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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후보는
"다시는 이 땅에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하며, "5·16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에둘러 인정했다. 이 발언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헌정질서를 유린한 사건을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강변할 수 있는 사람이 내가 사는 나라의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데자뷰(deja vu) 현상이 눈앞에 전개되는 것처럼...

첫 번째 거짓말 -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한 번만 더..."

박정희 통치시대는 나의 성장기와 일치한다. 라디오에서 정각을 알리는 시보가 울리면 언제나 "박정희 대통령은..."으로 시작되는 뉴스를 들으며 자랐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1971년 대통령 선거는 나의 관심을 끈 첫 선거였다. 선거전은 뜨거웠다.

이미 4년 중임제의 임기를 채운 박정희는 69년 개헌을 통해 3선 도전의 길을 열어두었지만, 김대중 돌풍은 박정희의 당선을 장담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장기집권을 우려하는 여론을 의식하여 "이번이 마지막이니 한 번만 더 밀어달라"며 차기 대선 불출마 선언을 공약으로 제시하게 된다.

물론 이 공약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박정희는 이 공약 자체를 맘에 내켜 하지 않았고, 선거 후 불출마 선언을 건의한 참모를 경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제7대 대통령에 취임한지 불과 1년 후에 유신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와 연임제한을 완전히 폐지한 것이다.

두 번째 거짓말 - 정치는 정치인에 맡기고 군에 복귀하겠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식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민정불참선서식>까지 했지만 그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민정불참 선서식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식 다음날 같은 장소에서 <민정불참선서식>까지 했지만 그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히스토리채널 방송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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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체제를 무력으로 유린한 박정희는 거사 직후, 권력욕을 감추기 위해 혁명공약 등을 통해 사회가 안정되면 모든 권력을 민간에 넘기겠다는 '민정이양' 약속을 여러 차례 했었다. 1963년 3월 27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정치는 민간에 넘기고, 대통령에 불출마하겠다"고 선언하는 선서식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장면을 연출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군의 본분으로 돌아가자"며 맹세했던 이들을 반 혁명분자로 몰아 숙청하는 등 권력장악을 위한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다. 박정희는 선서식이 있기 하루 전 같은 장소에서 창당식을 가진 민주공화당의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으며, 결국 군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물론 그는 이후에도 대통령의 임기와 관련하여 수차례 거짓말을 했었다. 대표적인 예가 1967년 5월 3선 개헌 논의가 전개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내심 3선 개헌을 원하면서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나를 제2의 이 박사(이승만)로 만들 셈이냐?"며 펄쩍 뛰는 모습을 보였지만, 불과 두 달 뒤인 7월 27일엔 담화문을 통해 "(3선)개헌이 꼭 필요하다면 연말로 논의를 미루라"며 3선 개헌 일정의 로드맵을 지시한 것이다.

세 번째 거짓말 - 더이상 나 같은 불행한 군인 없어야... 

1974년 8월 15일, TV는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광복절 기념식을 중계하고 있었다. 갑자기 탁한 총성이 울리며 화면이 흔들리다 방송이 중단되더니 얼마후 식은 다시 계속되었다. 긴급뉴스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격을 당해 병원으로 이송 수술 중'이란 소식을 전하더니 이윽고 서거를 알리는 비보가 전해졌다.

국민장이 있던 날 영부인의 유해를 실은 운구차가 청와대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청와대의 철제 대문을 잡고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떠나는 운구차를 잠시 쓰다듬더니, 이윽고 눈물을 훔친다. 내가 본 박정희의 가장 쓸쓸한 모습이었다.

영부인의 국민장은 많은 국민을 비통하게 했다. 졸지에 국민은 국모를 잃어 서럽다고 했다. 당시 서울시장의 아들과 혼담이 오갔다는 큰딸 근혜양의 파혼이 안타깝다고 불쌍하다 했고, 운구차를 보며 눈물을 훔치던 대통령의 뒷모습이 너무 쓸쓸하다고 했다.

5·16 직후에도 그러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더이상 이 땅에 나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말아야 한다, 군인은 나라를 지킬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발언을 수시로 하며 국민의 연민을 이끌어냈다. 국민은 정말 너무 착해서 어리석은 걸까? 적지 않은 국민이 그의 말을 곧 대로 믿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박근혜 후보가 인용하기까지 한 '불행한 군인'이야 말로 박정희의 입에서 나온 그 어떤 거짓말보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우리 사회의 위기를 보다 못해 군대를 끌고 나왔다던 그는 군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결국 독재자 이승만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더욱이 가증스러운 것은 80년 민주회복을 바라던 국민의 열망을 짓밟은 신군부 쿠데타를 주도한 정치군인 조직 '하나회'가 사실상 박정희가 양성한 친위조직이었다는 점이다.

나폴레옹과 박정희, 루이 나폴레옹과 박근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과 박정희는 여러모로 닮은 점이 있다. 군인의 신분으로 국민의 신망을 바탕으로 권력을 쟁취했고, 시민혁명으로 출범한 공화정을 유린했으며 종신집권을 노렸다는 점이 닮았다. 이 점은 그의 조카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3세) 역시 마찬가지다.

루이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친위 쿠데타를 통해 의회를 해산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마치 박정희가 3선에 성공하고 나서 국회를 해산하고, 종신 집권을 위해 자신의 정부를 상대로 유신쿠데타를 자행한 것처럼...

혁명의 나라 프랑스는 루이 나폴레옹의 퇴진 이후 시민 혁명으로 쟁취한 공화정을 수차례 붕괴시킨 전력이 있는 보나파르트 가문의 후손들이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을 아예 법으로 금지하는 극약 처방을 통해 시민이 쟁취한 공화정의 수호를 다짐하였다.

어린 시절 독재자의 딸로 자란 박근혜 후보의 권위적인 태도나 소통부재가 그녀가 유력한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벌써 많은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바로 여론에 밀려 5·16 논란에서 한발 물러선 듯 한 그녀의 태도가 그렇다. 박정희가 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데 3선 개헌을 부정하고 불출마를 공약한 것처럼 그의 딸인 박근혜 후보가 속마음과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12월 대선에서 박 후보가 승리한다면 진심이 담기지 않은 어제의 5·16에 대한 발언이 언제 다시 "구국의 일념으로 단행한 혁명"으로 뒤바뀔지 모른다. 이렇게 가다가는 훗날 우리도 프랑스처럼 박정희 가문의 후손들은 대통령 출마를 금지하는 법안까지 입법해야 하는 소동을 벌이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태그:#박정희, #박근혜,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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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음악 오디오 사진 야구를 사랑하는 시민, 가장 중시하는 덕목은 다양성의 존중, 표현의 자유 억압은 절대 못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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