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배균 저 <시 독해 매뉴얼> 표지
 김배균 저 <시 독해 매뉴얼> 표지
ⓒ 작은사람

관련사진보기

기억 하나.
1987년 대학 국문과에 입학할 당시의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신입생이 되고 대학의 낭만 대신 매캐한 최루탄 냄새를 맡아야 했던 4월의 어느 날, 과 선배가 내게 건네 준 김지하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에는, 고등학교 시절 내가 읽었던 김소월, 한용운, 김영랑과는 다른 시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낯설었으나, 살아서 펄떡였던 그 시들을, 나는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읽었다. 그리고 시 쓰기를 포기하였다. 시보다도 삶이 내게 먼저 다가섰다.

기억 둘.
국어 교사가 되어 나는 '시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교과서 단원 중 시가 나오면 유난히 달뜨고 흥분하여 떠들었으나, 아이들은 늘 막막해하였다. 백석의 시 <남산의주 유동 박시봉 방> 속의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떠올리며 삶의 자세를 말하고, 소월의 <산유화>에 숨어있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공감하고자 했으나, 시 속의 삶과 우주, 사랑과 절망을 이해하기에 앞서 아이들은 상징과 비유와 함축, 역설과 심상과 어조에 주눅 들고 난감해 하였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시의 아름다움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어떻게 가르칠지를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국어 교사로 살아온 20년의 시간 동안 나는 시를 배우고 가르치며, 마음으로 쓰고 있다. 그 길에 김배균의 책 <시 독해 매뉴얼>(작은사람 펴냄)이 나의 멘토로 나섰다.

문학적인 감수성보다는 논리적 분석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되는 선배 김배균은, 성남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살면서 나보다도 더 많은 고민과 어려움을 가졌으리라 짐작된다. 더구나 삶의 경험이 일천하고, 마음보다 몸이 앞서는 고등학교 남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일은 그에게 결코 쉽지 않은,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과제였을 것이다. 몇년 전 그 어두운 터널의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행복해하더니, 드디어 책을 출간하였다.

시의 언어는 흔히 일상의 언어와 다르며, 시를 읽어내는 힘 역시 일상적 언어 사용의 근육과는 다른 근육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의 언어 역시 일상의 언어에서 출발하며, 시를 마음으로, 감수성으로, 문학적 상상력으로 읽어내기에 앞서서 일단은 '알아먹어야 하는' 것이다. 김배균의 책은 이러한 기본기를 풀어내고 있다.

아이들이 어렵게 느껴지는 시에 다가서는 지름길로 택하는 것이 숱한 시의 해설이다. 그러나 참고서나 문학수업사이트에 요약, 정리되어 있는 해설은 시보다 더 어려운 용어들로 가득 차 있다. 조응, 투영, 환기, 표상……. 일상생활에서 쓰일 일이 거의 없는 어려운 한자어와 개념어로 가득 차 있다. 떡 집어먹으려니 젓가락질 어려워서 포기할 지경이다.

이 책에서는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기본이 되는 전략을 바로 시 안에서 찾고 있다. 시에 쓰인 언어를 '모으고 엮어서 이해하는 것'이 그것이다. 시인이 찾아낸 아름다운 시어를 밀어놓고, 시 밖의 생경한 언어에서 시의 답을 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다른 누군가의 감상과 해설이 아닌, 시인과의 소통 속에서 아이들 스스로 시를 감상하는 일이야말로 시에 쉽게 다가가고 친근하게 느끼며 아름다움을 공감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김수영의 <사령>이라는 시의 주제를 '불의(不義)에 저항(抵抗)하지 못하는 지식인(知識人)의 자기반성(自己反省)'이라는 말로 표현할 것이 아니라, 시 속의 구절을 엮어 '반짝거리는 활자와 달리 죽어있는 나의 영(혼)이 마음에 들지 않고, 욕되고 우습다'고 표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시 감상의 출발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의 성격이 '성찰(省察)적, 고백(告白)적'이라고 요약, 정리하기에 앞서서, 시인이 시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미워져 돌아가지만 가엾어지고 그리워하'는 나로 표현하였음을 먼저 읽어내자고 말하고 있다.

시를 가르치는 방법은 하나의 길일 수 없고, 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길은 참으로 먼 길일 것이다. 그러나 첫 출발은 다른 누구가 아닌, 시를 읽는 자의 출발점이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문학적 감수성이라는 잔 근육을 만들어주진 못할 것이다. 다만 기본이 되는 골격근 없이 섬세한 잔 근육을 발달시킬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준다.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면서 나는 '문학은 아름다운 것이다'를 말하기에 앞서서 '문학은 난해함으로 가득 찬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을 아이들이 깨우치게 된 뒤에야, 비로소 나는 열에 들뜬 눈빛과 벅찬 목소리로 아이들과 함께 공감하는 시 수업을 하게 될 것이다.

저자 김배균이 찾은 고등학교 시 수업이라는 터널의 출구가 우리 아이들에게도 빛으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또한 내게도, 삶으로 시를 쓰고, 교사의 수업으로 시를 가르치기 위해, 시로서 시를 배우는 공부가 되리라 믿는다.


시 독해 매뉴얼 - 스스로 시를 읽어내는 독해력 강화 노하우

김배균 지음, 작은사람(2012)


태그:#신간 소개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