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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을 기리는 곳으로 경남 산청에 있다.
▲ 덕양전 전경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을 기리는 곳으로 경남 산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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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 19년, 금관국(金官國) 임금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맏아들 노종(奴宗), 둘째아들 무덕(武德), 막내아들 무력(武力)과 함께 국고(國帑)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했다. 왕은 예를 갖추어 그들을 대우하고 상등(上等)의 직위를 주었다. 그리고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을 하였는데 각간에 이르렀다."

<삼국사기> 법흥왕조에 나오는, 수로왕이 세운 금관가야가 서기 532년에 멸망했다는 내용이다. 본문의 '김구해'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仇衡王 또는 仇亥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의 무덤은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1번지에 있다.

물론 신라에 투항하던 당시에 구형왕의 이름이 '김구해'였던 것은 아니다. 그냥 '구해'였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532년은 법흥왕 19년이므로 아직 가야인은 물론 신라인들에게도 성씨(姓氏)는 없던 시기였다. 우리나라의 성씨는 진흥왕이 당나라에 보낼 외교문서를 작성하면서 '김진흥(金眞興)'이라는 서명을 한 이래 처음 생겨났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였다.

구형왕, 신라에 나라를 바쳤다?

덕양전 외삼문과 홍살문이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고 있다.
 덕양전 외삼문과 홍살문이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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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구해'가 '김구해'로 된 것은 금관가야가 신라에 편입된 이후의 일이다. 진흥왕은 알지의 후손인 왕족 일가의 성씨를 '김(金)'으로 정하면서 금관가야 수로왕의 가문에도 같은 '김(金)'씨 성을 쓰도록 했을 것이다. 그렇게 수로 왕가를 '우대'하는 정책은 금관가야 세력의 복종심을 돋우는 데에도 유효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가야국 세력들을 신라로 끌어들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앞에 인용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구형왕에게 양왕(讓王)이라는 별명이 생긴 까닭도 설명해주고 있다.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했다(國帑寶物來降)'는 표현이 그것이다. 이 표현은 구형왕이 끝까지 신라와 혈전을 벌이다가 끝내 사로잡히거나 전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라를 들어 항복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라를 신라에 양(讓)보했다고 해서 양왕(讓王)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은 것이다.

항복할 때 보물 바친 것은 국가재산 이전

이 대목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청항(請降)하는 역사적 사건을 떠올려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경순왕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경순왕 9년(935) 겨울 10월, 사방의 국토가 모두 남에게 넘어가버려 국세가 약해지고 고립되었다. 이에 왕은 나라를 스스로 보존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신하들과 함께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신하들 중에는 (항복하는 것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 왕자가 말했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그래도 역부족으로)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

덕양전과 구형왕릉 중간쯤에는 김유신이 활쏘기 연습을 한 곳이라고 전해지는 사대(射臺)가 남아 있다. 사대 터에는 유허비가 세워졌다.
▲ 김유신 사대 덕양전과 구형왕릉 중간쯤에는 김유신이 활쏘기 연습을 한 곳이라고 전해지는 사대(射臺)가 남아 있다. 사대 터에는 유허비가 세워졌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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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대답했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지금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왕은 바로 시랑 김봉휴를 시켜 태조(왕건)에게 편지를 보내어 항복을 청하였다(請降).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그래서 마의태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1월, 태조가 (신라가 항복을 청하는) 편지를 받고, 대상 왕철 등을 보내 (경순)왕을 영접하게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서 왕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왕궁 동쪽의 가장 좋은 구역을 주고, 맏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구형왕릉 들어가는 산길 입구, 김유신 사대 맞은편에 가락국에 관한 기록이 새겨진 비와 비각이 있다.
▲ 가락국기비각 구형왕릉 들어가는 산길 입구, 김유신 사대 맞은편에 가락국에 관한 기록이 새겨진 비와 비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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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조의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러 가는 경순왕 일행의)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다'는 대목과 법흥왕조의 '(금관국 임금 김구해가) 국고(國帑)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했다'는 말은 사용된 표현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

항복을 하면서 나라의 '재정'을 바쳤다는 뜻이다. 경순왕이 항복하러 가는 길에까지 '사치'를 부렸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항복하는 금관가야의 재산은 곧 신라의 것이고, 항복하는 신라의 재산은 곧 고려의 것이니, 경순왕과 구형왕이 나라의 재산 목록과 실물을 잘 챙겨서 바쳐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천 왕산(王山)의 구형왕릉 들머리에 있는 덕양전(德讓殿) 안내판에도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선양했다'는 대목이 있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이 싸움 없이 신라에 나라를 바쳤다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표현이다. 선양(禪讓)은 '물려줄 선(禪)'에 '넘겨줄 양(讓)'이니 싸우지 않고 나라를 신라에 넘겼다는 뜻. 덕양전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과 그의 왕비를 제사지내는 집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다.  

구형왕이 저승에서 <삼국사기> 본다면...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기록들은 신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한 김부식의 개인 견해가 아닐까 여겨진다. <삼국유사>의 관련 서술은 그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일연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시간을 '(신라)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오매 (구형)왕이 친히 군졸을 부려 싸웠으나 저편은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략) 항복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구형왕이 나라를 들어 바친 것이 아니라 싸우다가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했다는 뜻이다. 만약 구형왕이 저 하늘에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본다면 그는 아마 억울하고 원통하여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릴 듯하다.

대전과 통영을 잇는 고속도로의 생초 나들목에서 내려 곧장 왼쪽으로 접어들면 길은 남강의 상류인 경호강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다. 경호강(鏡湖江)은 거울(鏡)과 호(湖)로 이루어진 이름만 보아도 짐작이 되지만, 강폭이 넓고 물이 깨끗하며, 큰 바윗돌이 없는 대신 모래톱이 크게 발달해 물살은 빠르지만 소용돌이를 치는 곳이 없다. 한강 이남 최고의 뱃놀이 명소로 이름이 높은 강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강을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고 4km 정도 즐겁게 달려가면 경호고등학교, 금서초등학교, 금서우체국, 농협 등이 큰 마을이 나타난다. 주요 기관 중 면사무소만 없는 이 화계리가 바로 구형왕릉, 덕양전, 왕산, 류의태 약수터 등을 자랑하는 이름난 역사 유적지이다. 

산청IC에서 내려 구형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강을 끼고 있어 아름답다.
▲ 구형왕릉 가는 길 산청IC에서 내려 구형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강을 끼고 있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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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 바로 아래 수정궁 짓고 살았던 구형왕

덕양전은 화계리의 중심이 되는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접어들면 바로 나타난다. 덕양전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은 다음과 같이 이곳을 설명하고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50호인 덕양전은 가락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仇衡王)과 그 왕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구형왕은 532년에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선양한 후 이곳 왕산(王山) 수정궁(水晶宮)으로 옮겨 살다가 5년 후 죽었다. 그때부터 향화(香火·제사)를 계속 받들었으며 … 지금의 건물은 1991년 문화재 정화사업으로 중건된 것이다."

위패는 '죽은 사람의 죽은 사람의 이름과 사망 날짜를 적은 나무 조각'을 말한다. 제사를 지낼 때 정면에 놓아두고 절을 한다. 지방과 다른 점은, 종이로 만들지 않고 나무를 써서 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양전이 구형왕과 그 왕비의 위패를 모셨다'는 말은 평범한 보통 집안에 견줘 말한다면 지방을 붙여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안내판에는 '구형왕이 532년에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선양한 후 이곳 왕산 수정궁으로 옮겨 살다가 5년 후 돌아가셨다'고 기록돼 있다. 왕산은 구형왕(王)이 옮겨와서 살았던 산(山)이라는 의미이니, 덕양전 뒷산이 본래부터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니라 금관가야 멸망 이후에 새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는 팔공산 아래의 작은 봉우리에 왕산(王山)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과 같다. 견훤에게 대패한 왕(王)건이 넘어서 도망을 친 산(山)이라고 해서 왕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구형왕릉이 있는 산은 이름이 왕산이다. 구형왕이 머물러 살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 왕산 구형왕릉이 있는 산은 이름이 왕산이다. 구형왕이 머물러 살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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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형왕이 5년 동안 살았다는 수정궁터는 구형왕릉 입구의 홍살문에서 왼쪽으로 난 가느다란 산길을 타고 1.5km 정도 올라가면 나오는 '류의태 약수터'의 오른쪽 산비탈 일대이다. 물론 당시의 건물이 남아 있을 리는 없으니, 그저 '여기가 구형왕이 살았던 수정궁 자리이구나' 하며 세월의 무상함을 탄식하게 될 뿐이다. 하지만 이렇듯 높은 위치에, 그것도 여느 약수터와 달리 '졸졸'이 아니라 '콸콸' 흐르는 '류의태 약수터'를 보면 수정궁터가 구형왕이 집을 짓고 살 만한 명당임에는 틀림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왕이 기거한 산, '왕산'
 
덕양전 앞은 삼거리다. 덕양전을 오른쪽에 두고 직진을 하는 도로에는 '동의보감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담을 타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산골로 들어가는 길에는 '구형왕릉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당연히 답사자는 구형왕릉로로 들어서야 한다.

길을 들어서면 바로 300m쯤 앞 산비탈 아래에 2층 누각 하나가 보인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모양의 붉은 누각이다. 이름이 망경루(望京樓).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은 아마도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과 신하들이 이 일대에서 김해 방향을 바라봤다는 뜻일 것이다.

망경루를 지나면, 오른쪽의 작은 골짜기 안에 절 하나가 숨은 듯 앉아 있다. 작은 연못 안에 아주 자그마한 칠성각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특징인 왕림사(王林寺). 하지만 이 절이 신라 고찰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는 때가 법흥왕 15년(528)인데, 그보다 불과 4년 뒤인 532년에 망국의 임금 구형왕이 사찰까지 창건했다고 보기에는 무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구형왕릉 입구의 사찰. 물론 당시에 있던 그 절은 아니다.
▲ 왕림사 구형왕릉 입구의 사찰. 물론 당시에 있던 그 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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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이 절을 구형왕과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단정짓는다면 왕림사가 아주 서운하게 여길 것이다. <삼국유사>에 남아 있는 기록들 때문이다. 구형왕의 할아버지인 김질왕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수로왕비가 결혼 첫날밤을 보낸 자리에 '왕후사(王后寺)'라는 절을 세운 것이 452년이다. 지금도 김해에 남아 있는 은하사와 장유암의 창건자가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이라고 한다.

김해시 무척산의 모은암(母恩庵)을 지은 이가 수로왕의 아들인 거등왕이라고 전한다. 심지어 밀양 삼랑진읍에 남아 있는 만어사(萬魚寺)는 수로왕이 창건했다고 한다. 이 기록들을 사실로 믿는다면, 왕후사, 은하사, 장유암, 모은암, 만어사 등이 창건된 시기보다 한참 뒤인 532년에 구형왕이 왕산에 절을 지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구형왕은 과연 왕산에 절을 지었을까

그렇다면 구형왕 이후 왕산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왕산사와 지금 보고 있는 왕림사는 어떤 관계일까? 구형왕이 죽은 뒤 이곳에 지어진 건물은 왕산사(寺)가 아니라 왕산사(祠)였을 것이다. 왕산사(王山祠)를 지어 제사를 지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의 문인 홍의영(洪儀泳·1750∼1815)이 쓴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보면 왕산에 왕산사(王山寺)가 있고, 구형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고 적혀 있다.

처음에는 사당(祠堂)으로 지어졌던 왕산사(王山寺)가 뒷날 왕산사(王山寺)로 확대 개편되지 않았을까 여겨지는 것이다. 덕양전의  구형왕과 그 왕비의 영정(影幀)이 본래는 왕산사(王山寺)에 모셔져 있었다는 이야기도 그런 짐작을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의 근거가 될 듯하다. 말하자면, 왕산사(王山祠)의 전통은 덕양전이 잇고, 왕산사(王山寺)의 전통은 왕림사가 이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왕림사에서 돌아 나와 100m가량 오르막을 걷는다. 오르막이 끝나면 왼쪽에 상당히 넓은 주차장이 있고, 드디어 구형왕릉으로 들어가는 숲길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는 것이 좋다. 차도는 왕릉 앞까지 만이 아니라 '류의태 약수터' 바로 아래에까지 닦여 있지만, 숲길까지 차를 몰고 다녀서야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아니다.


태그:#구형왕릉, #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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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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