼굴에 두터운 입술로 말수적은 스님같은 얼굴이고, 어떤 분은 화려한 광배에 귀티나는 얼굴이건만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하다. 그런가하면 상선암 마애불처럼 두 눈을 꼭 감고 수행에만 정진하는 부처님도 보이고, 삼륜대좌불처럼 연꽃 위에 법의를 드리운채 참선에 들어계신 부처님도 계시다.

 

용장사지에 다다르니, 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아 우뚝 서있는 용장사지 삼층석탑이 안개비 속에서 신비감을 더해준다. 든든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의 탑이 따뜻한 시선으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하다. 

 

서라벌이 경주로 바뀌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도 숱하게 바뀌었지만, 한 자리에서 수천 년을 오롯이 지키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 곳을 돌봐주고 계신 모양이다.

 

남산을 걷다보면 길 양옆으로 부서진 불상과 탑의 부재들을 어렵지않게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올라갈 때는 기대감으로 설레어 올라가지만, 내려올 때는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돌 하나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곳이 경주 남산이다.

 

이틀간 내리 걸어본 경주 남산은 듣던 바대로 골짜기마다 부처요, 계곡마다 탑이었다. 118체의 불상과 96기의 석탑, 석등 22기, 147개소의 사지(寺址) 등이 산 전체에 자리하고 있으니, 눈에 띄는 돌마다 모두가 사연을 담고 있는 셈이다.

 

수천 년 동안 쌓여온 경주남산의 비밀을 짧은 몇 마디 말로 다 풀어낼 수야 없을 것이다. 그저 첫눈에 반한 이를 두고두고 아껴보듯 앞으로 차근차근 오래도록 다녀볼 생각이다. 사랑이 깊어지면 정이 될 터인데, 경주남산에 대한 정은 날이 갈수록 새록새록 더 깊어지지 않을까 싶다.


태그:#경주남산, #석탑,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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