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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이구 자네두 이가 아파 왔나보네."

차례를 기다리며 신문을 보고 있는데 진료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오며 반가워합니다. 얼른 머리를 들어보니 동네 어르신입니다. 간호사가 나와서 내 이름을 부릅니다. 나는 어르신에게 눈인사만 하고 간호사를 따라서 진료실로 들어갔습니다.

오른쪽 아래 맨 끝에 어금니가 언젠가부터 뿌리부분이 조금 보이며 흔들리는 듯 하더니 며칠 전부터는 신경이 쓰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프지는 않지만 음식을 먹을 때마다 조심스럽고 신경이 쓰여서 밥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멀쩡한 어금니가 왜 흔들리냐고 하니까 의사는 웃기부터 하더니 연세가 있으셔서 잇몸이 부실해지면서 내려앉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발치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두터운 압박지혈용 거즈를 물고 나니까 뭔가 억울합니다. 어금니가 충치도 하나 안 먹고 아주 멀쩡한데 빼버리는 방법밖에 없다니 속상하고 또 얼마나 아까운지를 모릅니다.

의사는 맨 끝에 어금니라 빼도 별 지장이 없어 이를 안 해 넣어도 되지만, 안 해 넣으면 바로 그 윗어금니가 흔들리게 될 확률이 높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금니를 해 넣는 게 좋다는 말인데 뺏다 꼈다 하는 착탈식 틀니 한 개 값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늙은 부모의 틀니 값은 일반 틀니든 임플란트 틀니든 간에 자식에게 큰 부담이 된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닙니다.

"늙으면 이가 그렇게 돼... 난 아래 어금니가 하나두 없어"

어금니를 해 넣으려면 한 달 후에 와서 진료를 받으라는 권유를 받고 치과를 나서자 불볕더위가 달려듭니다. 약국에 들러 처방전대로 2일분 복용 약을 받아들고 부지런히 걸어가다가 아까 그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풍성한 가로수 그늘 밑 긴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어르신이 옆에 와 앉으라고 손짓을 합니다. 나를 기다렸던 모양입니다.

"이가 아파?"
"끝에 어금니가 흔들려서 뺐어요."

손바닥으로 오른쪽 뺨을 누르고 말을 하자 어르신이 히죽 웃습니다. 처음 뺐나 보네 하는 웃음입니다.

"늙으면 이빨들이 그렇게 된다구. 난 아래 어금니들이 하나두 없다구. 저절루 막 흔들려서 뺐지 뭐야. 아깐 마지막 하나 남은 걸 뺐다구. 꽉 물고 있던 솜도 방금 뺐구."

어르신은 저만치 보이는 휴지통을 눈으로 가리켰습니다. 시원섭섭한 눈빛입니다.

"그럼 형님, 해 넣으셔야 겠네요."

어르신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나는 아차 했습니다. 어르신이 딸네 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어르신은 맞벌이 하는 딸네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을 도맡으며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갓난아기이던 외손자·외손녀가 지금은 반듯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어금니들이 없으니까 뭘 제대루 먹을 수가 없다구. 아침에 딸한테 이야길 하니까 대뜸 '엄마 돈 있잖아, 엄마 돈으로 해!' 하는 거야. 그간 딸과 사위가 틈틈이 준 용돈을 모았으면 아주 큰 돈이 됐을텐데, 그게 죄다 슬금슬금 며느리 주머니로 들어갔다구."

어르신은 남매를 두었습니다. 어르신의 말로는 아들이 사업을 할 적마다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들어먹었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세상을 떠난 남편이 남긴 이십 평 짜리 아파트도 날아갔다는 것입니다.

"아파트는 아들이 날리고 용돈은 모으기가 무섭게 며느리에게 가고, 그렇게 뜯기고 요 모양 요 꼴이 된 내 모습이 밉고 안됐고, 속상하고, 그래서 딸애가 그렇게 나왔던 거지. 근데 난 막 서럽더라구. 영감이 죽었을 때보다 더 서럽더라구."

오십 초반인 어르신의 딸은 아직도 직장인입니다. 상냥하고 부지런합니다. 어쩌다 마트나 길에서 만나면 깍듯이 인사를 하면서 근황을 묻기도 합니다. 아무리 필요에 의해서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지만 나름대로 고충이 있을 것인데 그런 티는 하나도 없고 언제나 따듯하고 밝기만 합니다.

"이렇게 앉아있으니까 친구들이 그리우네. 친구들이 모여서 점심도 먹구 여행도 가구 그랬을 적에 난 딸네 집에서 살림하구 유모차 끌구 다니구 그랬지. 그러느라구 친구들과 뚝 끊겼지."
"이제라도 연락을 해 보세요."
"연락해서 뭐하나. 지금은 시간이 널널해두 이빨 하나 못하는 꼬라지가 됐는데."

어르신은 또 서러워지는지 먼 하늘을 봅니다. 홀가분하게 모임에 가서 한껏 웃고 수다도 떨고 여행다니는 친구들이 눈에 어른거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르신을 처음 만났던 건 어르신이 딸네 집에 살러 온 지 한 달 쯤 지나서 입니다. 노년기에 막 들어선 우아하고 고우신 어르신이 아기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다니다가 만개한 벚꽃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손주 돌보며 나이든 어르신, 이제 자신 위한 시간 갖으시길...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한 장면.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의 한 장면.
ⓒ 세인트 폴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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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무조건적이고 당연한 일이지만 외손자를 키우는 일은 반 강제로 요구받은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손자·외손녀 키우랴 살림하랴 그러는 사이에 막 노년에 접어들던 그 우아한 모습은 간 데가 없고 늙고 허리는 구부정해졌고 아래 어금니들은 다 빠졌습니다. 나도 먼 하늘을 보았습니다. 뭉게구름이 떠 있습니다.

어르신은 외손자를 키우면서 한 번도 힘들다거나 고되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아기가 잠이든 유모차를 나무 그늘에 놓고 쉬면서 '내가 요 녀석 때문에 세월이 가는 줄을 모르고 살지'라고 하면서 행복한 웃음을 지었던 적은 많습니다. 아기가 자라서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고 행복해 하였습니다.

나는 슬며시 어르신의 얼굴을 돌아보았습니다. 뭉게구름을 바라보는 어르신의 눈빛이 많이 부드러워졌습니다.

"형님, 지금쯤 따님은 아침에 형님한테 한 말을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
"그럴 거야. 뒤 끝이 없는 애니까."
"핸드폰 해보세요. 마침 점심시간일 거예요."
"건 싫어. 내가 왜 먼저 하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어르신도 어르신이 먼저 핸드폰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무섭게 면박을 당하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면 면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입니다. 그래서 더욱 서럽기도 했지만 어르신은 어머니인 것입니다. 면박을 할 정도로 속상한 딸애 마음을 감싸 줄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습니다. 어금니 시술 문제는 나중입니다.

마침내 어르신이 작은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냈습니다.

"에미다, 점심 먹었냐?… 난 아직이다. 뭐하긴, 어금니 뽑고 나와서 땀 식히구 있지. 뭐라구? 아 그래 그래…"

핸드폰을 접는 어르신의 얼굴이 함박꽃처럼 화사해졌습니다. 나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딸이 낼 나랑 치과에 가보자구 하네."
"역시 따님은 효녀예요."

어르신은 기분이 좋다 못해 신이 날대로 났습니다. 혼자서 막 중얼거립니다.

"아휴, 이빨 해 넣으면 음식도 가리지 않구 다 먹게 된다구. 갈비두 먹을 수가 있다구. 참, 저녁엔 친구들에게 전화 좀 해봐야지, 전화번호들이 안 바뀌었나 몰라. 바뀌었음 집으로 찾아가 봐야지. 얼마나 반가워들 할까."

이제부터는 어르신이 딸애 응원을 받으면서 자신을 위한 시간들을 가지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르신이 손자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가지고 가야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나는 핸드백에서 화장지를 뽑아서 물고 있던 거즈뭉치를 싸가지고 저만치 있는 휴지통에 가서 버렸습니다. 돌아서는데 발치한 어금니를 치과에 버리고 나왔을 때처럼 허전했습니다.


태그:#발치, #어르신의 희생, #효녀, #시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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